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45화 (45/157)

00045 CHAPTER 5. 사랑을 위한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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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궁인 작약궁에 들어서는 것은, 알드리히에게 끌려갈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설령 내 발로 들어서는 것이라 하더라도 긴장이 된다.

나는 홀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그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내가 후계자 아닌 소공녀일 때 황태자와 친근하게 지내는 것도 남녀관계가 있어 문제지만, 내가 후작이 되어 그러는 것도 문제라서 방문이 많이 늦었다. 이런 알현 한 번이 정치적 행보로 이제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아리엘의 문제도 칡넝쿨처럼 길고 끈질기게 얽혀 있어서…….

“…….”

뻐끔 벌렸던 입술을 모으자, 아래턱이 바르르 떨리며 입이 닫혔다.

저번에 아리엘과 함께 왔을 때엔 알드리히가 집무실로 나오더니, 이번엔 언제나처럼 내가 미니홀로 안내되더라.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그 대우가 그의 목소리와 겹치니 묵직했다. 홀에 들어서기 직전에 나도 모르게 눈을 깊이 감았다 뜬 것은, 그 무게를 버티려 하는 것이 일순 몹시도 벅차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질 수 있는 무게가 아니라서. 그러나 말했듯, 일순의 일이다. 바위섬 같은 것이 나를 누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던 건.

알드리히의 마음을 부담스러워하는 일 자체는 반 년 전부터 내내 이어져왔다.

나는 내가 들어오자 일어서는 알드리히를 향해 간소한 예를 갖추었다.

“전하.”

“누이, 어서 오세요.”

변함없는 호칭. 변함없는 웃음. 변함없는 여유. 내가 당장 볼 수 있는 모든 게 변함없어 내 마음이 더 불편했다. 한 달 전의 그가 에본느에게 한 고백은 내가 느끼기에도 절절하였더랬다.

하지만 나도 그도 아는 바. 달라질 것은 없다. 나는 침을 삼키고 투덜거렸다.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부르지 마십시오. 이제는 정말 문제 생깁니다.”

“누이가 오늘 여기 오는 것이 그 문제의 시작이었다고는 생각 안 합니까?”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누이 없이 내가 어떻게 삽니까?”

그의 맞은편 포퇴유에 앉다 멈칫하고 만 내 숨을 알드리히가 느끼지 않았기를.

무사히 앉은 후에도 알드리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아차리지 못했든, 알아차렸든. 어느 쪽이라도 이 기묘한 침묵이 끔찍하다. 나는 결국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이마를 쓸었다. 제길. 달라진 건 없는데, 의식하게 된다.

알드리히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없이 나를 보고 있는데.

……아, 어쩔 수 없다. 나는 얼굴 구긴 상태로 푸르르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응? 뭐가요.”

“용건 없이 부르셨을 리가 없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계시잖습니까.”

“아, 용건. 음. 무엇으로 할까, 그거.”

이 자식 설마.

편하게 기대어 있던 등받이에서 그가 상체를 떼었다. 그리고 팔걸이에 팔꿈치를 거치고, 그 손에 턱을 고이더라. 알드리히의 은근한 웃음을 보며 나는 비슷하게 싱글거리며 웃음 지었다.

내가 진짜 설마설마 하며 묻는데…….

“그냥 부르신 겁니까?”

“예. 재밌지 않습니까?”

“…….”

때리고 싶다! 때리고 싶다! 날리고 싶다! 황태자만 아니었으면 때렸을 텐데!

손으로 받치느라 고개가 기울어졌지만 저 웃음이 평소의 여유와 장난기를 간직한 웃음이라는 건 알겠다. 나는 올라가려 하는 두 손의 끝을 얽어 잡고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입궁을 명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아, 누이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싫네요.”

“저는 이제 후작입니다. 전과 같은 어미를 쓸 수는 없습니다.”

“그걸 내가 모를 것 같아요? 누이보다도 더 많이 생각했을 걸. 그러니까 누이, 적어도 내 앞에선 그리 말하지 말라는 거잖습니까.”

“싫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누이라 부르지 마시라 했을 때 전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복수라고요? 이게?”

“복수가 아니라 응당 해야 할 바를 하는 것뿐입니다.”

웃으며 하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잠시 나를 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가늘게 접히는 두 눈에서 적어도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식은 없었다. 고운 웃음이다. 그가 미친 자식인 것을 고려해도. 그는 그런 웃음을 짓고 나를 보다 다시 비식비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머리 쓰지 말아요. 그러라고 부른 거 아니니까.”

“…….”

그리고 나는 그를 보던 그대로 굳었다.

단계별로 입 꼬리가 내려가고, 당겨져 있던 얼굴 근육이 풀렸다.

눈에 띄는 반응일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나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턱을 당기며 눈을 감았다. 그를 피한 것이다. 그래도 알드리히는 여유 만연하여 더운 여름 바람 같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누이 요즘 바쁘다면서요. 라이네경을 협박해서 션경이 정보를 뜯어내고, 션경은 해 뜬 시간에 잠깐 외출 다녀오면 안 되겠느냐고 나한테 눈총을 보내거든. 가서 누이한테 한 소리 하려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불렀습니다.”

“…….”

“전처럼 가출은 아니어도, 오늘이라도 좀 쉬고 가요. 내가 불렀다는데 공작이 뭐라 할 수도 없잖아?”

에본느를 향한 그의 마음, 의심치 않는다. 밀도가 너무 높고 더워서 내 숨이 턱 막혀서 그렇지.

이성적으로 처음 부딪혀오는 사람이라서 이리 거부감이 드나. 이상할 정도다. 이야기는 나로 인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음을 알고 있으니, 황태자의 마음 역시 달라질 수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무언가가 내 머리를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오래된 버릇인 변덕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후회 같은 무언가가 짙었다. 경계심일 수도 있다. 가슴이 텅 비어 내려간 것 같은 이 느낌은.

나는 손을 들어 목뒤를 쓸어내리며 눈을 떴다.

음, 역시 이 자식의 실체를 아는 탓에 발동하는 본능적인 거부감 같은 건가. 닭살, 소름, 그런 거.

그와 눈 마주치고 있지 않는데도 내 머리꼭지로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진다. 기감이 날카롭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 만한 눈길이다. 나는 작은 숨을 들이켜고 고개를 들었다.

우리의 눈은, 마주쳤다.

나는 씩 웃었다.

“감사하지만, 제가 자발적으로 바쁘고 있었습니다.”

“압니다. 방해해서 미안하고, 그래서. 그런데 누이가 오드리나에 있는데 몸 상해가는 걸 내가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

“누이가 아프면 내가 심심하단 말이야.”

그럴 줄 알았다.

부담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가셨다. 장난 담아 식은 눈으로 그를 보다가 등을 기댔다. 쉬라 만들어준 기회니 쉬어야지. 저택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보다야 낫다. 눈을 감고 푹 한숨을 쉬는데, 내 다리 위로 따스한 것이 가만히 덮이더라.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누이를 죽이려 했던 자들 말입니다.”

나지막한 음성이 나를 급작스레 찔렀다. 다리 위에 놓았던 두 손, 담요에 덮여 있는 그 두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아직 눈뜨지 않았다.

“찾았습니까?”

“…….”

“찾았어요?”

진정한 용건은 이것이었겠구나.

앞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어 올렸다. 윗입술이 앞니를 덮어 남이 보면 그저 아랫입술이 빨려 들어간 것처럼 보이고 말 것이다. 아니면 아주 짙고 깊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알드리히는 세부 내용을 모른다. 한 달 전, 그는 끈질기게 물었으나 내가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날에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를 택했었다. 오늘도 그리하리.

그래도 어쩌면 황태자가 황태자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눈 감은 채로 쓴웃음을 짓고 나른하게 대꾸했다.

“전하, 저 쉽니다아…….”

“음. 그래서 물은 건데요. 허점을 찌르면 대답할까 해서.”

“…….”

이 자식.

눈을 번쩍 뜨고 싶었지만, 이미 깊게 감은 터라 그리 했다간 시려오는 걸 견뎌야 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빛이 가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꽃봉오리 열리는 것처럼 천천히 뜨이는 눈에 알드리히의 얼굴이 들어왔다. 다, 들어올 때쯤,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다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

그는 무서울 만큼 차가운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움직이지 않던 그가 깨어난 것처럼 보인 건, 그의 눈꺼풀이 아주 조금 내려간 덕분이었다. 그리하며 같이 도르르 떨어졌던 눈동자는 직후 올라와 다시 나를 담았다.

내 속에서 불쑥 한 단어가 떠올랐다.

폐하.

……아, 이건 또 뭐야. 그는 황태자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멍하게 있을 때에는 불쑥 불쑥 뛰어오르는 말을 거르지 않고 툭 던져버리니 지난번에 그런 일도 일어난 거다. 서재에서. 생각에 잠겨서 알드리히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그가 타이밍도 좋게 들어버리는 엄청난 우연.

그 엄청난 실수를 떠올리자마자 잊으려 애쓰며, 나는 몹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전하, 제게 사각은 없습니다.”

물론, 있다. 있으니까 그렇게 여기저기서 당하고 다니지.

여기서 알드리히가 퍽이나 그러겠다고 반문한다면, 나는 또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사실대로 대답할 것이다. 미래가 그려진다. 우리가 나눌 농담이. 우리의 평소. 우리의 보통.

우리의 달라지지 않은 상황.

그러나 그는 입을 열어 다른 질문을 하였다.

“발리앙경이 황궁에서 누이 앞에 무릎 꿇었던 것은 기억합니까?”

이야아, 아주 간단하게, 우리의 평소는 또 다시 무너진 것이다. 목이 조이는 것 같은 저 음성을 나는 기억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건 정말 힘들 것 같다.

……안타깝게도.

내 눈꺼풀 끄트머리에 힘이 들어갔다. 눈동자 상부를 덮고 있는 눈꺼풀 점막, 딱 그 부분이 시려졌다. 그래도 입 꼬리를 더 끌어올리며 입을 벌리고 싱글벙글 웃었다. 그리고 기억하고 있다는 뜻으로 눈썹을 쫑긋 올렸다 내렸다.

“이런, 역시 소문났나 봅니다, 그거.”

그것은 낚아채라고 건넨 농담이었음에도, 알드리히는 또 제 말만을 잇더라.

“그럼에도 그렇게 내치더니. 다시 받아줄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그때는 몰랐습니다.”

“…….”

내가 포기치 않고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 그제야 픽 웃었다. 아, 풀렸다. 그의 얼굴에 짓궂은 여유가 돌아왔다.

“그래서, 그 사람, 일 잘 하고 있습니까?”

“유능합니다. 아무렴 발리앙가의 후계자인데 어중간하겠습니까.”

“……음-흠.”

갑자기 그가 콧노래 하듯 의뭉스러운 소리를 흘렸다. 또 왜 그러냐고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돌아온 설명은 없었다. 그는 대신 한 쪽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건 무슨 꿍꿍이 있는 웃음인데. 소름끼친다. 나는 질색하며 등을 더 등받이에 붙였다. 더 붙일 곳도 없는데 본능이 시켰어.

슬슬 잠도 달아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쉬는 것으로 셈해야 하나. 모임에 가서 말 한 마디 한 마디 계산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그가 후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아, 잘 모르겠다. 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쉴 때 누군가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면, 음……, 내 지인 중에서는 역시 시드니가 가장 좋다. 션은 나와 친한 만큼 한바탕의 걱정과 염려를 거쳐야 해서. 시드니는 적당하게 인사를 하고, 적당한 침묵, 적당한 거리와 함께 앉아 있어 주리라. 친구 중에서는 가장 멀지만 휴식과 가장 가까운 느낌의 사람이라니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멍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내 반응에도 알드리히는 아무렇지 않게 묻더라.

“있지요. 나 지금 불안해서 죽을 것 같아, 보입니까?”

“예?”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문하고, 직후 그의 뻔뻔함에 일상적으로 감탄했다. 불안? 그게 너하고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합니까. 진심? 진심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나는 씩 웃으며 아주,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빠르고 정확한 의사표현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알드리히도 나를 보며 마주 웃었다.

“큰일이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곁가지로 빠졌던 주의가 완전히 돌아왔다. 그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큰일이라는 것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의아해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자, 알드리히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나 지금 질투하고 있어요. 누이.”

그리고 그에, 내 웃음이 일그러졌다. ……개소리. 나는 차갑게 그를 불렀다.

“전하.”

“아, 아. 그렇게 부를 것 없습니다. 나도 내 잘못 알거든.”

“아시면서도 말씀하시는 건 어찌된 영문입니까.”

그 순간, 가출이 잘못이라는 걸 여섯 살부터 알았다며 공작의 혈압을 높였던 일이 떠오르긴 했다. 알면서도 가출을 자행한 나나,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입에 담는 알드리히나 오십 보 백 보다.

부디 이런 식으로 닮은 구석을 나타내지 말아주면 좋겠다…….

우리가 이래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친분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건 둘째 치고, 묘하게 내게 허망한 느낌을 주고 말아.

황태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머리가 마음을 못 이긴 결과일까요?”

============================ 작품 후기 ============================

글을 진행하다보면 특정 인물에게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ㅇ<-<

이번에는 바탕화면에 저장해두는 파일이 날아가서 멘탈이 부서지는 줄 알았습니다.

분명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잘 열려 있던 게, 컴퓨터를 껐다 켜니까 파일이 손상되었다고....... 인터넷에 올린 연재분이 이 파일이랑 같이 날아갔으면 이번에야말로 복구할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등골이 서늘해서 부랴부랴 다시 파일을 만들고 메일로 보내두었습니다. n드라이브..?인가 하는, 파일이 자동으로 온라인에 저장되는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쓰는 방법을 공부하다가 때려치웠던 게 몇 년전이더라....(아련) 이해가 안 되더랍니다. 큽.

초고.

자유연재입니다. 감사합니다:D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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