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35화 (35/157)

00035 CHAPTER 4. 꿈에서 =========================

……저는 지금 놀라서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이 미친놈아.

나는 후닥닥 다리를 내리고 일어나서 그에게 인사했다. 알드리히가 직접 행차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 훤히 해 뜬 시간에!

“송구합니다. 감히 존명을 허락 없이!”

“아아, 그럴 것 없습니다. 말했잖습니까? 좋다고.”

“…….”

알드리히는 고개를 살짝 움직이며 내 사과를 물리쳤다. 저런 말이 더 불안해지게 하는 신분이라는 걸 그는 매번 잊는다. 그리고 누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하고 싶은, 해야 하는 지적들이 머릿속에서 몰아쳤다. 마치 황태자를 처음 만났을 때나, 우리가 그리 친하지 않았을 때처럼 마음이 묘하게 불편했다. 이를 어찌하지? 나는 아직 질문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 포장해야 하는지 정리하지 못했다. 입을 움찔거리는데, 그가 먼저 내게 말했다.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사과더라.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궁 밖에 정식으로 행차하려면 신경 쓸 게 많다는 것을 안다. 미안해할 것도 없고,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정말. 황태자의 행차를 기대한 적이 단 한 번을 없는데.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

나는 그 마음을 담아 감히 황태자의 인사를 사양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을 돌렸다.

“편하게 앉으실 의자가 없는데, 응접실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나는 괜찮은데, 누이는?”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도 괜찮지요.”

내가 앉아있던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권하자, 알드리히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의자를 끌어왔다. 뜨뜻하게 데워놓았으니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그 정도로 예의를 말아먹은 인물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나름대로의 배려……라 생각하는 게 논리적이겠지.

나는 알드리히가 내 옆에 의자를 놓고 앉자, 나도 앉았다. 이제 우리는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마주 앉아 있지 않으니 기분이 묘했다. 사람과 대화할 때 표정과 눈을 장시간 보지 않으면 살짝 불편해지는 감이 본디 있었던 데다가, 알드리히라는 사람이 원체 불안한 사람이기까지 해서.

여유 있게 웃으면서 계략을 세우고, 누구 한 명의 체면을 산산조각내고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내가 그를 불안해하고, 그에게 호의가 있고, 그와 친구이고 하는 그런 것들은 이 찝찝한 두려움과는 상관이 없다.

책상 위로 두 손을 올려 끝마디들만 가볍게 얽었다. 그리고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오른 입 꼬리를 조금 올리고 웃는 둥 마는 둥 했으나 그를 향해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는 내 얼굴을 보다가, 내 손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리는가 하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깨어난 건 어찌 아시고.”

“부황께서 어제 저녁에 누이의 후작 승계를 확인하신 것을 제외하고 말입니까? 라이네경의 얼굴이 확 펴서.”

아아. 그랬나. 그럼 나는 오늘 중에 아버지로부터 라이네 후작의 은홀을 받겠다. 후계자에 관한 대화를 나눈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빨리도 추진하셨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확인한 것을 어째서 알드리히가 알고 있는지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황제는 와병하여 있고, ‘모든’ 국정까지는 아니어도 꾸준히 알드리히에게 사무가 넘어가는 중이었다. 황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졸하고 알드리히는 황제가 되겠지.

그리고 황제에 대하여는…….

“…….”

황제의 사인은 병증인 만큼, 살릴 방도가 없다.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황제를 살리려 노력했을지는 의문이고. 살릴 가치도, 살릴 애정도, 살릴 이유도 없으므로. 나쁘지 않은 황제였음에 의의를 두고, 그런 황제를 설정하였음에 미약한 미안함을 느끼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황제의 붕어를 막상 들으면, 이번에 공작을 구한 것과 대조되어 마음이 애당초 각오했던바 보다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불편해지겠지만. ……그 황제가 알드리히의 부친이라는 점 때문에 알드리히에게도 미안해질 테고.

나는 생각에 빠져, 웃듯 오른 눈을 가벼이 찌푸렸다.

그러나 알드리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깊은 숙고는 아니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어쩌다 다친 건데요.”

나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다문 입으로 흣 웃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에게 물은 적이 없었구나. 내 부상의 연유를 알렸는지 알리지 않았는지. 아마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라도 ‘나는’ 상관없었지마는. 나만 상관이 없고 공작에겐 상관이 있어서 한참 머리 싸매셨으리.

아, 재밌어졌다. 얽었던 손을 풀고 손가락 끝들을 톡톡톡 부딪히며 대답했다.

“길 가다가 넘어졌습니다.”

“그러다 기절해서는 삼 주나 의식이 없었고?”

“아주 열심히 굴러서요.”

“머리를 땅에 박고 춤을 춰도 삼 주나 실신해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음.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의 말에 동의하여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내가 지금 거기서 끄덕이면 안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차 하여 그를 보자, 알드리히는 의뭉스럽게 양 입 꼬리를 올리고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아, 이런.

나는 당황스럽게도 그 웃음에 사로잡혔다.

“…….”

내 바로 앞에 있는 그의 얼굴, 그의 웃음, 읽어낼 수 있을 만한 것들을 멍하게 응시했다.

저리 웃기에 나는 최종적으로 그를 믿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정말 믿고 싶지 않아하는 것일 수도 있겠는데……. 너무 극단적으로 갈린 길이라 어느 쪽이 내 감정인지 모르겠다.

알드리히가 날 죽이려 했다면. ‘그러면 그렇지’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어쩌면 아주, 아주 많이 가슴 아파할 지도 모르겠다. 아, 아하, 그래, 한 계절이 지난 지금에서야 인정한다. 공작이 되기로 한 지금은 인정할 수 있어. 나는 헤르조와 베르덴과 갈라설 때 미치도록 아팠다.

내가 살기 위하여 끝내 알드리히를 멀리 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아프겠지.

안다. 알드리히와 아리엘이 합심하여 나를 죽이려 드는 때가 결국에 올지 오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혹 온다면, 나는 그때가 눈에 보이게 오기 전까지는 알드리히와 눈에 띄게 반목할 수는 없을 것을 안다. 그는 결국엔 황제 될 사람이니, 반목하였다가는 내 손해뿐이다. 해서 혹 그가 나를 이번에 죽이려 들었다고 해도, 나는 알드리히를 헤르조와 베르덴에게 했듯 잘라내지는 못할 것이다.

다, 안다.

이것이 이 세계의 신분제이고, 소위 말하는 ‘분수에 맞게 사는 방법’이다.

다물고 있던 입술을 살짝 열어 숨을 들이켰다. 그럼에도 물어야 하는데 어찌 말을 꺼낼까. 조금은 힘없이 눈꺼풀과 고개를 내렸다. 이상하리만큼 막막하게 느껴졌다. 알드리히를 여기서 보기 전까지만 해도 큰 문제없이 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던 대담함은 다 어디로 갔나.

답 없는 막연함에 답답해하며 숨을 폭 내쉬는데, 알드리히가 가만히 나를 불렀다.

“누이.”

“예.”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있었다.

무서운. 장난스러운. 여유로운.

그를 보느라 비튼 목이 슬슬 뻐근해져서 목을 주무르는데, 그는 비쭉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의 건강은 상관이 없습니다. 내게 중요한 건 누이의 건강이에요. 미안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짓말이 듣고 싶지 않네요.”

“와, 너무하세요. 누가 거짓말을 했다 합니까?”

“아, 그럼 좋습니다. 걷다가 굴렀다는 건, 평지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럼……. 어디 보자, 산이었을까?”

……그렇다고 너한테 추리를 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보다 주춤주춤 의자를 뒤로, 옆으로 번갈아 움직이며 뺐다. 제게서 멀어지는 것을 알드리히는 싱글싱글 웃으며, 잡지 않았다. 외려 웬 재밌는 싸움이 걸려 왔을 때처럼 여유롭게 추리를 계속해 나가더라.

“산이라 하니 이번에 공작이 토벌 때문에 라이네령에 다녀왔지요. 거기에 킨들 라이네가 있고.”

“…….”

“어라, 그러고 보니 누이는 이번에 공작과 함께 귀경 했다는 첩보가 들어왔었네. 그렇다면 누이도 킨들 라이네에 있었을까요?”

야, 이, 이 미친놈아…….

나는 큭, 거칠게 탄식하며 미간을 짚었다. 추측하는 것도 소름이 끼치는데 그걸 또 저렇게 소름끼치게 방실방실 웃으며 설명을 해야 하나.

“그런데 도중에 누이의 신병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공작 성정으로 봤을 때, 누이를 킨들 라이네에 데려갈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럼 누이가 먼저 입산해 있었다는 건데…….”

“…….”

나 떨어도 되나? 이 정도면 떨어도 되는 거 맞지? 그런 거지?

나는 미간에서 손을 내리곤 웃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물이 영 신통치 않았다.

“해서 포르타경을 불렀습니다. 아, 션경 말고, 시드니경이요. 알고 있겠지만 그제 돌아왔거든.”

……몰랐습니다.

“하여튼 그를 어제 불러서, 누이를 혹시 토벌 중에 만났느냐고 물었습니다.”

“…….”

“그런데 그 사람이, 기사단은 폐하의 것이니, 주군의 명 없이는 아무 것도 말씀 못 드린다고 하더군. 부황 폐하의 명 없이는.”

내심 치던 장난과 말대답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아.

나는 나도 모르게 위아래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서 물었다. 그 말은 시드니도 내 상태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엄연히 말하면 하산을 마친 후에 다쳤으니 그와의 약조는 지켰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좋지 않다. 그는 내 안전을 위하여 끝까지 살뜰하게 염려해 주었었다.

그러나 앞에 알드리히가 있어 오래 동요할 수는 없어, 입을 바로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기울이더니, 그렇잖아도 약간 내 쪽으로 틀려 있던 의자를 완전히 틀었다. 그리고 싱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부황 폐하의 윤허를 얻어내는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의 반응에서 대충 짐작은 할 수 있겠더군요. 경은 누이를 만났을 겁니다. 토벌 중에.”

“…….”

“누이도 경도 참 반응 없네요. 누이는 괜찮지만, 그 사람이 그러니 내가 좀 짜증이 나더랍니다. 해서 또 물었습니다. 그럼 경과 만났을 때 누이가 다친 것이냐고. 그 사람, 그제야 좀 놀라더군.”

아아……. 그 시점에서 시드니가 내 부상을 안 거냐…….

내 웃음이 점점 부서지고 있다. 아니, 이 미친놈은 시드니가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던 것을 왜 괜히 알.

“…….”

아니, 잠깐.

나는 그 순간 문득 깨달았고, 서서히 표정이 사라져 갔다. 잠깐. 우리 둘의 현재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있다. 눈 표면이 한순간에 건조하게 말랐다.

‘시드니가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는 건, 내가 혼수상태라는 게 오드리나에 퍼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알드리히가 내 상태를 알고 있기에 나도 무의식중에 오드리나에 퍼졌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시드니에 이르러서는 무심코 그 반대의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 대화의 중요한 전제가 분명치 않아서야 어떤 오해가 생길지 모른다. 나는 어깨보다 낮은 곳에서 손을 들었다.

“잠시, 전하. 제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이 오드리나에 퍼졌슴, 퍼진 게 맞습니까?”

“응? 아니요.”

“……아니, 잠깐만. 그럼 전하께서도 아예 제 부상을 모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워낙에 내 가출이 습관적이라, 오드리나의 귀족 대부분이 내가 가출하여 소식이 없다는 것을 알 테지만, 공작은 내 가출을 요양으로 애써 포장하긴 했을 것이다. 그래, 그렇지. 공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후계자 될 소공녀가 가출 중에 부상당하여 의식이 없다는 것을 굳이 알릴 이유는 없다.

그런데 알드리히는 내가 삼 주간 의식이 없었던 것마저 알고 있었다.

들었던 손이 빛 없는 곳의 해바라기처럼 천천히 졌다. 아, 역시. 설마. 정말. 설마.

그러나 토하기 직전까지 몰린 내 속을 모를 알드리히는 천연덕스럽게 빙긋 웃었다.

“내가 모르는 누이의 일은 누이의 가출 중의 일로 충분합니다. 오드리나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마저 모르고 싶지는 않아요.”

“……어찌 아셨습니까?”

“음. 어찌 알았을까요?”

역시. 설마. 통탄할 만한 비극까지는 가지 말자. 제발. 제발.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도 못했다. 나는 확신컨대, 내가 그를 대하던 모든 태도를 통틀어 가장 써늘할 눈으로, 냉정할 음성으로,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전하. 절 수색하셨습니까?”

“예. 예고했을 텐데요.”

옳다. 예고했기에 거기까지는 예상했다. 나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고, 마침내 목소리를 쥐어짜서 물었다.

“그 명령이 혹, 죽여서라도 끌고 오라는 것이었습니까?”

웃고 있는 나의 메마른 질문이 던져지자, 알드리히가 자세를 고쳤다. 약간 나른해하는 감이 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싹 사라졌다.

그는 나를 보며 느리게 반문했다.

“……지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그 목소리, 사람 하나는 능히 피 말려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이 싸늘했다.

“누가 누이를 죽이려고 했어요?”

============================ 작품 후기 ============================

퇴고하지 않은 초고입니다.

빠른 전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만, 이번회로 끝났어야 할 알드리히와의 만남이 어째서 다음편까지 이어지게 되었을까 의문...(...)

자유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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