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0 CHAPTER 4. 꿈에서 =========================
……그래. 그런가. 목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거야 원. 쥰의 모친 때와 다를 게 없잖아.
그럼 경우의 수가 이제는…….
남자는 내게서 바라던 반응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펴더니 설명을 이었다.
“그러나 그놈의 뒤를 밟는 게 우리만은 아니었어. 우리가 먼저 그 추적자를 인식했고, 그 추적자 쪽은 좀 늦게 우리를 인식했어. 실력은 좋은 것 같았지만, 이쪽 생리를 잘 몰랐던 모양이지.”
“해서.”
“그 추적자는 놓쳤어.”
“음흠. 해서.”
노래하는 것처럼 콧소리를 내며 다음 말을 종용하자, 남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음……. 말할 건 더 없는데.”
“날 죽이지도 못했으면서 돈은 얼마나 받았고.”
“아, 그게 남았군. 그래서 계속 죽이려고 갈 거라고 하고는 싶은데, 어제 다시 온 거 있지. 다시 지시할 때까지는 시도를 멈추라고. 하여간. 내가 언니한테 그 독에 내성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걸 깜박했지 뭐야. 그래도 고객님이 화내지 않을 만큼은 일해서 다행이지.”
“아하.”
흥미로운 지시인데, 그거. 지금 무언가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내가 여행하다 죽었다는 것으로 만들 조건이 없다는 것. 이미 독침이 드러났으니 그걸 써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고.
그 누군가는 내가 살해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길 원한다.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추측이다. 팔걸이를 검지로 톡, 톡, 톡, 톡, 가볍게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디 보자. 더 물을 게 있나. 일단……, 어제부터 작정해 왔던 질문들은 모두 대답을 받은 것 같, 아, 두 가지가 남았다.
“언제 의뢰하러 왔지?”
“흠. 6월이니까, 사 개월 전?”
“며칠.”
“그건 모르고.”
내가 떠난 게 5월의 셋째 주. 한 달하고 일주일이 범위다. 나쁘지 않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것을 마지막으로 물었다.
“날 쫓았던 자들은 귀환했나?”
“언니를 쫓았던 놈들이라면 귀환했어. 침들도 모두 가져갔다면서. 그 녀석들이 내성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죽었겠지.”
무심하게 대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그다지 날 배웅하거나 존중을 보일 생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아서 내 움직임에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는 걸 힐끔 보고, 완전히 몸을 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물으러 온 걸 그자에게, 그자가 누구든, 말하지 마라.”
“그건 상황 봐서.”
마지막으로 여유를 보여보겠다는 건가. 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말하지 마라.”
“뭐어. 그때 가서 판단한다니까?”
“말하지 마라.”
“……아, 좋아. 그럼 다음에 허가 떨어지면 보자. 우린 언제 언니를 죽일 수 있을까?”
나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내가 끝장나기 전에 너희가 끝장이 나겠지. 내가 후작이 되었다는 것에서 아무 것도 짐작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미로 골목을 빠져나온 후 잠시 멈춰 서서 길의 방향을 고민했다. 저택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 골목의 세력은 세 개라, 방금 만나고 온 자들이 나를 미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두 개 세력은 경계해야 한다. 미로 골목을 다녀올 때마다 겪는 것이기에 새삼 곤란해 할 것은 아니나, 한 시 바삐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새삼.”
나는 비식 웃고 말았다.
고민을 멈추고 여인의 집에는 언제나처럼 내가 갔다. 그리고 일단 아가씨와 가족은 안전한 곳으로 옮기게 하였으나, 그들을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도록 도우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이번에야말로 아가씨에게 도움을 약속하고 라이네 저택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지 못한 반가운 손님을 맞았다.
“션경?”
설마 했는데. 뒤돌아본 사람은 과연 션이었다.
세상에. 나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소녀를 향해 뛰어갔다. 안쪽으로 바람이 들어와 호박처럼 붕 뜬 로브는, 내가 션의 앞에 서자 푹 가라앉았다.
서늘한 인상의 여기사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
“음, 응. 좀 그렇지요? 션경은 여전히 멋지네!”
그녀의 양 팔을 탁탁 두드리며 싱글벙글 웃었다. 예뻐. 예뻐. 그 조그맣고 애교 많던 아이가 이렇게 크게 변화한 건 볼 때마다 신기하지만.
션은 내 호들갑에 입을 다물고 작게 숨을 들이켜더니 길게 뻗은 눈을 깜박였다.
“언니가 오드리나에 돌아와 있을 줄은 몰랐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다쳤다면서.”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짚이는 게 있었다. 션은 알드리히의 기사다.
“비밀인데. 전하께 들었어요?”
“병문안 어쩌고 하셨으니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겠지.”
병문안 어쩌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도저히 모시는 분, 그것도 황태자에게 할 언사는 아니지만 션이 워낙에 쿨해야지. 굳이 비교하자면 헤르조보다는 시드니와 비슷하지만, 시드니와도 약간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나저나 지금 근무시간 아닌가.
그리고 왜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일단, 경, 들어가요. 왜 나와 있어요. 슬슬 쌀쌀해지는데. 춥진 않았어요?”
“아니, 들어가서, 언니가 없다는 걸 듣고 나와 있던 거야. 안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어. 언니와 이야기만 하고 돌아갈래.”
“이런,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상관없었어. 오늘 휴가를 받았거든.”
나는 낮게 웃었다. 귀여워라.
“아니, 그게 아니라. 경이 춥잖아요. 힘들고.”
“괜찮아. 훈련이야. 그리고 말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언니는 내게 아무 연락도 주지 않았어.”
“……음.”
“전하께서 여기 오지 않으셨다면 나도 몰랐겠지. 아니면 내게 언질해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션의, 인상은 서늘하지만 어여쁜 얼굴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내게 꽃을 주고 방실방실 웃던 작은 소녀. 이제는 잘 웃지 않지만, 웃지 않는 얼굴로 해 주는 걱정이라도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장갑 낀 손을 잡고 달랬다.
“연락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무슨 일. 있었어?”
“경.”
“전하께 듣고 첫째 오라버니에게 물어봤는데, 오라버니는, 언니도 알잖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려 해. 하지만 내가 생각키로는 언니 일을 아는 눈치였어.”
알드리히에게 그 부분은 들어 안다.
시드니는 내 일을 알지만 오지 않았다. 애당초 약조는 산을 내려갈 때 안전하게 내려가자는 것이었고, 나는 평지에서 다쳤으니 약조를 지켰다. 그가 오지 않는 것은 서운치 않았다. 그는 ‘만나면 안부를 묻는’ 사이지, ‘안부를 묻기 위해 만나러 오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를 친하게 여기고 있으니, 나를 멀리하려는 그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다.
나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대답하지 못할 것을 물으니, 대답을 못한다. 웃기만 계속하였다.
그리고 션은 그런 나를 보며 기다리다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분명 십대 소녀이고, 금지옥엽 막내이지만, 여느 성인에 버금갈 정도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소녀가 내게 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구치 않을 것을 직감했다.
션이 결국 말을 돌렸다.
“……언니. 저택에 들어갔을 때 집사가 언니를 호칭하는 걸 들었어. 각하라고. 이제 후작 각하인 거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이제 다시 사교계에 나올 테고.”
“그렇지요.”
션은 내게 잡힌 손을 구부려 내 손가락 끝을 쥐었다. 어린 아이가 어설프게 손가락을 쥔 것처럼 끄트머리만 살짝. 나는 그것을 힐끔 보고 눈을 고쳐 뜨며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웃지 않았을 뿐더러, 몹시도 진지하게 내게 제 심정을 전해왔다.
“나는 언니가 다쳐서 정말 슬프고, 화가 나. 그걸 내게 말하지 않은 것도 화가 나고.”
“…….”
내 입이 열려 뻐끔거리다 닫혔다.
나는, 종종, 무어라 해야 하나, 그, 진심 어린 목소리로 전해오는 무언가에 말문이 막히곤 한다. 벅차고, 마음이 격동하고, 심할 때는 코가 매워지기까지 해. 입 꼬리가 살짝 내려가는데, 션은 나를 열심히 담고 있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잔잔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말하지 않을게. 언니도 쉬어야 하고.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
“언니. 지금 언니에 대한 인식이 마냥 좋은 건 아니야. 쥰의 생일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
그렇잖아도 내일 아리엘의 티타임을 기점으로 하여 슬슬 분위기를 알아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역시 그렇구나.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션의 미간이 좁아졌다.
“언니의 친구를 나쁘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필르 발리앙은……, 교묘해.”
션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듯 했으나, 결국 고른 말이 이랬다. 나는 약간 놀라서 눈을 빠르게 깜박이다 느리게 반문했다.
“……교묘?”
“착하다고 들어와서 그랬을까. 글쎄, 기대했던 만큼은 절대 아니네.”
나도 그렇고, 헤르조도 아리엘을 칭찬해왔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리엘이 다섯 달 전부터 오드리나에 반영구적으로 머무르게 되었으나, 그 전에는 아주 가끔, 짧은 여행 식으로 하여 오드리나에 왔을 뿐이고, 하여 션은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나와 헤르조의 말로 상상만 해 왔을 뿐.
나는 션의 손을 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나이에 맞지 않다, 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분하고 무뚝뚝한 션에게서 이런 평가가 나올 정도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소녀를 걱정스럽게 응시하는데, 나보다 키가 월등하게 큰 여기사는 나를 응시하다가 나를 안아왔다. 내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풀자, 그 손까지도 내게 둘러 더 꼭 안더라. 나는 행복한 탄성을 장난스럽게 질렀다.
“좋아라.”
나도 좋아라 션의 등을 안았다. 나를 안고 잠간 말이 없던 그녀는 조곤조곤 물어왔다.
“첫째 오라버니는 언니를 보러 안 왔지?”
“네.”
“그럼 오라버니가 오라버니 대신 나를 보냈다고 생각해 줘. 오라버니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냥, 응. 나도 언니를 만났고, 이 자리에서 첫째 오라버니도 언니를 만난 거야. 알았지?”
나는 입을 다물고 코로 후후 웃었다. 이런.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포르타경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션경은 오라버니를 많이 사랑하네요. 우애가 보기 좋아요.”
“언니도 쥰을 사랑하잖아. 그리고 나도 사랑하고.”
무뚝뚝하게 덧붙인 말이 새침하게 들렸다. 이리 귀여워서 어쩌나. 나보다 크지만 내겐 항상 작은 소녀일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수긍했다.
“맞아요. 나는 경도 사랑해요. 그 조그맣고 앙증맞던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컸지?”
“하지만 이건 오라버니를 나쁘게 생각하는 게 싫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라버니와 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한 거야.”
“음?”
“오라버니, 돌아온 날 밤부터 많이 날카로워져 있어. 아닌 척 하지만 내가 오라버니를 한두 번 겪나. 생각해 봤는데 언니가 걱정되어서 그런 것 같아. 하지만 만나러 오지는 않고. 난 둘 사이가 도대체 어떤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서로 밀어내는 사이지. 이 모든 살뜰한 설명을 찬바람 쌩쌩 부는 목소리로 하는 션에게 더 주의가 쏠렸지만, 일순 자각하지 못한 쓴웃음 정도는 나왔다. 어떤 의미로는 아리엘만큼 이상할 정도로 아프고 신경 쓰이는 손가락일까, 그는.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한 감정이 내 속에 너무 많다.
그러나 여기서 숙고할 일은 아니다. 나는 션의 품에서 턱을 들며 말을 돌렸다.
“포르타 영식은 잘 지내요?”
“둘째 오라버니는 오드리나에 없어.”
“……또 나갔어요?”
“그 ‘또’가 언제를 기점으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드리나 근처에 괴물이 왔던 날을 혹시 기억해?”
기억한다. 그날 성벽 위에서 마법을 날려 헤르조를 구했었는…데……, 설마.
“혹시 그날 나가서 아직도 안 들어왔어요?”
“응. 그리고 그 바보 오라버니는 걱정하지 마. 언니한테 잘못을 저질러서 절교한 거잖아.”
……헤르조……. 취급 심하다…….
그러고 보니 여동생에게 징징거렸다고 알드리히가 빈정거린 적이 있었지. 헤르조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그를 생각하느라 션의 등을 두드리는 손이 느려졌다. 그런데 반비례한 것처럼, 나를 안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가더라.
그리고 소녀는 내 머리에 대고 무뚝뚝하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언니 편이야. 그 느낌 안 좋은 여자는 내가 물리쳐줄게.”
‘우리.’ 나는 그 말을 아마도 정확히 이해했으나, 입을 열어 무어라 대꾸하지는 않았다. 대신 입가가 시릴 정도로 미소를 유지하고 그녀를 토닥였다.
============================ 작품 후기 ============================
션(19세)이 에브(25세)보다 10cm 정도 큽니다.
실은 베르덴경이나 션경이라 부르는 건 친숙함을 전제로 한 호칭이었는데, 쓰다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전부터 쭉-, 전부 다 첫째 이름에 +경 붙이고 있어.......(주먹울음) 그래서 수 주 전에 한 번 대대적으로 수정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세계의 예법대로라면, 베르덴경이 아니라 발리앙경이 맞고, 쥰경이 아니라 라이네경이 맞고, 션경이 아니라 포르타경이 맞습니다. 시드니도 포르타경이고요.
첫째 이름에 경을 붙이는 건, 어디까지나 친한 사람에게 가능합니다!.....ㅇ<-<
션은 헤르조 외전에서 인형 가지고 방실거리던 그 아가가 맞습니다. 이렇게 컸어요.
오늘 삼연참 했어요. 제가 미쳤나 봅니다. 내일 어쩔 거야.......ㅇ<-< 오늘 연참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데, 39편 후기에 연참이라는 단어를 쓰자마자 왜인지 버닝. 앞으로 후기에 연참 단어는 쓰지 않을 겁니다. 봉인해야겠습니다.
초고입니다. 일단의 가벼운 수정은 내일하겠습니다. 지금은 지쳤쪄요(앙탈).
자유연재입니다:D 감사합니다. 내일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