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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꽃 작가님-34화 (34/157)

00034 CHAPTER 4. 꿈에서 =========================

그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다른 표현은 하나도 맞질 않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꺼멓게 물들었고, 별이 튀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문질렀다.

……나 있잖아, 일어나자마자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알드리히부터 시작해서 어질어질, 이게 뭐하는 짓이지.

어이가 없어서 눈을 찌푸렸는데, 공작은 더 심한 것을 말하더라.

“그게 아니 된다면, 이 저택의 집사로 들어오기를 원한다고.”

이번에는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베르덴이 뭘 해? 입을 뻐끔거리다 가까스로 물었다.

“……어, 음, 뭘 어쩌, 뭐, 뭘로요?”

“집사다.”

“…….”

잘못 들은 게 아니구나.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천천히 물었다.

“하여 어찌하셨습니까?”

“어찌했을 것 같으냐.”

“내치셨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그리 했다.”

베르덴의 행보가 기가 막히든 아니든, 공작의 결정이 올바른 것이다. 나는 당연하게 납득했다. 발리앙 후작과의 거래는 내가 베르덴의 서임을 마침내 부수는 순간 완료되었다. 베르덴이 새로이 그런 사고를 치게 되면 발리앙가와의 관계가 얼마나 나빠질지 눈에 선했다.

그러나 의문인 것은, 그토록 시원하게 간 베르덴이 어째서 다시 라이네로 돌아오려 하는지.

그가 처음에 내 앞에 무릎 꿇었던 것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 우리가 내 방에서 서임을 부술 때에 그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하여 나는 우리가 깨끗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이 미적거리며 그를 놓든, 놓지 않든, 적어도 그의 입장에서의 우리는 깨끗하게.

허면 그는 어찌하여 다시 라이네에.

나는 베드 테이블에 놓인 물잔을 더듬더듬 들었다. 손이 떨렸다. 충격 운운할 것은 아니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힘 탓이다. 결국 입술에 대고 잔을 기울일 때는 두 손을 모두 사용하여야 했다.

내가 목을 축이고 잔을 도로 내려둘 때까지 공작은 잠잠히 기다렸다.

그 후 물은 것은 베르덴의 일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킨들 라이네에는 어째서 갔었지?”

아, 웃어야 할 때다.

나는 베르덴에 대한 것을 일단 미뤄두고, 입매에 힘을 주고 빵긋 웃었다. 기품이라고는 절대 찾아볼 수 없을 웃음인지라, 공작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래도 모르는 척 물었다.

“몸 상하신 곳이 있는 건 아니지요?”

“없다. 다친 사람은 너지. ……언제 그렇게 무기를 다룰 줄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했다.”

그리고 다행히 공작은 내가 말을 돌린 것에 따라와 주었다.

그는 내가 그 커다란 괴물들에게 겁 없이 덤비고 검을 휘둘렀던 것에 대하여 조금도 타박하지 않았다. 놀란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이미 삼 주나 지나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내가 간 크게 집을 나가 여행을 하는 것에서 혹시 이미 유추했던 상태였을 수도 있었으리.

나를 후계자 삼고자 하는 공작의 입장에서는 결코 나쁘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긴 하였다.

라이네령에는 몬스터의 서식지인 킨들 라이네 산맥이 있는 탓에, 라이네 공작이 될 후계자들은 대대로 훈련을 받아왔다. 어차피 직접 참전할 일이 거의 없으니 자발적인 훈련이었다. 훈련 받겠다 나서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는.

그러나 같은 일이 반복되고 쌓이면 역사와 전통이 되는 것이다.

내가 검을 들 수 있다는 것은 전통을 이었다는 것과, 한결 흠이 없어진 라이네 공작에 가까워졌음과 동일했다. 설령 내 저의가 그게 아니었다 할지라도.

‘잘했다’는 말은 아마 그렇기 때문에 나왔으리라고 짐작 가능했다. 칭찬 받아 기분 나빠할 것은 없다. 나는 눈웃음을 웃는 척 피로에 젖은 눈을 감고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일이 초의 짧은 휴식 후 눈을 뜨려는데, 영 눈꺼풀이 안 올라가더라.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이었다. 이것이 ‘잠깐 눈만 감고 있는 거야, 잠간 눈만 감고 있는 거야.’ 하다가 잠에 드는 사이클의 시작임을 알고 있다.

이러다 진짜 말하다 잠들지.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뜨자 눈알 표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 상태로 보건대 아직 삼 주의 혼수상태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멀쩡한 척 있지만, 한 번 잠에 빠져 들면 미친 듯이 잘 것 같다.

공작이 나가면 바로 누울 거야……. 쉰다 하는 단꿈을 꾸며 눈을 깜박이는데, 내 왼편에 앉아 있던 공작이 내게 또 다른 것을 물었다.

“시간은, 그래, 네 말대로 시간은 가졌느냐.”

이 상황에서는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그가 말하는 시간이 무슨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나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지난 사 개월 며칠에 한 번씩은 반드시 숙고하며 고민하였던 바가 아닌가.

샐쭉 웃으며 고개를 동의했다. 시간? 가졌다. 공작을 살릴 시간.

“예.”

“어찌할 것이냐.”

공작이 무조건 나를 후계자로 삼으려 해 왔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참 놀라운 질문이었다. 나는 멈칫했지만 마지막에는 대답했다.

“에이. 아시면서.”

“……허면 후계자 공표를 하마.”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크게 마셨다가 푹 내쉬었다. 자아. 이 말에 대한 대답을 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

쥰을 앞에 두고 결정했었다. 아마도 에본느는 죽었다고. 나는 살기 위해 에본느를 아마도 죽였고, 나는, 공작이 될 것이라고. 나는 살 것이다. 글을 바꾸고, 살 것이야.

나는 마지막으로 아직 몽롱한 머리를 정리하고, 천장을 보고 방긋 웃고, 그리고 공작을 보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예.”

“너는 이제 라이네 소공녀가 아니라, 라이네 후작이 되는 거다.”

“예. 마음 굳게 정했고, 덕분에 이번 가출은 참 재미있는 가출이었습니다.”

“…….”

내 말에 공작은 불길한 무언가를 상상하신 모양이었다. 눈이 흔들리는 게 영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후작이 되고서도 가출을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것이리라고 대충 짐작이 가능했지만, 나는 모르는 척 손장난을 쳤다.

내가 공작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일은 원래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공작이 되지 않기를 선택했고, 공작은 글대로 죽도록 두려고 했었으니까.

하여, 공작에 대하여는, 이번에 내가 그를 구한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 역시 나를 위한 것이었기에 순수한 구명은 아니었지만.

그의 원대로 공작이 되는 것도 나를 위해서고, 앞으로의 행보 역시 나를 위해서 할 것이다. 그 길에서 공작의 속을 엉망으로 어지럽히게 될 일이 많아질 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평소에 이런 식으로 뒷목 잡기를 반복해서 적응을 시켜드리는 게 좋

“고맙다.”

……지…….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멈추었다.

간단한 말. 간단한 인사. 이해의 과정 역시 간단하였다. 그 순간 왼 관자놀이부터 시작한 통증이 오른쪽의 관자놀이까지 쭉 밀고 들어왔다. 찌르르.

어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결국 나는 와르르 부서진 것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아버, 음, 공작에게 물었다.

“구해 드려서요?”

묻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의 대답을 미리 알았다면 묻지 않았을 거야. 공작은 그 냉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답하더라.

“일어나줘서. 구해줘서. 에본느, 네가 내 딸로 와 주어서, 고맙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말하듯 말씀하시더라…….

내 입 꼬리가 내려갔다. ……아, 이 알 수 없는 기시감. 멍하게 그를 응시하던 나는 이내 머리뼈가 부서진 것만 같은 고통에 강타되어, 정신을 잃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

*

그로부터 이틀 후에 일어났다 하여, 일어나자마자 온갖 걱정을 들었다. 나도 내가 살면서 독에 맞은 것도 아니고, 칼에 맞은 것도 아닌데 기절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시 일어났을 때에 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으나, 또 무언가 꿈을 꾼 듯했다. 악몽 끝의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으니 길게 스트레스 받을 것은 없다.

훌훌 털어냈다.

이후 나는 건강을 본래 있던 자리로 끌어올리는 데에 집중했다. 목구멍이 좁아진 것처럼 무얼 삼키는 것, 심지어 물을 삼키는 것조차 약간 어려운 감이 생겼으나, 물건을 집다가도 내가 제대로 집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둔해진 감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섭다.

손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가끔은 등허리에 소름이 비쭉비쭉 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작을 살린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글은 바뀌고 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내 눈 앞에서 살아 돌아다니고 있는 덕분인지, 공작을 볼 때면 무겁던 마음도 잠시나마 가벼워졌다. 나는 그가 살아난 것이 기뻤다. ‘공작이 살았으니 됐다.’며 손을 잊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괴물이 도끼에 바른 독 때문일 텐데, 내 부상에 힘을 썼을 신관은 내가 완전히 회복될지 어떨지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이들이고, 신관의 치료 이후의 치료와 재활 등을 맡은 의사는 판단을 보류했다.

그러나 글쎄. 내 느낌으로는 곧 회복할 것 같았다. 설령 회복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양 손 모두 그러는 것도 아니고, 오른손만 그런 거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침을 주로 맞은 어깨가 오른 어깨고, 맞은 옆구리 또한 오른 쪽이라서 시너지효과를 낸 모양이었다.

누가 나를 죽이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그냥 예뻐 죽겠네…….

그 침이라도 맞지 않았다면 손이 안 이랬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

나는 서재에 앉아 2층의 책꽂이를 멍하게 올려다보다 작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일어난 지 만 사흘 정도 되었나. 공작의 명령과 쥰의 염려를 뿌리칠 수가 없어 아직은 방에 콕 박혀 있지만, 며칠 내로 외출할 생각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알드리히를 만나는 일. 내일 즈음해서 미리 서신을 보내두어야 하리.

공작이 되기로 한 이상 알드리히를 외면할 수는 없다. 그를 수년간 피해 다니려 했던 것도 어디까지나 일개 영애로 남아 있으려 할 때의 일이지. 그는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이고, 나는 귀족 중에서도 최고위 귀족, 대 귀족에 속할 사람이 되었다.

이 침을 맞고도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성이 있는 독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수면처럼 보이는 실신과 시력이 흔들리는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지. 그리고 그 침을 보냈을 지도 모를 알드리히.

나의 호흡이 살짝 더뎌졌다. 황태자.

나를 죽이고자 했던 이가 실로 알드리히라면, 내가 이 침에 대하여 물으면 자충수가 될 것이요, 죽이고자 했던 이가 알드리히가 아니라면.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음. 알드리히가 아니라면…….

“…….”

……무어 길게 생각할 것이 있나. 나는 코를 울리며 짧게 웃었다. 그가 아니라면 다행한 일이다. 알드리히의 심기를 무진장 더럽힐 확률이 몹시 높긴 하지만.

아, 그 미친놈이 적으로 돌려지면 참 끔찍한데.

나는 책상 위로 두 다리를 올리고 의자를 까닥였다.

여기로 오는 걸음이 들리긴 하지만, 날 데리러 온 시녀나 기사일 터. 쥰이 오기까지는 몇 시간 남아있었다. 이미 가출이다 끌려오다 뭐다 해서 큰누이로서의 위엄을 참 많이 깎아먹었으나, 이런 자세까지 보였다가는 상당히 민망할 것이다. 스스스 발목을 넘어 종아리까지 내려오던 치마는 책상과 종아리 사이에 천을 잘 끼워 넣은 덕에 더 내려오지 않고 멈추었다.

어느 정도 자세가 고정되자, 끼익, 끼익 움직이기를 부담 없이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무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황태자. 황태자라.”

정말 의미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 생각했던 게 알드리히에 관한 것이라서 그리 중얼거렸을 뿐. 실제로 내가 그를 중얼거리며 한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괴물의 독에 관하여.

“황태자……. 알드리히.”

괴물의 도끼에 발라진 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종종 사람 말을 할 정도로 지능이 높은 종도 있고, 전술을 이해할 정도로 지능이 높은 종, 무기를 만들 정도로 지능이 높은 종들도 분명히 있었다. 더 충격적인 설정은, 인간과 손을 잡고 계약을 할 정도로 높은 지능을 가진 것들도 있다는 점. 무기에 독을 바르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긴 했다. 그 독을 어디에서 구했는지가 문제일 뿐.

자연에서 추출했을까.

혹은 사람에게서 얻어냈을까.

서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특별히 문 두드림 없이 출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니 이상할 것은 아니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고민했다. 사람에게서 얻어냈다면, 그 사람은 어째서 괴물에게 그것을 공급했나. 사실 아주 간단한 풀이가 있기야 있었다.

그를 모르는 바 아니다. 나는 자꾸 다다르려 하는 선택지 외의 다른 가정들을 찾으려 애쓰며,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알드리히…….”

그 순간 까닥거리던 내 의자는 내 뒤에 선 누군가에게 제지되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히고 그 사람을 보았다. 거꾸로다. 거꾸로 보이는데, 모를 수는 없는 얼굴. 그의 뒤에서 높은 창문을 통해 늦은 오후의 옅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날 내려다보며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부르면 내가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누이.”

============================ 작품 후기 ============================

자유연재입니다:D

(퇴고 하지 않은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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