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3 -CHAPTER 베르덴. 부디 기억하라 =========================
베르덴 외전
본디 베르덴의 성정은 불 같았다. 가지고 태어난 성격도 물론 있었지만, 장래 발리앙 후작이 될 장남으로 대우받고 존중받으며, 동시에 압박도 많이 받은 탓도 한몫했다.
그래도 장래 승작할 장남 장녀로서 베르덴과 에본느가 교류를 시작한 이래, 에본느가 베르덴의 성정을 나무라거나 화를 내는 일이 단 한 번을 없었다.
그러나 베르덴의 오만한 성정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시드니를 통하여 헤르조를 알게 되고, 시드니가 아닌 헤르조가 그들 무리에 속하게 되는 일을,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상당히 불만스럽게 받아들였다. 세 사람이 절친해져야 한다면 그건 그가 생각하기로 그와 시드니와 에본느여야 했으므로.
헤르조가 그처럼 날을 세우는 성격이었다면 어쩌면 중간에서 에본느만 고생했을 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들의 교류지만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여,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멈출 수 있는 교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이래 베르덴은 헤르조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아마 헤르조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그들 두 사람은 서로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동생에 관한 어떤 사실을 느끼게 된 것을 기점으로 그가 서서히 신중하고 차분해지려 노력하면서도 그러했고, 그 어떤 사실을 친구에게 들키게 된 이후 무예를 배우게 되었을 때는 더더욱 그러했고, 불같은 성정이 거의 다 가려지게 되고 나서도 그러했다. 그런 불편한 관계를 친애하는 에본느에게 보이지 않기를 그 뿐만이 아니라 헤르조도 원한 게 어쩌면 다행한 일이었다.
베르덴은 에본느를 아꼈다.
그녀는 그에게 소중한 친구이고, 이해자다.
첫째 아이가 장차 후계자 될 존재로서 겪게 되는 수많은 것들을 에본느는 이해했다. 그는 나누었고, 위로받았다. 그에 비해 에본느는 위로하고 듣기만 하였지 위로를 바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 깊은 생각을 가지려 노력하고 노력하던 즈음이었다.
그러니까, 동생에 관한 사실들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야 함을 알게 된 이후의 일. 주도자가 곧 실행자인 게 아니라, 배후자 따로 실행자 따로 있는 것을 알게 된 이후의 일.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심각성을 체감한 건, 에본느가 처음 오드리나를 떠나 사라졌던 때였다.
그 체감은 어쩌면 그의 모든 것을 바꾼 일이었다.
그 체감 덕에 그녀는 그 가출 전부터 이미 여러 번 살해당할 뻔 했다는 것도 확신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 첫 가출도 실은 가출이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확신에 가까운 짐작까지 할 정도로, 그는 극심히 충격을 받았다.
아.
제 어린 동생이, 정말 어린 동생이 다른 동생을 위하여 에본느를 살해하려 한다는 건, 정말 맨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동생은 어린 나이에도 실로 놀라울 정도로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일을 꾸몄다.
어느 밤에는 라이네 저택에 침입하려 한 암살자들을 에본느 모르게 저택 바깥에서 친구와 함께 차단해낸 일도 있었다. 그는 동생이 그런 짓을 한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아서 증거를 찾았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것은, 에본느가 새 모친으로부터도 살해 위험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동생도 소중하고 에본느도 소중하다. 또, 가문 역시 그가 지켜야 할 것이었다.
괴로워하며 고심하던 그는 동생을 고발하여 동생과 가문을 위태롭게 하는 대신, 동생이 지은 죄의 책임을 지고 에본느를 지키기로 했다. 잘못된 선택임을 알면서도 그리했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던 탓이다.
베르덴은 오래 전 들은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에본느의 기사가 되었다.
그의 심지가 굳기는 하지만, 후작위를 이을 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십대 청소년에게는 버거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 결국에는 버렸다.
기대도 했었다. 그가 에본느를 지키고 있으니, 에본느를 죽이려는 시도는 그만 멈출 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그러지 않더라.
‘방법’만 달라지더라…….
그 악독함에 지독하게 실망을 하면서도, 그는 동생을 고발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 가진 장남이었다.
그러다 이런 의문이 들었다.
방법은 어째서 달라졌나.
동생은 그가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음을 모를 텐데. 본디 하던 방법으로 시도를 계속하여도 베르덴은 아무 것도 모르리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이렇다 할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에본느에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그의 선에서 차단한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소수였다. 대부분은 베르덴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에본느가 처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에본느는 죽도록 앓다 일어나서는 심한 감기를 앓았다며 웃는 일도 있었고, 배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아파하다 서랍에서 어떤 약을 꺼내어 먹고 회복하는 일도 있었다.
그 모든 일들을 보면서도 베르덴은 차마, 네게 암살 시도가 있는 걸 안다고 말하지 못했다.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죄책감은 그녀의 기사가 될 때부터 있었으나, 이후로도 차츰 쌓여만 갈 수밖에.
내가 이러고도 너의 친구인가, 에브. 이건 옳지 못한 일인데. 그래도 끝끝내 동생이라고 포기를 못하고, 가문을 지키려 하고, 충격 받으실 것을 염려하여 아버지에게 알리지도 않고.
쥰의 모친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살해 시도가 멈추었다. 쥰의 모친이야 죽었기 때문에 의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동생은 쥰의 모친에게 묻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멈췄으리라고 짐작이 가능했다.
그는 그래도 에본느에게 서임을 부수어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녀의 기사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제 평생을 걸고 동생의 죄를 책임질 작정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밤, 헤르조가 에본느에게 깊이 상처 주는 것을 들었다. 에본느를 등지고 나온 헤르조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이 그리도 중요했나.”
“……너야말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 붙잡고 지랄 마라.”
동생과 에본느. 누굴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가 한 동생의 실체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을 때부터 갈등해온 것이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용의 비늘이다. 베르덴은 헤르조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결국 그 대화에서 그를 가장 뾰족하게 건드렸던 건, 소중함의 무게라는 논점이 아니었다. 헤르조가 이리 말했기 때문이다.
“설마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나, 아니면 네가 잊었으려나. 무얼 잊었어? 네가 쥰의 모친을 사랑한 것? 아니면, 그녀를 도와서 에브를 지속적으로 죽이려 했던 것?”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그는 눈을 찌푸렸다.
“무슨…….”
“아니지. 잊어도 잊으면 안 되지. 너는 잊으면 안 돼. 네가 에브를 지켜? 웃기지 마라. 내가 왜 계속 저 녀석을 데리고 다녔는데.”
에본느의 가출을 장려하며 그녀를 끌고 다닌 이유를 그제야 듣긴 들었는데, 여전히 영문을 몰라서 기가 막힐 수밖에. 쥰의 모친이 나이치고 상당히 아름답고,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여자이긴 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하는 짓을 알고도 마냥 호의적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베르덴은 일단 라이네와 에본느를 존중하여 그 여인을 정중하게 대하긴 했었지만, 조금도 친하지 않았다.
하여 이 막무가내인 비난은 다 무엇이며 이게 다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는데, 그의 입을 막은 건 헤르조가 한 걸음 더 다가와 그의 코앞에서 한 말.
“설마 이제 와서 에브를 연모한다는 둥 소름끼치는 소리는 하지 말고. 그렇다고 네 미쳤던 행각이 사라지나.”
그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앞뒤 문장이 함께 나오니 잔물결로 끝날 수 있었던 파급력이 파도와도 같았다.
헤르조가 비난하는 그 ‘미쳤던 행각’이라는 것은 아마 베르덴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베르덴에게는 죄가 있었다. 그는 손을 말아 주먹 쥐었다.
“내가 떨어져나가니 너도 이만 떨어져라.”
결국 그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가는 헤르조에게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직후 방으로 들어가 만난 에본느에게 여태 숨겨왔던 것을 일부 꺼내고 만 것은, 헤르조의 말에 칼을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째서 아리엘을 쳐냈는지 따지러 왔냐고 묻는 에본느가 몹시도 슬프게 느껴졌었다.
그는 동생들이 소중하여 그녀에게 죄를 짓고 있지만, 그런 일마저도 무작정 동생들을 감쌀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기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저 말고도 당신의 호위를 할 기사는 물론 수두룩했지요. 그러나 그들의 눈이 제 눈이 될 수는 없고, 그들이 보는 것을 동시에 제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제가 보는 제 앞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야망이 없다고 탓하셔도 좋습니다. 후작 작위보다는 아가씨가 중요했습니다. 헤르조와의 우정보다도 당신의 일이 중요했습니다.”
“헤르조와의 우정보다, 나와의 우정이, 중요했겠지.”
그러나 그녀가 짚어내는 그 단어에는 차마, 기꺼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우정. 우정. 양심이 있으면 그 단어에 대답하면 안 된다.
해서 그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포장했다. 우정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헤르조와 에본느 사이를 비교하는 것에 초점을 두도록. 헤르조와 우정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 그는 그렇게 포장하고 포장하여 가까스로 대답했다.
“예. 우정이.”
아마도 포장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그 다음 날, 그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못했다.
“아리엘이 아가씨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미워해요? 아니요. 아니요. 날 죽이고 싶을 거예요.”
이 악문 물음에 돌아온 대답이 그러했다. 베르덴은 턱을 떨고 말았다. 알고 있었어?
“그 착한 아리엘에게는 안 어울리지 않아요?”
알면서도 아리엘을 그렇게 알뜰살뜰히 좋아했던 거야?
에본느가 그에게 물었다.
“경. 날 믿어요?”
믿는다. 당연히 믿는다. 그러나 그 말에 대답하는 것은 동생들을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오래된 버릇으로 갈등하여 대답을 지체했고, 에본느는 그 사이 하나를 더 물었다.
“말해 봐요, 경. 경과 나의 우정은 진실된 것이었나요?”
“…….”
아.
베르덴은 그녀를 잡지 못했다. 대답치 못한다. 그는 그녀를 향한 시선마저도 죄스러워 돌려버렸다. 이는 쌓였던 죄책감의 말로.
에본느, 에브, 내가 너를, 감히 친구라고, 내가 먼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녀가 저를 내칠 것을 사전에 알았더라도, 과연 단번에 대답을 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쳐진다는 걸 통보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제 신념도 아니고, 제 맹세나 제 결심도 아니었다. 혹시나 그가 그녀의 곁을 떠나면,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여지를 주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서 매달렸다.
동생에게 그 어떠한 틈이라도 줄 수가 없다. 에본느를 지켜야 한다.
그는 그날 오후, 한시 바삐 서임을 부수기 위하여 외출에서 돌아온 에본느에게 간 게 아니었다. 동생을 설명하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마주친 그녀의 눈이.
그녀의, 식은땀 묻은 이마와. 그녀의 쓴웃음이. 그녀의 한숨이.
이미 그를 마음에서 버렸다는 것 같았다. 베르덴은 자신감을 잃었다.
……그래, 동생도 이제 잠잠할 것이다. 쥰의 모친처럼 뒤집어씌울 사람도 없고, 에본느는 아리엘이 황후가 되길 바란다며 아리엘의 사랑을 응원하지 않았는가. 한 동생이 에본느를 미워할 이유를 잃는다면 다른 동생도 그리할 것이다.
그는 잠잠히 정리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라이네로, 에본느의 곁으로 돌아가야 함을 알게 된 것은, 오드리나로 온 동생이 그녀에게 암살자를 보낸 것을 알았을 때였다.
기사가 아니라도 좋다. 집사라도 좋아. 그는 돌아가서 그녀를 지켜야 했다.
***
베르덴은 라이네 여공작의 머리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그 처형장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초점은 점점 사라지고, 흐려졌다.
에본느가 염려하였던, 혈색 없이 검은 빛 도는 얼굴에서는 오래 전부터 생기가 사라지기 시작했었다. 이제까지 버틴 게 기적일 정도로 엉망이 된 그의 육신. 그리고 그녀의 육신. 피 웅덩이와, 둘로 나뉜 에본느의 시신을 멍하게 담고 있던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고, 아,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야 어차피 갈 사람이고. 경은 계속 살아갈 사람이니까.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죄를 짓고서, 그녀보다 먼저 눈 감아 그녀의 속을 어지럽히는 죄마저 저지를 수가 없어서. 버텼다. 버티고, 버텼다. 그리고 이제 눈 감을 때가 온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작은 숨을 들이켰다. 귓가에 동생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환청이다. 눈이 감기며 고개도 떨어졌다. 에본느의 사망으로부터 겨우 삼 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사랑했던 친우의 처형에 충격을 받아 졸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 작품 후기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Q. 헤르조 외전으로 베르덴의 이미지가 무지하게 망가진 게 당황스러웠다면서요?
A. 네. 의도는 했었지만(...), 예상보다 더 개새X(...)가 되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헤르조를 주로 한, 헤르조의 시선으로 본 외전이라고 힌트를 드렸던 적이 있는데, 그게, 뭐랄까,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재업로드 후에는 그 편에 그 후기를 안 썼더라고요. 죄, 죄송합니다.
+보너스 팁:여기서 애틋하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는 장담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전 이 외전을 쓰면서도, 베르덴은 어쨌든 나쁨ㅠㅠ 미안 베르덴ㅠㅠ 미래도 미안ㅠㅠ 이러면서 썼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어른스러워지려고 노력할 수도 있겠지만. 책임져야 할 동생이 생기게 되어 어른스러워지려고 노력할 수도.
근데 어느 동생이 어느 동생일까요.ㅇㅂㅇbb
꿈에 나온 단어와 겹친다는 단어가 이번편에도 나왔습니당. 마지막 * 아래부분은 전에 나온 에브의 꿈과 연결됩니다!
베르덴 관련해서는 본문 중 계속 힌트 드렸습니다. 외전 전편인 지난편 후기에서도 힌트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제겐 아무 죄도 없...(끌려감)
투다다다다 쓴 초고라 진짜 엉망입니다. 아침에 수정하겠습니다.
자유연재입니다:D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