00047 CHAPTER 5. 사랑을 위한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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쥰은 내가 제 앞에 나타나자 처음부터 환하게 웃었다. 날 듯 뛰어와 여기까진 어찌 오셨느냐, 차라리 쉬지 그러셨느냐고 걱정스레 말하면서도, 들뜬 것 같은 감정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더라.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 걱정을 받다가, 쥰의 어깨를 토닥였다.
“누님?”
“언제 이렇게 커서.”
흐뭇하게 읊조리자 쥰의 표정이 살짝 멋쩍어하는 것처럼 변했다. 나는 피식 웃고 다시금 그를 두드렸다.
“자, 이제 가서 다시 근무하고.”
“아……. 누님은 이제 입궁하시는 길입니까?”
“아니, 용건은 다 마쳤고. 너랑 같이 귀가하고 싶어서 왔지. 괜찮겠어?”
그러자 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물론이지요.”
어린 아이처럼 또랑또랑하게 대답하는 목소리, 표정, 고갯짓. 하나하나 귀여워서 이를 어째. 그의 놀란 표정은 다시 차근차근 번져가는 웃음으로 변했다. 나는 그 표정이 없어지기 전에 얼른 설명했다.
“너 퇴근할 때까지 주변을 슬슬 산책하면서 쉬고 있을 거니까, 음, 끝나면 여기서 만나자.”
“안에 앉아계시지 않고요?”
“응. 환기 좀 하려고.”
내 지난 한 달을 아는 쥰은 내 말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쥰이 속한 기사단에게 배정된 건물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일단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어디 사람 없는 곳, 잘 정돈된 수풀과 꽃이 무성한 화원에 쪼그려 앉아서 개미를 관찰했다. 흙 알갱이도 관찰하고, 꽃줄기에 오밀조밀 난 옅은 색의 털도 관찰했다. 원래 시험기간에는 벽을 보는 것도 재밌다고 하질 않는가. 공부와 다른 일정에 쫓기는 기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개미를 보는 것도 쉬는 것이 그와 같은 맥락이다.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다시 만난 우리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마차를 타고 귀가했다.
집사와 베르덴이 나를 맞이했다.
아마 쥰은 그제야 베르덴이 나와 동행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나와 베르덴을 번갈아 보는 긴밀한 시선을 눈치 챘지만 나는 모르는 척 웃으며 베르덴의 일과를 확인하는 데에 집중했다.
“다 읽었나?”
내 기사로 있던 기간에 그는 후계자 수업을 딱히 받은 적이 없어서 내 마음만 바빴다. 나와 알드리히가 만나는 것에 베르덴이 필요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여, 나는 그를 저택에 머무르게 명령했다. 나는 몰라도, 베르덴은 공부를 시켜야지!
딱히 약 올리는 건 아니다. 음.
절대 발리앙이 기분 나빠서 그에게 푸는 거 아니니까. 음…….
베르덴은 집사 대신 내 장갑과 겉옷을 받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반 정도 읽었습니다.”
“벌써?”
내 검지 두 마디 정도 되는 두께의 책이었다. 두 시간 만에 반이나 읽었다고? 소설도 그렇게 빠르게는 못 읽을 것 같은데.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여 짝짝 박수 쳤다.
발리앙 후작이 은밀하게 전해온, 발리앙가의 기록을 엮은 책이기 때문에 내가 보지 못하는 책이지만, 대충 이러저러한 내용일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나도 거친 길인 걸, 뭐. 지루해서 파바바박 넘기며 읽으니 한 권을 다섯 시간 만에 주파. 그리하여 머리에 무엇 하나 남지 않는 기적을 겪은 적이 있었다.
손만 열심히 움직였던 기억이 난다. 턱을 고이고 벽을 보면서 책장만 넘겼었던 것 같다……. 그마저도 지루해서 졸았지. 그런 식으로 굴면 내가 극구 거부했던 가정교사를 붙이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진짜 공부를 시작했더랬다.
뭐, 어쨌든 그건 내 사정이고.
나는 책을 전해주고 읽게 한 후에 발리앙 후작에게 은밀하게 돌려주는 것만 하면 된다. 베르덴이 졸면서 읽든, 자면서 읽든, 드러누워서 읽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머리에 하나라도 남든 전연 남지 않든, 거기까지 내가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이후 나와 쥰은 각자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즐겁게 식사했다.
공작은 지난 한 달 그래 오셨듯 오늘도 따로 식사를 하였고, 공작이 자리하지 않아 한결 마음 편해졌을 쥰은 먼저 웃고, 먼저 이것저것 주제 삼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한 달 간 식사를 하자마자 일어나 서재로 가길 반복하였기 때문에, 우리 둘이 족히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알드리히가 기왕에 저질러 준 것, 오늘은 다른 일정 없이 푹 쉬겠다는 결심으로 나는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가 우리 일상뿐만 아니라, 그간 읽은 책의 내용이나 시사, 사교계에서 있었던 일에까지 미쳐 이야기가 끊이질 않더라. 결국 식사 후에 쥰과 함께 하는 티타임까지 가질 수 있었다. 둘이 함께 하는 티타임은 거의 반 년 만이고, 이 저택에서 내가 티타임을 갖는 것도 반 년 만이다.
나가 있는 새 차를 마신 적이 없었던 데다가 공부하면서 마신 음료는 물이 전부. 요즘 살롱이나 만찬에 자주 나가다 보니 바깥에서 차를 배 터져라 마시고 들어올 밖에.
우리 남매는 내 방 테라스에 티 테이블을 옮겨 사이좋게 앉았다. 이미 저녁이 깊어, 하늘은 깜깜했다. 그러나 유성우가 쏟아질 것만 같이 별들 박힌 밤. 베르덴을 기다리며 하늘을 보고 있자니, 이토록 평온할 수가 없다.
베르덴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내렸고, 언제부터일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쥰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응?
쥰이, 그러자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우리의 사이에 베르덴이 테이블을 세팅했다. 보좌된 입장임에도, 시녀나 시종이 할 일감의 일부마저 자신이 하려 하던 베르덴을 내가 허락했기에 오늘의 차를 준비하는 사람은 그였다.
나는 베르덴이 받침 그릇과 함께 달그락 내려놓은 잔을 먼저 들었다.
훈김이 얼굴에 사아 퍼졌다.
향이 좋아.
기분 좋게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눈을 멈칫 찌푸렸다가 펴고, 그리고, 설마하며 반사적으로 찻물을 넘기고.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어서,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만 같이 화닥닥 돋은 소름. 나는 마르지 않은 입안을 혀로 둥글게 쓸어보고 입맛을 다셨다. 혀끝에 남은 잔향이 어설펐다.
나는 웃고 있던 입의 꼬리를 더 끌어 올렸다. 베르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쥰의 앞에 찻잔을 놓고 있었다.
왜 하필. 오늘.
이게 베르덴을 맡을 때 경고 받은 피해인가, 아니면 베르덴과 상관없는 내 적인가. 그런 것도 아니면, 베르덴이, 범인인가.
그러나 어쨌든, 왜 하필 오늘인가. 베르덴이 처음으로 차를 준비한 오늘. 모든 것을 아는 듯이.
나는 내 잔을 놓고 일어서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쥰의 입술에 거의 다 간 찻잔의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쥰의 입이 살짝 내 손에 닿았다.
쥰이 잔을 입에 대려 내렸던 고개를 올렸다.
“누님?”
“베르덴에게는 미안하지만, 맛이 썩 좋지 않구나.”
공작에게 천대받고 있지만, 그래도 쥰은 나에 비하면 곱게 컸다. 그의 몸은 독을 모른다.
손에 힘을 주어 잔을 내리고 내리게 하여 마침내 테이블에 내려놓게 한 뒤에야 나는 헛기침이라도 할 수 있었다. 복부를 슬슬 찌르기 시작한 미약한 고통이 있었다.
지구였으면 독에 내성이 생기고 뭐고 할 것 없이 죽었을 텐데, 마법과 마나와 신관의 기도가 있는 이 세계에서는 독에 내성이 생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항상. 그렇지 않았다면 난 오래 전 쥰의 모친에게 죽었을 터.
그러나 내가 고통을 느낄 정도라면, 이건 새로운 독일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기존에 내성 있던 독의 치사량 이상의 양을 이 안에 퍼부었든지.
아직 참을 만 하니 다행이다. 배탈 났을 때에나 느낄 법한 고통이라서. ……아직은.
나는 두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짧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벌쭉 웃었다.
“미안하다. 가 보렴. 두 사람 다.”
“예?”
“어서.”
환상 어린 평온은 끝났다.
방 안이 아니라 테라스 난간 너머로 고개를 돌리고, 고집스럽게 버텼다.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배탈처럼 시작한 고통은 드디어 내게 오래 전의 고통을 선사하기 시작하더라. 죽을 것, 죽을, 것, 같다. 아파서. 테이블 아래로 숨긴 손을 말고 힘을 주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릴 때까지 힘을 주고 말았으니, 그 떨림은 두 청년 모두 보고 말았으리라.
그럼에도 두 사람은 내게 어떠한 염려도 건네지 않고 빠르게 사라져 주었다. 나는 그제야 두 팔로 배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통 때문에 허리가 절로 굽었다. 아, 너무 빠르다.
“아으. 으아아아…….”
결국 바닥을 기었다. 약. 해독약. 종류별로 챙겨둔 해독약. 덜덜 떨며 바닥을 더듬는 손아래로 작은 병이 나타났다. 그것을 마셨다. 입 밖으로 흘러내린 분량도 있었으나 섭취한 양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이 올바른 해약이라면.
그러나 고통이 가시지 않았다.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고통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고문이란 것도 생겨난 것이다. 나는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약들을 한꺼번에 불러왔다.
미친 사람처럼 쓰러져, 열고, 마시고, 흐르고, 마시기를 반복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내 입에서는 더는 이성적인 말도 나오지 않았다. 상처 입은 동물처럼 거친 흐느낌만 가득하여, 마지막 병을 마시기 직전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바닥을 긁으며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끄어, 으어어.”
그리고 바닥에 옆으로 누운 채로 웅크렸다. 마지막 약. 한 모금이면 된다. 한 모금이면.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과 손 때문에 가까스로 한 모금을 삼키고, 나머지는 다 바닥으로 쏟았다. 가뜩이나 아직 감각 온전치 못한 오른 손인데.
내가 가진 마지막 종류의 약이라, 이게 듣지 않는다면 더는 피할 길도 없다. 그 사실이 절망적이더라. 너무, 너무 절망적이어서 온몸이 떨렸다. 그러나 참 다행이지. 엄청난 압력으로 구토기가 올라왔다. 몸을 세울 힘도 없어 웅크린 채로 우억, 어억 토했다. 명치도 아팠고, 숨도 막혔다.
짧은 구토를 끝내고 헉헉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내 머리를 누군가가 안을 때까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죄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
빠르게 수그러드는 격통의 덕분도 있었고, 내 머리를 꼭 껴안고 있는 품에서 나는 향기가 내 것과 비슷한 덕분도 있었다. 아, 나를 안은 그는 떨고 있었다.
다독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남은 구토기가 올라와 푸르르 진저리를 치며 신음을 흘려야 했다.
“흐…….”
그것으로 드디어 끝.
등이 그의 무릎에 받쳐져 있었음에도 이 자세에 들어가는 불편함이 조금도 없었다. 눈물로 번진 내 눈에 테라스 바깥의 밤하늘이 들어왔다. 또, 살았구나. 나는 힘없는 손을 올려 나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을 잡았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고, 흘린 약과 신내 나는 토사물이 입과 뺨에 더럽게 번져 있는데, 안으면, 어떡해, 쥰.
팔을 잡고, 그에게 매달렸다. 밀어야 하는데 미는 게 아니라, 매달려.
안으면 어떡해. 네 옷이 더러워지잖아.
쥰은 내 머리를 안은 채로 좀 더 웅크리고 흐느꼈다.
난 괜찮아. 가서 씻으렴.
그 말을 실제로 전하고 방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나는 입을 열어 끄윽끄윽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아파서, 아프,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베르덴경이, 의사를 불러올 겁니다. 조금만, 조금만, 제발.”
“아, 안 되는데. 그러면……, 알면, 안 되는데.”
비스듬하게 안겨 있던 몸을 좀 더 세우고 내가 잡은 쪽의 쥰의 팔에 얼굴을 기댔다. 쥰을 잡고 있는 손에는 나도 놀랄 정도의 힘이 들어가고, 눈이, 눈앞이, 물이 차올랐다. 곧 눈앞에서 벗어난 그것들은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아프다.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넌 내 동생이야. 누가 무어라 해도 내 동생이다.
베르덴이 저택에 상주하는 의사를 비밀리에 불러 오기까지, 나는 쥰에게 매달려 소리 없이 울었다. 너무, 너무, 아팠다. 배가, 목이.
왜인지 머리가.
============================ 작품 후기 ============================
기억, 본능의 일부.
에브의 넌 내 동생이다 하는 말은, 꿈에도 나왔지요! 여기서 떠오르다니 무슨 뜻일까요.
떨어지라 생각 하면서, 더 잡고 매달리고 있는 건 오류가 아닙니다. 혹시 몰라서 말씀드립니다.
실은 개인적으로 기쁜 일이 생겨서, 지금 너무 좋아서 손이 벌벌 떨리는 중입니다. 우울했던 나날을 뚫고 내린 한 줄기 빛이라서, 막, 막, 벅차서, 으으.
초고.
진짜 자유연재입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독자님들께서도 오늘 좋은, 기쁜, 벅찬 하루 보내실 수 있기를:D
+설명(=폭주의 결과로 횡설수설) 삭제했습니다(/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