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41화 (41/157)

00041 CHAPTER 4. 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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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에게 위로를 받고 완전히 귀가한 나는 곧바로 공작의 집무실로 호출되었다.

무슨 일인지 당연히 추측이 가능했다. 발리앙으로부터의 서신. 잠시 외출한 사이 그새 다른 일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공작은 현관 앞에서 나를 맞이했을 것이다. 보통 그 ‘다른 일’이라는 건 내가 친 사고이기 때문에.

하여 시종이 나를 부르러 오자,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입실한 후에, 공작은 읽고 있던 서류 같은 것을 계속 읽으며 나를 세워두었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니까, 저 행동은, 용건보다는 서류가 더 중요하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 서신을 누가 보냈든지 간에 공작의 혈압을 올린 것 같지는 않았다.

좋은 일이다.

이를 보이고 싱글싱글 웃으며 공작을 보고 있으니, 내 시선과 표정이 여러모로 부담스러웠을 게 틀림없다. 공작은 눈을 들어 힐끔 나를 보고 다시 서류를 보았다가, 곧바로 나를 다시 보았다. 방금 본 게 무엇이냐는 표정이다. 혹은, 방금 본 게 현실이냐는.

너무하시네. 그래도 여식의 얼굴인데.

공작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얼굴 근육에 이상이라도 생겼느냐.”

“…….”

……일타이피. 원펀치 쓰리강냉이. 뭐 그런 건가. 내 얼굴을 향한 공격으로 내 마음까지 공격당했어. 간만의 상처다. 가장 최근에 공작이 나를 뒷목 잡게 한 건 장부사건이었는데.

나도 질 수 없었기에 두 손을 턱 아래에 대었다.

“온힘을 다해 꽃같이 웃고 있는 얼굴입니다.”

“…….”

그 문장에 태클 걸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겠지만, 일단 에본느의 부친이긴 한 모양이다. 그는 말없이 나를 보다가 다시 업무로 눈을 돌렸다. 택한 게 현실 도피라는 게 재미있긴 했다. 처음에만.

상대할 가치가 없다며 현실 도피를 할 정도라는 것에 더 상처를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뒤늦게 들더라. 그러나, 어쨌든, 나도 여기서 더 미친 짓을 할 꼬리를 잡아내지 못했다. 한숨을 삼키며 손을 내렸다. 이제 내 생활이 되고 만 발랄함은 때때로 지독하게 내 머릿속을 지치게 만들곤 하였다.

그래도 나는 계속 싱글벙글 웃었다.

공작은 내용을 모두 읽었는지, 종이 여백에 무언가를 사각사각 써 내려가다 입을 열었다.

“에본느.”

“예.”

“내일 발리앙 저택에 가면.”

나는 턱을 당겼다. 점 하나를 찍은 것을 마지막으로 펜이 우뚝 멈추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공작은 마침내 나를 똑바로 보았다.

“후작이 너를 부를 것이다.”

아.

어깨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것도 여태 모르고 있다가, 그 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내가 실제로 입을 벌려 그런 소리를 냈다는 것마저도 뒤늦게. 나는 허탈한 웃음을 실실 웃었다.

그렇지. 일개 영애가 공작에게 서신을 보냈을 리가 없지. 역시. 알면서도 꼭 불안해해야 직성이 풀린다니까.

발리앙 후작이 어째서 나를 부르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내가 십대일 때 이미 베르덴 일로 계약을 나누기도 하였다. 후작으로 오래 있어 정치에 능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제 와서 겁낼 건 없다. 애초 친구들의 부친이기도 하여 다른 가주들보다야 자주 만나 겪은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이해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은 말을 이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결정하든 나는 허락한다. 내게 의견을 묻거나 할 필요가 없으니 네가 알아서 결정하여라.”

나와 후작이 무엇에 대하여 대화를 나눌지 아는 눈치였다. 나는 당연히 물었다. 물론, 공작이 가르쳐 줄 거라는 기대는 손톱만큼만 가지고 있었다.

“용건이 무어라 합니까?”

“가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다시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줄 알았다. 미리 언질을 줄 거였으면 ‘의견을 물을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겠지. 기대가 거의 없었으니 실망도 크지 않았다.

가문의 명운이 달린다는 둥 큰 문제였다면 나보다는 공작과 의론을 했을 테고, 혹은 공작이 내게 미리 이리저리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가서 부딪히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참 많이 생기는 자리가 한 가문의 가주의 자리이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오르고자 결정을 하였고.

내 깜냥이 공작될 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했던 이유 중 많은 지분을 차지한 게 내 그 ‘취향’과 ‘성격’ 등등이었다. 나는 무거운 것을 지는 것을 상당히 버거워하니까. 그러나 이제는 내색해선 안 되는 마음이다.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 웃을 밖에.

이 방에 들어서기 전과 비슷한 무게의 마음이다. 공작의 용건은 그럭저럭 끝난 것 같아서 그럼 이제 방에 돌아가 봐도 되겠느냐 허락을 받고자 하는데, 공작이 나에 앞섰다.

“에본느.”

“예.”

자연스럽게 응답하자, 공작은 책상 위, 구석에 있던 함을 한 손으로 끌어와 내 쪽으로 밀었다. 일견 고풍스러운 장식과 음각, 그리고 자물쇠다. 그것이 내가 오늘 받은 홀을 담을 함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성큼 다가갔다. 공작은 내가 박스의 양 옆에 두 손, 그것도 맨손을 대고 들어 올리는 것을 지켜보다, 내가 다시 책상에서 물러나자 다시 입을 열었다.

차분한 음성이었다.

“내가 너를 보호해줄 수 있는 날이 그리 길지 않다. 네 결정이 옳지 않음을 짚어줄 수 있는 날도 그렇다.”

아주, 차분한.

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나올 말은 아니다. 듣기에 유쾌한 내용도 아니고. 마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아는 사람이 하는 말 같지 않나. 불안하게. 의식적으로 눈웃음을 짓고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도대체 너 몇 살 될 때까지 가출은 옳지 않다고 짚어줘야 하느냐.”

아. 아. 그런 거였나. 와, 심장이 명치까지 푹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 아직도 명치에서 뛰고 있었다. 다시 올라가라. 올라가라. 훅, 심호흡 하듯 한숨을 쉬고 씩 웃었다.

“아. 그런 말씀이시라면. 음. 굳이 짚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여섯 살 즈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아는 의미가 없구나. 차라리 모른다고 했으면 염려가 덜 되었을 것이다.”

“염려요?”

“내 정신과 혈압을 위한.”

“…….”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나 어렸을 때에 비해 공작이 참 많이……, 음. 하여튼 그, 뭐, 그런. 그런 성격으로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웃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함을 들고 있는 지금은 그 정도 예의는 갖추어야 했다. 이후 공작은 다른 말 없이 내 퇴실을 허락했다.

다음 날, 아리엘의 초청에 응하여 발리앙 저택에 도착했을 때 놀란 것은, 나를 맞이한 사람이 아리엘이 아니라 후작의 보좌였다는 점이다.

이래서야 아리엘의 초청을 후작이 겸사겸사 이용했다는 생각이 불쑥 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초청이 바깥에 알려질 경우 아리엘은 예의가 부족하다고 욕을 먹을 텐데. 작위를 가진 사람들끼리의 만남 약속은 설령 즉석에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괜찮기 때문에, 차라리 그가 나를 초청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나와 대화할 것을 예고하는 게 아니라.

욕을 따님이 먹게 하는 이 술수가 놀랍다. 후작이 금지옥엽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내가 겪어 알고, 써서 아는 덕에 충격이 더했다. 얼떨떨해 하며 따라간 곳이, 후작의 집무실로도 부족해서 집무실 안의 작은 밀실인 건 그렇다 치고.

“…….”

나는 내 앞에 놓인 무지막지하게 길쭉하고 큰 잔을 망연하게 내려다보았다.

이거 뭐지. 리필해 줄 사람이 없으니 애초에 충분히 채워놓고 시작하겠다는 건가. 콜라 한 병을 원샷할 수 있는 사람도 이 잔 안의 찻물은 원샷하지 못할 것이다. 먹다 배가 터질 지도 몰라.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평화로운 티타임에 초대받아, 만남의 순서가 예상치 못하게 뒤바뀐 것 치고는 지금 후작이 만들고 있는 분위기도 상당했다. 예의도 품격도 없는 이 자리, 방광을 위하여 가까운 화장실을 미리 알아둬야 할 것 같은 이 자리, 대신 어떤 기밀 요원이 된 것 같다는 흐뭇함만 느낄 수 있는 이 자리로 곧바로 안내된 이유를 이 후작은 라이네 공작께 미리 서신으로 전해두었다……고.

우리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후부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작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넉넉했다.

덕분에 내가 확신에 가깝게 내린 결론 몇 개가 단 수 분 만에 나올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후작은 공작과 직접 만날 겨를도 없이 급했다는 것이나. 또, 음, 공작을 거쳤음에도 나와 굳이 대화를 해야 하는 용건이라면 아마 내 후작위에 관한 것이리라는 것이나. 공작을 거쳐야 함은 가문끼리 논할 점이 있다는 건데, 공작이 내게 결정을 내릴 때 당신께 여쭤볼 필요가 없다 말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아마…….

아, 내가 내린 결론이지만 참 마음에 안 든다. 허공을 보던 눈을 약간 찌푸리고 말았다. 발리앙 후작이 내게 말을 건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제는 같은 후작이군.”

“…….”

정신을 차렸다. 나는 다른 대답 없이 조용히 미소했다.

그러자 후작은 예전과는 다르게 족히 나를 존칭하며 축하를 전했다.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나는 적당히 예를 취해 답했다. 이제는 같은 작위이긴 하지만, 그는 나보다 먼저 승작한 후작이다. 내가 공작이 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지겠으나 지금은 그를 존중하는 게 암묵적인 예법이었다.

내가 싱글싱글 웃고 있자, 후작이 옅게 웃음을 흘렸다.

“앞으로 할 일이 많겠소, 그래.”

“그렇군요.”

그렇게 짧게 대꾸하고 그만 두었다. 앞으로 많이 도와 달라, 가르쳐 주라 운운하기에는 나는 결국 공작될 사람인데다 발리앙가에 비할 수 없는 라이네가의 사람이었다. 매일 천방지축으로 뛰놀아도 바깥에서 라이네의 이름을 다른 가문 밑에 두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후작은 내 대답을 마지막으로 또 입을 다물었다. 못 본 새 색이 상당히 검어진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잠시 기다리다, 웃으며 말을 꺼냈다. 마냥 기다리며 그를 배려하기만 하는 것도 내가 라이네 소공녀일 때면 모를까, 후작일 때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기다려주었으면 되었다.

“발리앙 후. 실례지만 저는 제가 따님께 초대된 것이라 알고 있었습니다.”

“아, 물론이오. 이 자리가 파하면 아리엘에게 가시면 되오.”

어쨌든 티타임은 가지겠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공작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일이 없는 것처럼 굴고 있지만, 후작은 내가 미리 무언가를 들었을 것을 알 터. 서로 모르는 척을 하고 있는 건 서로 알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알았다.

후작은 내가 돌려 말한 그의 무례와 내 불쾌함을 알아차렸는지, 자꾸 생각에 잠기려 드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 보였는데 도통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거, 정말 내 추측이 맞아 들어갈 것 같아서 겁난다. 용건이 정말 내 짐작대로라면, 후작이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게 마땅하긴 했다. 이거야 원. 내가 먼저 말을 꺼내서 무덤을 파고 들어가고 싶진 않은데. 이래서야 나도 곤란하고 후작도 곤란하다.

다른 가문을 정식으로 방문하면서 처음으로 입은 바지 정장의 허벅지 부근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나는 다른 생각에 빠지기 직전까지 들어섰고, 그래서 직구로 온 후작의 말을 놓칠 뻔 했다.

“아직 보좌를 정하지 않았다면 베르덴을. 보좌로 들이지 않겠소?”

예상한 용건이 아니었다면, 정말, 멍하게 다시 물을 뻔. 했다.

그러나 예상했다 하여 놀랍지 않은 건 아니더라. 생각지도 못한 충격이 왔다. 뒤통수 동그란 부분의 핏줄이 투둑 끊어지는 것 같은 짧은 고통이 와서, 턱을 들어야 했다. 머리가 얼얼하다. 나는 그대로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후작의 머리 위 허공을 보며 말없이 숨 쉬었다.

후작의 시선은 물음 직후부터 나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건 실은 정신 나간 용건이다. 베르덴은 발리앙가의 후계자인걸. 나는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벽의 어느 한 점을 응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후작에게로 눈길을 되돌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후작위는 어찌 하려 하십니까.”

그는 내 태도가 의외가 아니었는지 덤덤하게 대답했다.

“베르덴에게 물려줄 거요. 그러니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부탁하는 거외다. 나는 그 아이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 아이라 함은.”

“베르덴을.”

아리엘을 누군가로부터 보호하는 게 아니라 베르덴을.

……아, 좋아. 이것은 의외다.

나는 오른 눈을 찌푸리며 살짝 웃었다. 보호대상이 아리엘이 아닌 것도 의외지만, 베르덴을 누구에게서 보호한다는 것인가. 내 소리 없는 웃음은 목소리 담은 질문을 대신 하기에 충분했다.

후작은 깊이 숨을 내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꿈에서 나온 단어 하나 나왔습니다. 보통 말없이 넣던 힌트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자세하게는 말씀 드리지 않을 겁니다. '수천 단어 속에서 겹치는 한 단어를 찾아라!'(=못 찾을 것이다. 그래서 말했다.(끌려감))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꿈에서 나온 누구의 태도 관련해서도 이번편에... 아, 더는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원래 글이란 건 뒷목을 잡게 하고 잡는 일의 반복이 아닙니까.(아니다)

이번편에서 발리앙편을 끝내고 다음편에 외전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또 나뉘었어요.......(아련) 어쨌든 언제 끝날까 깜깜하던 이번 챕터도 끝이 보이긴 해서 기쁩니다. 그것에 어제의 삼연참이 한몫을 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복잡미묘하기도 하고요. 완결까지 타다다다다다닥 연참하고 싶다. 무아지경으로 써서 삼사십연참을 하고 싶다.

헛. 그러고 보니 후기에서 연참이란 단어는 봉인하기로 했는데!

초고입니다. 수정은 내일 하겠습니다!

자유연재입니다:D

감사합니다. 코멘트들이 모두 사랑스럽고 감사한 내용뿐이라 요 며칠 두근두근거리고 있습니다. 좋아함을 받고 있다는 게 이렇게 산뜻하고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들떠서 후기가 길어졌네요. 죄송합니다. 다음편 후기부턴 짧게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기분 좋게 마무리하시고,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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