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CHAPTER 4. 꿈에서 =========================
나는 목 뒤를 매만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네 애인 되고 싶어서 안달 난 여기 여자들이 있을 텐데. 왜 애꿎은 바깥 여자들을 끌고 들어오나.”
“에이. 정복감이라는 게 있잖아?”
“…….”
구역질이 났다.
나는 그를 보며 대놓고 가면의 입 부분을 가렸다. 쓰레기. 뾰족한 소름도 돋아 기분이 더 나빠졌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썼지만 쓰지 말았어야 할 인간 중 하나였다. 미로 골목과 질 나쁜 범죄자들은 하지도 말았어야 할 설정이다. 여기 올 때마다 매번 느끼고 있었다.
이런 자들을 사용하여 에본느는 아리엘을 해하려 했어.
웩.
기어코 눈시울을 붉히며 구역질을 했다. 남자가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비위 참 약하지, 언니.”
“누, 누구 때, 우웨엑.”
양치하다 혀 잘못 건드린 것처럼 몇 번이고 구역질을 해야 했다. 아, 으. 명치 위의 가슴께가 무엇으로 찍힌 것처럼 지독하게 아팠다. 심지어 아직도 후각이 마비되지 않았던 건지 골목의 역한 냄새가 새삼 맡아졌다.
내 뒤에 있는 남자가 가면의 줄을 풀어내려도 가면이 떨어지지 않도록 양 뺨 부분을 받치는 것은 물론 잊지 않았다. 그 정도의 경계다. 나는 어느 정도 역한 기가 가시자마자 남자의 손을 밀어냈다.
서로를 보며 얼마든지 날 세운 농담 따먹기도 할 수 있고 속 감춘 웃을 수도 있지만, 몸에 손대는 것만큼은 그리 깊은 인내를 발휘할 수 없었다. 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몸을 조이고 있다. 더 경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트레스에 내가 잡아먹힐 거다.
“좀 괜찮나?”
“…….”
손을 휘휘 저었다. 걱정하는 척에 소름이 돋는다는 뜻이었다. 남자가 낄낄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럼. 왜 왔는데? 재미 보려는 참에. 이거 봐. 나 급하거든.”
그가 손가락으로 하체 쪽을 가리키자 나는 의식적으로 눈을 더 들었다. 이런 미친놈이. 차라리 용병들의 음담패설은 들어줄 만 하지만 이런 놈들의 음담패설은, 설령 내용이 같을 지라도 무척이나 역겹게 느껴졌다.
실상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음담으로 끝나지 않는다.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사람이 필요해.”
“사람?”
여자가 옷을 다 입은 것 같았다. 그에게서 몸을 틀어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춤거리던 여자는 내 손을 잡았다. 떨림은 좀 전보다 나아졌다.
데려다 주고 오겠다고 눈짓하자, 남자가 제 어깨의 뒤를 엄지로 가리켰다. 거점으로 오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기 어린 회색으로 가득한 곳에서 우리는 느린 걸음으로 멀어졌다. 긴장이 풀린 아가씨가 빠르게 걷지 못했다. 남자와 친하게 보였을 나를 이만큼 믿는 게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을 때, 입을 열었다.
“조심해요.”
“예, 예? 예?”
“진정해요. 내 말은, 아마 아무나 잡아온 게 아닐 테니까. 당신은 재수 없게 걸린 게 아니라 표적이었을 확률이 높아요. 지금은 내가 구해주었지만 또 잡혀올 지도 모릅니다.”
“그, 그, 그럼, 어떻게, 어떻게 해야…….”
이 아가씨를 ‘내가’ 지금 당장 구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러나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엾다고 내 이름을 걸고 구제해주기 시작했다가는 내가 곤란해질 미래만이 남는다. 가엾지만, 안쓰럽지만,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후에 이 아가씨의 입이 어떤 식으로 열릴지 모르니 지금 안심시켜 줄 수도 없고.
“거기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으, 으. 어떡해. 어떡해…….”
울먹이는 아가씨의 희게 질린 얼굴을 보았다.
곱게 돌아가 있으면, 미로 골목에서의 용건이 끝난 후 이 아가씨의 신병을 확보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라이네 소공녀……, 라이네 후작, 혹은 라이네 가문과 나를 연결시킬 수 없도록 조심해야겠으나, 못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껏 몇 번이고 해왔는걸.
나는 눈을 찌푸리고 미소하며 여자에게 살살 말했다.
“이름. 사는 곳. 말해줘요.”
눈물 젖은 눈이 나를 보며 경련했다. 어차피 가면을 써서 안심시키기 위한 웃음이 보이지 않아 꺼림칙할 수도 있으나, 살고 싶으면 말하는 편이 낫다. 나는 그녀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말해 봐요.”
“흐. 흐으. 저, 저는.”
여자는 떨며 더듬더듬 이름과, 거주지를 설명했다.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아는 곳이다.
그리고 여자를 달래며 생각한 것은 나의 다짐이다. 공작에게 짐을 지게 할 수는 없으니, 내가 공작이 되면 미로 골목은 반드시 없애려 한다 하는. 미로 골목을 가만히 둘 이유가 실은 여태까지도 없었으나, 이번 암살 건으로 캐내는 것만 끝나면, 미로 골목을 가만 둘 이유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저 범죄자들을 이용해야 하는 귀족들의 비호가 있어 물론 쉽지는 않다. 고발했던 것들이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 것과, 이 골목이 생긴 지만 벌써 삼십 년이 넘었는데 여태 멀쩡할 수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보통 저들을 이용하는 귀족들은 암살 같은 것들을 명령하겠지마는. 어쨌든 나도 지금 저들을 이용하려 하고 있으니 나 역시 같은 쓰레기일지 모르겠다.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쓴웃음을 지었다.
“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나를 쓰레기라 하며 무언가를 정당화하려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알고도 있었고, 스스로 비웃고도 있었고, 모든 것을 털고 떠나지 않고서야 돌이키지 못할 관계에 몸담은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뿐이다.
입구라 할 수 있는 곳이 보이자 여자의 손을 놓았다.
“잘 가요. 몸조심하고.”
여자는 아무 인사도 없이 뛰어갔다.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지켜보았다. 일단의 안전. 벅차서 다른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라면 그걸로 좋았다. 지금 당장 저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은 나는 감사를 요구할 자격도 없었다. 그녀를 이해한다.
단지, 부디, 잠시만 얌전히 집에 있어주길.
나는 뒤로 돌았다.
그들이 아지트라 불리는 2층 건물까지는 금방이었다. 내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1층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나를 맞이했다.
“언니, 왔네!”
“오랜만!”
남자고 여자고 성별에 관계없이 언니언니 하는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흐렸다. 약에 취했다는 게 아니라, 죄를 짓다보면 명정한 눈빛도 끝내는 흐려지고 말더라. 살기가 있었다. 그들이 내게 겉으로는 호의를 보이고 있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었다.
나와 저들은 항상 그랬다.
나는 흐리게 미소했다.
“사람. 필요해.”
“돈만 준다면야. 어떤?”
“독침을 쓸 수 있는.”
천천히 말했다.
그러자 그들의 표정이 변했다. 나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데, 그들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흥미롭겠지. 잘난 척 사람들을 구하고 있던 사람이 살인을 청부하려 하면.
중앙에 있던 남자가 턱을 조금 더 들었다. 저것이야말로 반응이다. 나는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도, 소리내어 코웃음을 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가면을 써서 얼마나 편리한지.
남자가 물었다.
“목표는?”
“그건 생각해보지. 일단 이야기 좀 해야겠는데.”
“…….”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던 남자가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더라.
“나는 내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거든. 무슨 이야기?”
아, 여기에 더 참아야 할 이유가 없군. 나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의 사람? 보호. 책임. 내가 다른 말없이 웃기만 하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농담은 그만하지. 너희는 나가봐.”
“대장?”
“나가. 난 저 언니를 내 밑에 깔고 싶거든.”
지랄을 하지. 그러나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이 무리의 리더인 그는 몹시 교활한 놈이지만, 동시에 내게 빚진 자다.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꾸물꾸물 흩어지는 자들을 기다렸다. 누군가는 2층으로 올라가고, 누군가는 집을 나갔다. 나는 특히 2층으로 올라가는 남자 둘의 꽁무니를 쫓았으나 제지는 하지 않았다. 올라가기로 했으면 올라가는 거다. 저들은 내 말은 듣지 않는다.
말을 조용히 하는 수밖에. 계단까지의 거리가 있고, 내가 볼 수 있는 계단까지만 올라가도 우리 대화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자가 내게 밀어주는 의자를 받아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남자는 스으, 잇새 사이로 숨을 들이켜더니 실실 웃기 시작했다.
“자, 말해 봐. 무슨 이야기?”
“…….”
“나한테 말해 봐. 전해줄 테니까.”
“…….”
“어서. 내가 그놈들을 소개해 주자마자 언니는 놈들을 죽일 거잖아.”
“…….”
“언니는 절대 언니를 죽이려 한 놈들에게 자비를 베푼 적이 없어. 항상 죽였지.”
하고 싶은 말이 나를 살인자로 비난하고 싶은 거라면, 나는 내가 한 짓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고 있으니 그럴 필요 없다. 그리고 공작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시신들을 처리해왔던 것을 나는 얼마나 ‘익숙한 것처럼’ 반복해 왔던가. 공작이 쥰의 모친이 한 일을 알게 된 건 여인의 말년의 일이니까.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흠, 한숨을 쉬었다.
내내 가만히 있더니 이제 와서 말을 꺼내는 이유는, 독침과 내가 관련이 있음을 이 남자는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암살 의뢰를 한 게 확실하네. 여기가 아니라면 전국을 어찌 뒤지나 했더니. 이제 누가 했는지가 관건인데.
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흥미를 가장하여 한 가지 덧붙였다.
“너를 제외하고.”
“……그렇지. 뭐.”
남자는 나를 죽일 것처럼 날카롭게 눈빛을 세우며 대답했다. 윌리엄의 용병단에서 보았던 자가 나를 죽이러 내 방에 침입했음을 보았을 때 놀라서 미처 죽이지 못하고 보낸 것뿐이지만, 결과적으로 살려 보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용병과 나이 어린 떠돌이로 만났던 그와 나는, 이제 이 자리에서 생사에 관한 것을 대화하고 있다.
“해서. 모르는 척은 피차 그만하고. 넌 내가 라이네 소공녀인 걸 알고 있지.”
“알고 있지.”
나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알고 있다는 말에 서로 놀랄 것은 조금도 없다. 우리는 내 방에서 만난 그 밤 이후로 다시 만나고 다시 살려 보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미로 골목에 찾아오는 내가 라이네 직계인 것을 항상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앞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내가 이곳 골목에서 이 남자 외의 사람들에게 귀족인 걸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나를 약 올리고 나를 모욕할 수 있는 나의 약점이 된 것이다.
나는 코를 울리며 짧게 웃고 말을 이었다.
“네놈은 알면서도 내게 암살자를 보냈고.”
이번 암살 시도는 그가 이 무리의 대장이 된 이후로 처음 있던 시도이므로, 이 사실이 그의 약점이 된다.
이 남자는, 이 남자‘가’ 나를 죽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전 대장의 명령에 따르기만 했던 전과는 달라. 이 자리에서 여유는 그가 아니라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에겐 허락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여유가 있는 것처럼 싱글싱글 웃었다.
“아아. 오랜만에 언니를 죽이러 갈 수 있어서 좋았어.”
“누구였나.”
물었으나 남자는 여전히 웃다가 입맛을 다셨다.
“이러지 마, 언니. 내가 난처해지잖아.”
“아, 한 가지 말해주겠는데, 나 오늘부로 후작된 거 있지.”
“…….”
내 얼굴 앞에서 꽃봉오리 피우듯 손을 펴며 말하고, 팔걸이에 팔꿈치를 걸쳤다. 그리고 손가락들로 가면 쓰지 않은 목을 받치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지. 내가 여유를 부려야지. 네가 아니라.
이제 좀. 파악이 되나.
분에 차서 떨리는 호흡이 몇 번.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 이 악물어 힘이 들어간 턱. 나는 뻔히 들리고 보이는 표현을 모두 묵살하고 그를 기다렸다.
내 말없는 인내는 옳았다. 그는 잠시 후 모든 게 사라진 얼굴로 나를 마주하고, 덤덤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남자였어. 얼굴은 잘 안 보였고. 본인은 아닐 것 같던데. 끄나풀이나 될까.”
“끄나풀. 해서.”
“아, 호의로 말해주는 건데, 전에 언니를 죽이라 했던 놈들하고는 또 달랐어. 그러니까, 적어도 전 대장놈이 있을 때 내가 오다가다 봤던 놈들하고는.”
“…….”
“설령 독을 쓰더라도 어느 한 쪽은 암살인 게 드러나면 안 된다고 해서 적당히 침 쪽으로 골랐고. 주사하기엔 그만이잖아?”
“해서.”
“이야기가 끝나고 고객님은 돌아갔지. 그런데 언니도 알잖아.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야지. 사랑하는 고객님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한테 지랄을 떨면 안 되니까 말이야.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쫓고 말았지 뭐야.”
뒤를 밟는 건 여기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절차다. ‘우리도 모르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픽 웃자,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입 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곱씹듯, 어쩌면 내 충격을 극대화하려는 것처럼, 혹은 즐기듯, 말했다.
“라이네 저택으로 들어갔어.”
“…….”
발리앙이 아니라 라이네.
나는 가면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삼사 초 후 떴다. 숨을 가다듬는 모양조차 할 수 없다. 그저 그대로 목을 받치고 있다가,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보이기 위한 반응은 거기까지였고, 이어 흘린 웃음은 내 진심이었다.
============================ 작품 후기 ============================
불시에! 연참!(그리고 내일 오지 않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번 챕터가 끝나면 외전인데, 메모식으로 써둔 조각글들을 보면 언제 끝날지 까마득합니다. 외전! 외전 쓰고 싶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미리 말씀드리지만, 큼큼.
군데군데! 힌트들을! 넣어두었기 때문에! 저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아아!(확성기)
초고입니다. 문장, 문단의 완성도보다 빠른 전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유연재입니다:D 감사합니다.
+쥰의 모친이 했던 예전 의뢰가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시도가 멈춘 것은, 당시 대장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