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CHAPTER 5. 사랑을 위한 사랑 =========================
“전하께서, 말씀이십니까?”
“그거 어조 묘하네요. 뭐, 누이에게 부담 줄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이만 넘어가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눈을 찌푸리고 차갑게 단언했다. 맨 처음 그를 거절한 방식이 너무 가벼웠다는 것은, 한 달 전 인정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내가 그를 앞으로 부드럽게 거절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차라리 더 냉정하게 차단하면 차단했지, 부드럽게는 결코.
그러나 내 말에도 알드리히는 태연하게 웃으며 물었다.
“우리는 결코 남녀의 사랑으로 맺어질 일 없다고 말하려고요?”
“……예.”
“미안합니다, 누이. 나 그거 듣기 싫어서 지금 넘어가려 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다 말해도 누이한테서 듣는 건 꽤 아프다는 걸 알아서요. 한 달 전에.”
“…….”
정말, 싫다.
“이젠 정말 쉬어요. 방해 안 하겠습니다. 오늘은 종일 집무실에 있을 테니 언제든 나와도 좋아요.”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언가가 싫다.
나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일어나는 그를 따라 시선을 올렸으나, 그는 정말 자리를 피해주려는 것 같았다. 내가 앉아있는 포퇴유를 지나쳐가기 전 알드리히의 ‘맨손’이 가만히 내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가기는 했다. 우리 아무리 친구라 하여도 여태 그런 식으로 닿은 적은 없었다. 에스코트를 위한 것도 아니고 부축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닌데. 내 손이나 팔뚝도 아닌 내 머리.
나비처럼 닿는 그 손에 나도 모르게 움츠리고 말았지만, 그는 가볍게 토닥이고 떠났다.
“…….”
그렇군. 우리 관계는 그대로인 구석은 그대로 간직하며, 달라졌다.
나는 조금 전까지 황태자가 앉아있던 맞은편 포퇴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후에 아리엘에게로 그의 마음이 옮겨가지 않는 한, 아니, 아니다. 옮겨간다 해도. 알드리히가 타인의 눈들 많은 곳에서 내게 이런 식으로 친근히 대하는 것을 자주 보였으니 그 소문은 아리엘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소문 하나하나도 차근차근 쌓아가며 나를 향한 적개심도 쌓아가고 있겠지. 알드리히의 마음이 그녀에게 옮겨간다 해도 나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녀와 에본느 사이에 있던 일이 없는 것처럼 되지 않듯.
아주 간만에 나를 찔러 죽인 강도를 떠올렸다.
정말이지 아주 간만이다. 내게 살의를 가진 아리엘과 만나며 내가 어찌 살해당했는지를 자주 생각하게 되었었고, 그리고 점차 잊어갔다. 아리엘에게 집중하고, 내가 바꾸는 일들에 집중하다보니 강도에게 살해당한 과거보다야 미래에 내 목 잘릴 지도 모른다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된 것 같다.
나는 가는 숨을 길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지난 한 달 푹 쉬지 못하여, 아리엘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도 한 달 만이다. 내가 무사히 공작위에 오르면 아무리 아리엘이라도, 설령 그녀가 황후가 된다 하더라도 어지간히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는 이상 나를 쉬이는 건드리지 못한다. 물론, ‘쉬이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지, 건드릴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쓴 글에서 그녀가 에본느를 몰아갔던 그 방법대로 하면 공작이라도 고꾸라뜨릴 수 있을 테니까.
따라서 내가 훌륭하게 공작이 되더라도 일이 어찌될지는 모르는 일. 그럼에도 지난 한 달은 공작의 압박에 맞추어 사교 활동과 공부에만 집중하였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는 생각도 있었고, 미리 공부를 해 두고 나중에 여유롭게 대비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미로 골목을 더 털어봤자 나올 것이 없어서, 기실 재차 암살 시도가 일어나야 무얼 캐도 캐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음.”
그리고 이제는 그 과정에서 베르덴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어 떠오른 생각에 앓는 것처럼 짧게 흣 웃고 말았다.
그가 내 호위기사일 때에야 괜찮았지만, 지금은 기간 한정의 보좌다. 돌아가 발리앙 후작이 될 후계자라는 지위를 인정하겠다고 협상했으니, 내 사정으로 그를 다치게 했다가는 좀 미안하게 된다. 협상한 내용대로라면, 양심의 가책에서 그칠 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미안하긴 하니까…….
남들은 베르덴을 다 내 보좌로 알도록 외견이 만들어졌지만, 문서로는 그는 후작일이 이러저러하다고 미리 배워두기 위하여 내 신세를 지고 있는 것에서 그친다. 사기는 아닌데 나중에 많이들 배신감을 느끼리.
내 보좌로 넣어 보호 어쩌고 하느니, 차라리 백작위를 승작하게 하여 후계자임을 공표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밀실에서 내가 제안하자, 후작은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그럼 후에 계승권의 순서가 애매해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에 발리앙 후작은 문서화한 이 협의서와, 이 협의서의 신빙성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수정한 유서가 있으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 물론 그의 의견에는 동의한다. 두 문서가 있으면 베르덴의 후작위 승작에는 큰 문제가 없을 터. 다만 나는 그런 급박한 지경이 되도록 발리앙 후작, 그 노련한 가주를 몰아넣은 ‘누군가’가 후작이 된 베르덴을 가만히 둘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덴이 내 보좌로 들어오며 그 누군가의 계획은 틀어졌을 테지만, 내가 생각키로는 그 계획에 베르덴이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것도 포함이 되어있었을 것 같다. 발리앙 후작 정도 되는 사람이 설마 그런 짐작을 못했을까마는.
그러나 나도 그도 모르는 척 했다.
망가진 몸을 최대한 내색 않고 지낼 그를 위한 마지막 존중이었다. 존중. 그의 죽음을 위하여.
발리앙 후작이 진정 베르덴을 위한다면, 그러니까 내 말은, 베르덴과 가문을 위한다면, 대귀족으로 태어나 대귀족으로 자라온 이들의 방식대로 베르덴과 가문을 위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발리앙 후작이 최후에 택할 선택을 알고 있었다.
베르덴은 절망할 지도 모른다. 아마, 그리할 것이다. 부모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보통, 자녀들은 좌절하리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미리 말해주지 않은 내게 절망을 토해낼 지도 모르지.
귀족들이 취할 수 있는 그 끔찍한 선택에 대해 내가 크게 놀라지 않고, 크게 이상함을 느끼지 않고,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감이 있었다. 여기 사람들의 죽음에 지구에 있을 때보다 훨씬 무덤덤해진 건 내가 겪은 죽음이 많은 탓이다. 그러나 그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죽음을 겪은 적 없는 것을 고려하면, 내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이 되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쯤에서 우울한 생각을 끊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테라스 쪽을 보았다.
넓은 미니홀이라 나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들어오는 빛의 굵기, 진하기 정도는 볼 수 있었다. 연노랑 병아리 날갯짓처럼 느껴지는 오전의 햇빛은 확실히 아니었다. 개나리 꽃잎보다는 뜨겁고 짙은 색의 빛이다. 노을이 질 것처럼 푹 가라앉기 시작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오후 네 시를 조금 지난 시각.
음. 모처럼 황궁에 왔으니, 쥰과 함께 돌아갈까.
알드리히의 말이 쥰의 생각 위로 겹쳐 떠오르자 비식비식 웃음이 나왔다. 그는 내게 그리 알뜰살뜰하게 굴어도 실은 심지 굳은 청년이라, 션이 무슨 협박을 했다고 그것에 넘어가 내 정보를 건넸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그를 만들어 써서 알지. 자신이 나를 멈출 수 없었으니, 내가 약한 션을 움직여서라도 나를 쉬게 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렇다면 참 기특하고 예뻐서 어째. 그 사랑스러운 아이, 예뻐서 어떻게 해.
내가 션에 약하다고 쥰을 거절하고 션의 말을 들을 리는 없었다. 쥰이 모르는 건, 내가 션보다는 그에게 약하다는 점이다. 경계해온 세월치고 나는 그를 무의식중에 깊이 믿어 ‘내가 공작되지 않고 쥰이 공작된 후에 아리엘에게 마음 주었을 경우’를 생각도 못하고 있었더랬다.
반 년 전의 그 깨달음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한데, 쥰, 내가 너보다 션을 우선할 리가.
“쥰……. 쥰, 내 동생.”
들어야 할 이 없이 홀로 중얼거리기에는 아직 낯선 어감인가. 내 동생. 쥰을 앞에 두고는 살랑살랑 나오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에게 몹시 잘 어울리는 이 예쁜 이름, 내가 글을 쓰며 이 이름을 어떻게 지었더라. 으음. 그냥 떠오르는 대로 지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다리에서 담요를 걷었다.
역시 쥰에게 가 봐야겠다.
일어나서 갈색의 담요를 잘 개켰다. 개킨 담요를 내가 앉아있던 포퇴유에 놓고, 몸을 굽혀 그 담요 위를 장갑 낀 손으로 살짝 눌렀다. 알드리히. 너.
황태자.
황제 되어 에본느를 죽인. 죽일 지도 모를. ……죽일 것 같지 않을.
손을 살짝 들었다가 담요를 가볍게 토닥였다.
“……미안.”
그 사과는 툭 튀어나왔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제어하고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속삭이며 손을 거두고, 몸을 세웠다.
홀에서 집무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가자, 알드리히는 눈을 찌푸렸다.
“안 쉬어요?”
나는 씩 웃었다.
“이 정도면 많이 쉰 겁니다.”
“혹시 오늘 어디 만찬에라도 가야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쥰에게 들렀다 같이 귀가하려 합니다.”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무단 퇴근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아, 그게 아니라. 누이는 어디서 뭐하면서 기다리려고요? 그 시간에 차라리 쉬지. 내가 라이네경 불러주겠습니다.”
배려는 고맙지만, 내가 가고 싶다.
나는 말없이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내 뜻이 족히 전해졌는지 알드리히도 이내 한숨을 쉬고 입 꼬리를 올렸다. 아, 또, 꿍꿍이.
“그럼 잠시만 기다렸다가 같이 가겠습니까?”
떠보는 게 다 느껴지는 어조였다. 숨기지 못할 사람이 아니니, 일부러 그러는 것일 텐데. 나도 웃는 얼굴로 물었다.
“전하와?”
“아니, 포르타경과.”
“어, 말씀하시는 기사가 션 포르타입니까?”
“아니요. 오라비 쪽.”
시드니?
토벌 작전 기사단과 다름없어 중요한 기사단이긴 하나 황태자와 요즘 시기에 부딪힐 일이 있나? 그 기사단은 아직 황제가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지난번에 시드니에게 나에 대해 물어도 대답지 않았다고 알드리히가 말했던 바.
의아해하며 다시 반문하려는데, 입술이 그새 말라 떼어지지 않았다. 하여 혀로 입술을 적시는 것처럼 훑고 말았다.
나는 그 사소한 역경을 넘어 마침내 반문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흐음. 그 무슨 일이 내게 있느냐고 묻는 겁니까, 포르타경에게 있느냐고 묻는 겁니까?”
“이 세상에 일어났느냐고 여쭙는 겁니다.”
“그걸 또 그렇게 피해가네요. 뭐, 별거 아닙니다. 그 기사단도 내게 넘어왔거든. 오늘부로. 정확하게는 네 시부터.”
책상 앞 의자에서 일어나며 그는 두꺼운 종이 뭉치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책상에 던지듯 놓고 왼 손으로 오른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라.
황제의 병세가 계속 나빠지고 있구나. 글대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해서 인사를 하러 오는 겁니까?”
“그것도 있고, 첫 보고도 하고. 실정도 듣고. 겸사겸사.”
여기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보는 눈 때문에라도 황제를 염려하며 알드리히에게 위로를 건넸겠지만, 나는 알드리히가 황제를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실부터가 ‘잘 포장된, 잘 가장된’ 가족이라서. 물론 표면으로는 그리 화목한 부자관계가 따로 없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가 사귀어오며 황제에 대해 예의상으로라도 이야기 한 횟수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 나는 여기서 황제를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납득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알드리히가 빙글빙글 웃었다.
“해서. 어쩔 겁니까? 같이 갈래요?”
“아닙니다.”
“얼마 안 걸려요.”
“괜찮습니다.”
내가 여러 차례 거절하고 나서야 알드리히의 눈이 정말 웃는 것처럼 가늘어졌다.
그는 나지막하게 웃다 말했다.
“누이는 참 사랑스럽게 배려를 해요. 압니까?”
“……사랑스럽…….”
나를 표현하는 형용사라고 말해준 건데도 내가 말하다 목이 막혔다. 차마 제대로 말을 못하겠어. 사레에 들리지 않은 게 다행이다.
나는 아랫배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쉬고, 이마를 쓸었다. 더 말해봤자 나만 답답하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건강도 챙기면서 다녀요. 아니면 며칠에 한 번씩 부를 테니까.”
“…….”
야, 야. 무슨 말을 해도 그런 끔찍한 말을.
질색하며 꾸벅 인사했다.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 알드리히는 내가 집무실을 나가기까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문을 나오자마자 작약궁의 시종장과 기사 몇이 내게 인사했다. 나는 웃으며 화답하고 그들을 지났다.
그리고 화려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은 적은 층의 복도를 걸어 계단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만났다.
“…….”
약 두 달만의 재회.
나는 발을 멈추고 그를 보았으나, 옅은 웃음과 함께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결국에는 그를 지나쳤다.
무감정한 그의 얼굴이 나 지나간 뒤에 어찌 변했을지는 모르겠다. 변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은 내가 그를 지나칠 때 그의 팔이 살짝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를 지나치며 만들어진 바람에 단정한 공기 냄새가 전해져 왔다. 그것은 세탁 후 보송보송하게 마른 옷 냄새일 수도 있고, 그의 장갑에 묻어있는 쇠 냄새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내게는 많이 익숙하고 일상적인 공기였기 때문에 편안했다.
걸어가며 저도 모르게 평온한 미소를 지을 정도로.
그런데 그가, 묻더라.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날아들어 찾아온 나지막한 음성에 나는 몸을 반 정도 틀어 옆으로 서서, 고개만 조금 틀어 그를 보았다. 내 왼쪽 눈꼬리 쪽으로 눈동자가 굴러 떨어졌다. 그도 몸을 약간 돌려 나를 보고 있었다.
뜻 모를 미소가 나왔다. 션이 시드니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그를 만나면 마냥 불편하기보다는 시원해. 그리고 따스하다. 봄바람, 가을바람 섞여 내게 부는 듯했다. 나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한숨을 삼키고 앞을 보았다. 반만 튼 몸 탓에 앞은 복도 벽이다.
대답할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다. 단지.
음.
나는 더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히는 인사를 하지 못한다. 그는 나와 같은 귀족이지만, 이제 같은 선에 서 있지는 않고. 그러나 친애의 정과, 관계 사이의 거리로 예의의 정도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하여 아주 잠시 고민했다.
션은 내가 후작 되었음을 알아도 언니, 언니하며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걸 내버려 두었다. 아리엘은……. 우리의 티타임을 떠올렸다가 바로 지워버렸다. 베르덴은 내 보좌가 되었고, 알드리히는 그대로 내 윗사람이다. 헤르조는 만날 일이 요원하니 이제 남은 사람은 시드니뿐인데 나는 그를 어찌 대해야 하나.
갈등은 짧았지만, 서럽도록 깊었다.
이유 알지 못하게 코가 알싸하게 매워지더라. 이상한 일이다. 몇 없었던 친구들이 하나둘 줄어간 지금,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친구 중 한 명인 그를 대하며 이제야 내 신분의 변화를 실감했기 때문일까.
그래도 나는 뒷목의 살이 아주 조금 접힐 정도로 턱을 들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건들거리면 딱 좋을 오만함이다. 누가 보면 저런 자신만만한 녀석, 이라며 퉁을 줄지도 모를 자세임에도 거리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건강해. 염려 고맙네.”
대답은 없었다. 시드니는 밤하늘과도 같은 짙은 눈으로 나를 보다 말없이 눈길을 조금 내렸다. 내 얼굴에서 내, 목 즈음, 그리고 더 내려가 내 신발 앞의 바닥 즈음. 시선은 사르르 내려가다 고요하게 멈춰 섰다.
그는 말을 고르는 것 같기도 했고, 목을 가다듬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인내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리하여,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했다. 냉철한 무표정은 여전한데.
“…….”
멀리서 그의 얼굴을 살피는 짧은 시간에도 아무 말이 없자, 나는 다시 씩 웃음을 보낸 뒤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오금까지 내려오는 긴 쥐스토코르가 무릎 앞을 휘감았다가 풀렸다.
잠시 후 나는 매끄럽게 마감된 난간에 손을 올리고 미끄러뜨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 작품 후기 ============================
'아, 남주는 결국 얘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하는 정도의 내용이 연재될 때까지는 일단 저는 쉿쉿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그때까지 번갈아가며 남성진들과 션(...?)의 매력을 올리려 노력하겠습니다. 독자님들 헷갈리시게(끌려감).
중요!
혹시 알고 계실 지도 모르겠지만 가면꽃 작가님을 쓰면서 튀르쿠아즈 의자를 제법 여러 번 썼습니다. 저는 이미지를 찾아본 후 당연히 1인용, 푹신푹신한 등받이가 있는 암체어 같은 걸 생각했고요.
문제는, 그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turquoise chair를 검색해서 '아, 대충 이런 모양이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자료를 읽어보면서 든 생각이 '소파 겸용 디 베드가 그렇게 작은 의자일 것 같지는 않은데...?' 였고, 알고보니 튀르쿠아즈가 이미 터키석, 청록색이란 뜻도 있어서 그색으로 맞춰진 의자들 이미지만 주르륵 나왔던 겁니다. 지금도 여러 방면으로 검색은 해 보았는데, 정확한 의자 모양은 못 찾겠네요. 찾아봐도 얘가 어떻게 생긴 의자인지가 안 나와요!!!ㅇ<-<
어쨌든 튀르쿠아즈는 다시 제가 찾아보는 것으로 하고! 제가 여태 생각하며 써 왔던 튀르쿠아즈의 모양은, 포퇴유나 베르제르 의자 모양입니다. 물론 앞으로는 그때그때 맞춰서 베르제르나 포퇴유로 쓸 거고요! 문제는 지금 1편부터 하나하나 찾아서 바꾸려니까 왜인지 무진장 아득하게 느껴져서...
죄송합니다. 시간 있을 때마다 차근차근 수정해 나가려 하니, 부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해주시고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 감사. 벅참. 막 섞여서 마음이 빵빵하게 차는 기분이었습니다. 화이팅하겠습니다♥♥
초고.
자유연재입니다. 감사합니다: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