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CHAPTER 4. 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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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드리히가 돌아간 이후로 나는 종일 멍했다. 알드리히에게 그리 대답한 것은 과연 옳은 일이었느냐며 줄곧 숙고해야 했다. 결국 쥰과 공작이 돌아오기 전에 잠에 들어, 새벽에 몇 번이고 깨고 자기를 반복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족히 늦잠을 잔 것도 아니라서, 영 뻑적지근한 몸으로 오늘 아침에 드디어 공작으로부터 라이네 후작의 은홀을 받았다. 라이네 공작의 후계자가 받는 임시 작위인 후작위를 받았다고 증명하는 홀.
나는 그것을 쥐고 빙글빙글 돌리며 방으로 돌아가다 집사와 마주쳤다. 내 작태를 본 그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처 없다. 저리도 여리게 느껴질 줄이야. 살짝 재미있어지려고 하잖아.
집사는 평소보다 몹시 노쇠한 것 같이 들리는 목소리로 내게 고했다.
“아가씨, 그건 그리 다루실 것이……!”
“자랑하고 있는 거야.”
“예?”
“나 이제 후작이지롱. 얍.”
홀을 높이 높이 던졌다가 확 낚아챘다. 꺄악, 하는 비명이 분명 집사에게서 들린 것 같았지만, 내가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근엄하게 서 있었다. 음, 잘못 들었겠지. 잘못……, 그럴 리가.
내가 일부러 입을 실룩거리다 일부러 참지 못한 웃음을 터트린 척하며 일부러 입을 가리자, 집사의 표정이 약간 무너졌다.
“난 들었지.”
“…….”
“나안 들었지이.”
홀을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씩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 더 힘껏 던졌다. 천장이 아무리 높아도 천장은 천장임을 깜박 잊고 만 것이다. 예기치 않게 천장에 부딪힌 홀이 빠르게 추락하여, 내가 미처 손을 들기 전에 내게 도달했다.
어려운 설명이 아니다. 그냥, 간단히 말하자면, 고개를 들자마자 나랑 홀이랑 충돌사고 일어났다는 소리.
“으어…….”
몸이 영 뻐근했다니까. 손의 감각이 아직 온전치 못한 것도 한 몫 했고. 이마에 정통으로 맞은 나는 바닥에 쓰러져서 부들부들 떨었다. 겁나 아파. 보석, 보석이 이마에 찍혔어.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프…….”
“어디 좀. 아, 다행히 출혈은 없습니다.”
그 말에 분개한 척, 이마를 문지르며 버럭 외쳤다.
“아니, 왜 피가 안 나!”
“……나길 원하십니까?”
“이 정도 아프면 나야지! 어? 그럼, 홀 받은 날 홀에 맞아서 피 흘린 후작 정도로 역사에 남을 수 있을 거 아닌가, 제길.”
“……오냐. 도대체 어디까지 멍청한 짓을 할 수 있나 봤더니, 거기까지 가는구나.”
나는 뒤에서 난 그 목소리에 흠칫 놀랐을 뿐만 아니라,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내가, 내가 이렇게 당할 때마다 진짜 이해가 안 간다니까. 저렇게 강한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가 있었다는 게. 어쩐지 피가 나길 원하냐는 집사의 목소리가 오묘했었다. 나는 또 내 기행에 대한 반응인 줄 알았지.
나는 벌떡 일어나 도주했다.
공작은 언성을 높여 나를 불렀다.
“에본느 라이네!”
“저 오늘 바빠서요, 아버지!”
“홀 가져가지 못하겠느냐!”
……아차.
깜박 잊었다. 멈춰서, 날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킴에게 저걸 가져오라고 하자, 공작이 음산하게 경고했다. “네가. 가지고 가라.” 꾹꾹 눌러 압축한 음성. 불쌍한 킴에게 필요 이상의 공포를 심어줄 생각은 없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후진하여, 혼자 바보짓을 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몸을 굽혀 슬금슬금 홀을 주워드는데 머리 위에 무뚝뚝한 명령이 떨어지더라.
“잡게.”
“예.”
제길.
나에 앞서 홀을 집어 주려 했던 집사는 공작의 손에 저지되어 물러난 채였다. 공작의 기사들이 내 양 팔을 꽉 잡았다. 완전히 확보되었다. 갑자기 왜……? 집무실에서 공작은 내게 홀을 주고난 후 나를 시원하게 내보냈다. 그런데 왜?
나는 공작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그러나 공작은 웃음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말하는 걸 잊었다. 이제 너도 보좌가 필요하니 등용할 사람을 고려해보고, 그리고 지금부터는 얌전히 서재로 가서 얌전히 공부하여라.”
“보좌……, 는 알겠지만, 무슨 공부 말씀이신지요?”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야겠지.”
아. 아하. 나는 그제야 이해하여 눈을 끔벅였다. 후계자 수업을 말씀하시는 것인 것 같다.
여태 자라오며 받은 모든 수업이 후계자 수업이니, 새삼 공부할 것은 없다. 그는 공작도 알 터. 새롭게 갱신된 정보들을 숙지하고 있으라는 뜻일 텐데, 이런, 오늘은 할 일이 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치고 입을 열었다.
“항상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무얼.”
“물론 지난 반년, 영지에선 손을 놓고 있었지만, 그리고 안살림에서도 손을 놓고 있었지만, 그리고 책이라곤 한두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그리고 거의 매일 놀았지만, 여행은 재미있었지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공작은 잠시 천장을 보고 입을 달싹였다. 저것은, 아마도, 심호흡이다. 나를 잡고 있는 기사들의 손도 미묘하게 동요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움찔거리지 않으면 좋겠다. 간지러워.
내가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보고 있으니, 심호흡을 마친 공작이 천천히 내게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무슨 준비 말이냐.”
“그러게요.”
실은 말하다 보니 나도 내가 무슨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더라고. 뭔가 포장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작은 더 말하지 않고 손짓했다. 심지어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나를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를 더 정중히 모시라든지, 적어도 앞은 보고 갈 수 있게 하라든지. 나는 공작을 보며 허망하게 웃으면서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래도 한 마디 정도는 남겨야 할 것 같더라.
“너무하세요!”
“으그쓰, 즈블 즘…….”
해서 외쳤더니 반응은 내 양 옆에서 왔다.
이를 악물어서 그렇지, 제대로 발음하면 ‘아가씨, 제발 좀’ 정도가 될 것 같다. 제발 입 좀 닥치라는 건가. 나는 진지하게 투덜거렸다.
“경들도 너무 하네요. 내가 뭘 했다고.”
“……아가씨께서는 각하를 화나게 하시려고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 그건 진짜 너무하고. 무례한 말인 건 알고 있지요?”
“저희도 자작가의 영랑으로 대접 받을 때가 있었지요. 지금은 습격을 조심해야 하지만.”
“아니, 어떤 막돼먹은 사람이 경들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리고 다닌단 말입니까!”
“막돼먹었다 한 적 없고, 이단 옆차기라는 말씀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만, 사정을 다 알고 계시니 범인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나네.”
“…….”
간단하게 수긍하자, 기사들은 말이 없어졌다.
그러고 보면 내가 기사들과 노는 것을 보면서 공작이 어느 정도 내가 몸을 쓸 수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참 간단한 것들인데도 이십 년 지나서야 깨닫는 게 많아지네.
공작이 사망하고 나서는 나의 기사들이 될 이들에게 끌려가는 기분은 조금도 묘하지 않았다. 하도 많이 끌려 다녀서. 약간 슬퍼지려고 하지만 다 내가 자초한 것이다. 나는 평소 끌려갈 때와 똑같이 뒤꿈치에 힘을 팍 주고 다리에 힘을 실었다.
기사들도 익숙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어차피 이제 공작은 보이지 않으니 괜찮다.
부축해주는 손길을 익숙하게 받으며 자리에 바로 섰다. 집안에서 홀을 받는 것이라 예복을 차려 입지 않아도 되었던 건 좋은 일이다. 홀을 받고 바로 나갈 생각이었거든. 킴을 가까이 오게 하여 그녀에게 맡겨 두었던 외출용 로브도 받아 걸쳤다. 홀을 잠시 맡기고자 하여 건네자 그녀는 정중하게 챙겼다.
홀은 본디 시녀의 손에 닿아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파격적이다 못해 미친 짓을 내가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할리와 데가레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킴의 손이 떨리고 있는 이유 역시.
그러나 내가 아무리 미쳤어도 이걸 시녀에게 계속 맡기겠나. 홀을 돌려받고 두 기사에게 입을 열었다.
“이제 경들은 가 봐도 됩니다. 킴도 가 봐. 방에 이것만 두고 나갈 거니까.”
벙긋 웃음으로 인사하고 그들을 지나치려 하자, 할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잠시, 아가씨. 외출하실 거라면 기사와 동행하셔야 합니다.”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지. 베르덴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나는 벙긋거리는 웃음을 짓기 위하여 벌렸던 입을 좀 더 가늘게 늘렸다. 입 꼬리가 벌쭉 올라갔다. 그가 흠칫 어깨를 세웠다.
“그럼에도 베르덴경이 이 저택에 나 없이 있던 시간이 참 길었죠?”
“발리앙경은 호위기…….”
“…….”
“……어떻게 해도 포장이 불가능하군요.”
“현실을 깨달았다니 되었습니다. 내가 좀 대단하지요.”
흐뭇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슥 넘겼다.
나는 자주 베르덴도 떼어두고 다닌 데다, 베르덴은 나를 찾지 못했다. 내 바로 뒤로 쫓아 나왔어도 결국에는 나를 잃어버렸지. 이 저택에서 가장 가까웠던 기사와도 그러했는데, 내 행동 반경이나 내 생각, 의도적으로 하는 멍청한 짓 같은 것에 베르덴 정도로도 익숙하지 않은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실실 웃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이제 나를 잡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기사들과 동행해야 하는 일정이 아니고서야 나는 홀로 다닐 것이다. 홀로 다녀야, 한다.
쭉 걸어 방에 돌아와서는 주위를 살피고 홀을 없앴다.
어디 보자, 홀을 넣어둘 함은 후에 증서와 함께 올 테니, 지금 당장은 염려할 필요가 없고……. 흰 장갑을 벗어 책상 모서리 즈음에 내려놓으며 꾹 내리눌렀다. 별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내리 누르며 크게 숨을 내쉬었고, 잠시 수 초간 휴식했다.
몸이 찌뿌둥하긴 하지만 생활 못할 정도는 아니고, 위기를 못 벗어날 정도는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낫지. 어제 알드리히를 만난 후 완전히 결정했으니 약간 급한 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작에게 ‘알아보겠다.’고 한 것은 애초에 이 방법을 염두에 두고 했던 것인 데다.
“아, 정말 싫다…….”
푹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방을 나와 본관의 현관에 다다랐을 무렵, 현관 앞의 홀에서 집사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 딴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기에 와 있네. 뒷목을 잡고 쓰러졌던 노인을 떠올려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 강건해. 강건하길. 그리하여 오래 살기를.
공작은 삼 주 전에 죽었어야 했고, 쥰은 삼 주 전에 새 공작이 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 쥰이 공작이었을 때 집사가 노인이었던 적은 없다.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뭐야?”
“아가……, 각하.”
아, 이런.
불시의 공격에 나는 약간 멋쩍어져서 목 뒤를 쓸어내렸다. 공작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각하라 불릴 일이 없겠지만, 이제 나 혼자 따로 있을 때는 응당 그리 불리게 되었다. 나 이제 후작이라서.
조금 전까지 나를 여전히 아가씨라 부르던 집사가 굳이 이 자리에서 고쳐 부르는 것은, 그가 상대하고 있던 사람이 이 집안 용인이 아니기 때문이리. 집사의 인사를 듣고 내게 예를 갖추는 젊은 남자에게 손을 올렸다.
“어, 수고하네. 뉘댁 사람인가?”
기품과 체면은 어디에다 팔아먹은 모양새인 걸 나도 알고 집사도 알고, 아마 청년도 알았던 것 같다.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의 표정이 살짝 무너졌다. 그러나 내가 여태 사교계에 보인 작태가 있고 소문이 있어서, 청년은 그럭저럭 잘 받아들인 걸로 보였다. 그가 고개를 조금 숙인 뒤 대답했다.
“발리앙 저택에서 왔습니다.”
“……발리앙?”
놀란 탓에 반문이 늦었다. 느리게 되묻자, 집사와 청년이 예, 하며 대답하더라. 나는 대충 용건만 묻고 지나가려던 생각을 수정했다.
“왜?”
“서신이 왔습니다. 공작 각하께 한 부가 가고, 이것이, 마침 후작 각하께.”
집사가 건네주는 봉투를 받으며 물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공작께 드려야 하는 서신을 하인에게 시켰을 리 만무하다. 발리앙의 가신 가문의 자제일 청년에게 부드럽게 치하를 건네자, 시종은 다시금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배웅은 집사에게 맡기면 된다. 나는 그들에게서 대여섯 걸음을 멀어져 밀랍을 부수었다. 붉은 부스러기가 투둑 떨어졌으나, 내 주의는 당연히 그 안의 서신에 쏠렸다.
“…….”
아리엘에게서의 초청.
친구끼리 오붓하게 차를 마시자는 가벼운 초대다. 아직 내가 후작된 것을 모를 테니 이상할 것은 없으나, 그럼 공작에게 보냈다는 저 서신은?
나는 눈을 들어 집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서신을, 보았다. 내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아리엘이 감히 공작에게 서간을 보낼 정도로 간이 커졌나. 내 입에서 헛웃음이 비실비실 흘러 나왔다. 아, 드디어 내가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건가. 죽어야 했을 공작에게로 온 서신이라 하니 감도 안 잡힌다.
============================ 작품 후기 ============================
알드리히에게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나중에.
빠른 전개에 집중하고 있으니만큼 전개가 늘어지는 걸 최소화하고 싶어서 이리저리 고민해보았지만, 이 이상 쳐내고 이 이상 줄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절대 현재의 계획대로 70편 내외 완결을 내지 못할 것 같아서 좌절 중입니다. 벌써 38편인 걸요(주먹울음). 이 장편병.
자유연재입니다:D
+160727: 오해의 여지를 줄이기 위하여 추가합니다. 계획은 70편이었으나, 70편 내외로 완결내지 못하리라는, 완결내지 못한다는 뜻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