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36화 (36/157)

00036 CHAPTER 4. 꿈에서 =========================

나는 그의 반문이 내게 큰 희망을 주었다는 것을 느꼈다. 몹시도 어여뻐서, 나를 벅차게 한다. 콩콩 뛰는 심장이 명치까지 내려간 듯했다.

여전히 웃으며 천천히 되짚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절 죽이려 하신 적이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러자 알드리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 심기 더럽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게 그대로 실행되고 있다.

그는 그대로 나를 응시하다 입 꼬리를 느긋하게 올렸다. 꿍꿍이 있는 웃음. 평소 그가 짓던 웃음이다.

“내가 왜 누이를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이유야 언제든 생길 수 있는 것이니까요.”

“……아하, 그래서 내가, 누이의 목숨을 끊어버릴 정도로 미쳤다 이겁니까?”

그의 말 어느 한 단어에서 멈칫하고 말았으나,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의외로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죽인다고 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목숨을 끊는다 하는 표현이 어쩐지 지독하게 건조한 표현으로 들렸다. 아, 이런 그러고 보니 내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황태자를 매도하는 것처럼 추궁하고 말았다.

나는 그가 웃고 있으나 내심이 굉장히 비틀린 상태임을 대답 직전에 깨달았으나, 그럼에도 할 말을 다 하였다.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며.

알드리히는 내 대답을 듣고 나서 멀뚱하게 눈을 깜박이다 비식 웃었다.

“거 참, 말 심하네요.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놀다 버릴 놈들이라 해도 누이는 아니라고.”

“믿기겠습니까.”

“왜 못 믿는데요.”

“…….”

어……, 네가 사람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는 캐릭터로 설정한 게 나라서?

나 없으면 심심하다고 술래잡기 할 거라 말했던 놈이 너라서?

그러나 첫째 이유는 그렇다 치고, 둘째 이유를 좋게 포장하여 말할 자신이 없었다. 황태자만 아니었어도 한 대 때렸을 텐데. 날 쫓던 자들을 기절시킨 후에 삐죽삐죽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황태자만 아니었어도.’

하지만 그들이 알드리히가 보낸 자들이 아니라면, 지금은 그것으로도 족하다. 알드리히에게 지금 당장 더 바라는 건 없다. 나는 저택에만 있느라 약간의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을 슬금슬금 두 손으로 덮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이마부터 눈썹, 눈두덩, 차례대로 꾹꾹 누르고 문질러가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머리 위에서 알드리히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누이를 사랑하고, 누이는 내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사람입니다.”

눈두덩. 감은 눈의 눈머리와 눈꼬리. 그리고 다시 눈썹.

“거절당해도 접히지 않는 마음인지라 누이가 참 많이 곤란하겠습니다. 그것에 대해선 미안합니다.”

손을 멈추었다.

아리엘을 사랑하지 않는 황태자. 대신 에본느를 사랑하는 황태자. 받아들이는 게 전보다는 훨씬 유하게 받아들여진다. 두 번째 들어서 그럴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유하게 받아들여질 뿐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죽이려 했고, 누이를 어떻게 죽이려 했습니까.”

“…….”

글을 거스르기로 작정한 이상, 알드리히가 진정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슬렀는데 알드리히라고 거스르지 못할까. 그러나 분별해야 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얼굴 전체를 꾸욱 누른 후에 얼굴을 주무르던 두 손을 뗐다.

그리고 씩 웃으며 모르는 척 눈썹을 움직이자, 알드리히도 나와 비슷하게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누이. 말 안 해 주면, 공작한테 직접 물어봅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실 리 없잖아요.”

“아, 그러니까 누가 죽이려 들긴 들었다는 거네.”

……역시 난 네놈이 싫어. 기피대상 상위권.

눈을 찌푸리자, 황태자는 나를 약 올리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허술한 누이도 귀엽습니다만 아파서 허술하다는 게 마음에 안 드네요. 누가 누이를 죽이려 했을까.”

귀엽고 어쩌고 하는 것에 속에서 분노가 올라왔으나 참았다. 하고 싶은 게 많다. 때리고 싶고, 때리고 싶고, 때리고 싶고. 지금 이 약간 급해지려는 마음은, 하고 싶은 것들과 해야 하는 것들이 정돈되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러니 차근차근 하나하나 하자. 일단, 암살을 알드리히가 사주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다음. 갑자기 나온…….

음.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야겠다.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특정 주제 두어 개 내에서 이리저리 널을 뛰고 있는 우리의 대화를, 나는 하는 수 없이 또 다시 되돌렸다.

“전하. 곧 후계자 공표가 있을 거고, 저는 후작이 됩니다. 그 후에 때가 되면 공작이 되겠지요.”

“음. 그렇군요.”

그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않아 보이는’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모르는 척하기로 그가 결정한 거라면, 나는 그가 이해했다며 인정할 때까지 설명하려 한다.

짧게 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전하. 이제 전과는 상황이 바뀌어, 저와 전하는 어떠한 식으로도 남녀관계로는 이어질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방법이 왜 없습니까? 누이가 공작위를 포기하면 되지요.”

……이런 이기적인 미친놈.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웃었다.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이게.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마냥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하여간, 성격 나쁘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답했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렇잖아도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누이가 내 옆에 서지 않고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사방팔방 퇴로를 막아버려야 하나.”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리엘이 이 세계관에서 에본느가 살아남을 퇴로를 모두 막은 일이 있어서 그런 말은 하지 못한다. 이 정도 되니 차라리 어이없는 것도 사라졌다.

와, 저런 말을 정말 태연한 얼굴로 할 수가 있구나.

허허롭게 웃으며 그를 감상하고 있자, 심지어 알드리히는 천연덕스럽게 한숨을 쉬기까지 했다.

“아아, 큰일 났네. 어떻게 하지. 누이가 다른 놈을 마음에 두는 건 정말 싫은데.”

“접으시면 됩니다.”

“뭘요. 그놈 허리를? 역으로 접어버릴까요?”

“…….”

그에 말이 막혔을 뿐더러, 조금은 아련해지고 말았다. 눈의 초점이 조금 흐려졌을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거기까지 생각이 치닫나…….

그의 머릿속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설정했었는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알드리히가 나지막하게 웃기 시작했다. 나는 질색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 자식.

“놀리신 겁니까?”

“아무렴 그걸 진심으로 말하려고요.”

“……그럼 여기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 생겼는데요. 그러니까, 어디부터가 놀림이었습니까?”

“그럼 누이가 갑자기 후계자가 되려고 마음 돌린 까닭은 무업니까?”

내가 그랬듯 그도 갑작스럽게 물었다.

여태까지의 대화와 조금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해했다.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그 손으로 턱을 괴었다. 눈을 의식적으로 가늘게 뜬 그 웃음은 그에게 퍽 잘 어울렸지만, 일대일로 받기엔 내 심장에 무리가 간다. 저리 웃으면 무섭거든. 내 혈압이 올라갈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나는 애써 웃으며 반문했다. 이해했음에도. 모르는 척.

“예?”

“누이의 여태까지의 언행을 보면 도저히 공작위 이을 것처럼 안 보였어요. 알쏭달쏭한 감이 분명 있기야 있었지만, 나뿐만이 아니라 수도 귀족들 대부분이 최근에는 누이보다는 라이네경에게 비중을 두었을 겁니다. 이십대 들어서 사교계에 나오는 일이 점차 적어지니 그럴 만도 하지요. 지난번에 누이가 내게 한 말 기억합니까? 몇 년간 가출해서 아니 돌아오겠다고.”

기억한다.

그날로부터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듣는 내내 다문 입으로 빙긋 웃고 있던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알드리히도 웃음을 지우지 않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리더니 재미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기반을 계속 닦아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오드리나를 몇 년간 떠나 있겠다고요? 공작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해서, 아, 완전히 마음을 정했구나 했지요. 그럼 누이가 더는 가출하지 않고 오드리나에 계속 머물러도 괜찮겠다고 생각해서, 이제 가출하면 반드시 찾을 거라 했습니다. 날 떠날 생각은 말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어제 누이의 후작 승계가 어쩌고 하니 내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

“갑자기 마음 돌린 까닭이 무언지 궁금합니다.”

나는 그제야, 문득,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웃음에서 여유가 떨어져나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느낄 수밖에.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웃는 얼굴을 가장하고 있구나.

매끄러운 미성도 점점 쩍쩍 갈라져가고 있었다.

“누이는 큰일이 없는 한 공작이 될 테고, 나 역시 큰일이 없는 한 이대로 황위에 오르겠지요. 이제 내 옆에는 누이가 설 수 없고, 누이의 옆에 내가 설 수 없을 겁니다. 누이가 공작위를 포기하거나 내가 황위를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하겠지요. 압니다. 알아요.”

“…….”

“그래서 나는 누이가 공작이 되지 않기를 바랐어요. 내가 왜……, 내가 왜 누이의 비밀을 숨기는 것에 기꺼이 동조한 건지 알고 있잖아. 누이는 알고 있잖습니까. 친구니까, 같은 이유 말고, 이제는 누이도 알잖아요.”

아. 나는 더는 웃지 못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고쳤다. 고개를 들고, 옆을 보고, 알드리히의 시선에서 눈을 벗어나려 하고, 눈을 깜박이고, 떨리는 숨을 쉬고, 입술을 아주 조금 깨물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 상황에 이르러 그 마음이 달갑지 않게 느껴진다.

덤덤하지만 분명하게 나온 대답을 듣자마자 눈을 깊이 감았다 떴다. 그를 보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턱을 괴었던 손을 내리는 것이 눈꼬리에 보이거나 느껴졌다. 잘게 끄덕이며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계속 끄덕끄덕. 동의도 수긍도 아니고,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마른 입술을 말고 풀기를 계속했다. 그래도 알드리히는 말을 이었다.

“인내하는 건 포르타……, 영랑 덕에 몇 년간 잘 배웠습니다. 누이. 전 누이의 마음에 내가 들어있기를 원합니다. 내가 누이에게 내 매력을 끊임없이 말하리라 했던 그 말, 가벼운 마음으로 한 거 아니에요.”

“…….”

그때 그런 식으로 장난처럼 거절할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겠다. 거절이 진심이었으나, 그런 식으로 거절할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허벅지 위의 두 손을 서로 기도하듯 얽고 나서 고갯짓을 멈추었다. 알드리히 역시 잠시 가만히 나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곧 그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어디 보자. 이 정도면 우리 둘 다 말 돌리기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할 말 더 있어요? 나는 없는데.”

“…….”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내 눈을 수 초간 들여다보는 것 같던 그가 웃음을 고쳤다. 평소의 여유.

“그리고 누이도 없는 것 같고.”

……그렇군. 알드리히가 돌아왔다. 나도 돌아가야 했다. 보편적인 상식을 적용해 보았을 때, 여기서 힘겨울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다. 마치 내가 헤르조와 갈라설 때와 같다면 더더욱.

그러나 내가 미처 그러기 전에 그는 빙긋 웃더라.

그리고 몹시 끈적끈적한 차가움이 발린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이제 그럼 누이를 죽이려 했던 자들에 대해서 말해요.”

나는 그를 보다 입을 조금 벌리고 짧게 숨을 뱉었다. 오늘의 기억을 내가 잊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다시는 나를 향한 알드리히의 마음을 의심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리엘. 이대로 가면 그녀는 나를 용서치 않겠지. 아니, 아니다. 이미 내게 복수하려 하는 일을 원천차단하는 것과 화해는 요원한 일일 지도 모르는 일. 나를 죽이고자 쫓았던 이들을 떠올리고, 그들의 침도 떠올린 후에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미야나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D

남주는 이번 재업로드 전에 후기로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변동 없습니다만, 새로운 독자님들을 위해서 이번엔 쉿쉿하려 합니다:D

'누이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는 알겠는데요.'...대충 이런 대사였던 것 같습니다. 기꺼이 함구했다는 비밀에 대해서요. (한 번만 더 부르면 가출하겠다vs그럼 누이를 찾아 올리겠다 하는 알드리히와의 대화 중에서. 5회에)

퇴고하지 않은 초고입니다.

자유 연재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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