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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꽃 작가님-32화 (32/157)

00032 CHAPTER 4. 꿈에서 =========================

-제가 당신의 생명을 거둡니다.

-예.

-원망, 하십니까.

-아니요.

-해 주십시오.

그 말에 놀란 사람은, 이번에도, 에본느뿐.

-당신을 제 손으로 거둬야 한다면, 당신과의 관계도 잃고, 그 죽음 속에서 살겠습니다.

나는 어쩌면 그가 에본느를 부를 때부터, 저런 말이 나올 것을 직감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혹은 익숙지 못한 떨림이 심장에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올리며 침을 삼켰다.

더 볼 수 있다. 나는 어차피 이 꿈에서 깨지 못해.

놀란 것처럼 눈에 힘이 들어간 에본느가 뒤늦게 그를 제지했다.

-……잠깐만.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훨씬 뚜렷해졌다.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내 죽음, 내 처형 어디에도 경의 죄는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결코 자책하지 마십시오. 결코. 난 내 죄로 죽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장갑 가죽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물었다.

-무슨 죄 말씀이십니까.

-…….

-당신 자신부터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에본느의 웃음은 살짝 일그러졌으나, 결국 돌아왔다. 웃는 걸 좋아하나. 아니, 그것보다는, 저 몸을 해서 아직도 웃을 힘이 남아있다는 게 더 기가 막힌다. 사람이 얼마나 긍정적이어야 이런 상황에도 웃어.

내 꿈의 에본느를 보면 볼수록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에본느는 마냥 악녀라서.

그러나 그녀는 웃음 이외의 것으로 이 상황에 방점을 찍었다.

-가까이로는 친구를 잘못 사귄 죄일 테고. 멀리로는, 그냥, 태어난 죄인 것 같습니다. 나 때문에 말려든 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부터가 그렇잖습니까.

-에본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아리엘을 죽인 그녀라면 그 발언을 나도 내심 지지할 테지만, 쥰과 이 남자와의 대화를 들어보면 도저히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짐작과 추측을 바탕으로 한 생각에 불과하여 이 정도 의아함으로 그쳤지만, 저 말을 들은 남자는 반응이 확실하게 있었다.

그녀를 부른 그는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이를 악물더니, 그러고도 떨려버린 입술을 움직였다.

-당신의 죄야말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있어 기뻤던 라이네 영랑은 그럼 무엇이 됩니까?

-…….

-그리고 당신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매순간 행복하였던 저를 좀, 봐 주십시오.

나는 그 말을 듣고 허리를 좀 더 세웠다. 머릿속 시스템이 고장나버린 것처럼 눈을 몇 번이고 깜박이며 침을 삼키기까지 했다.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숨이 막힐 정도로 숨을 들이켰다.

와, 아, 아, 잠깐.

-태어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그 숨결 하나하나마다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내 숨이 경련했다. 나, 나는 이런 상상 한 번도 안 했다. 미련이고 뭐고 남을 것도 없어. 그러나 시간은 흘러갔다. 상황도 이어져서 어디까지 치달았느냐 하면.

-제발 살아주십시오.

그가 운다.

창살을 부여잡고, 이 악물고, 고개를 떨어뜨려. 그 냉철하던 사람이 소리 죽여 운다.

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서, 몸을 구부리고 쪼그려 앉았다. 걷지 못하여 바닥을 기어야 하는 에본느도, 약해진 그도, 지독하게 낯설다. 개꿈. 개꿈. 개꿈. 몇 번을 되뇌고 있는데, 에본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요?

-미안.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바닥을 보고 있는 사이에 꿈이 바뀐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망연하게 그들을 보았다. 이제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눈높이가 맞았다. 이번엔 베르덴이야. 내가 사는 에본느의 삶에서는 쳐내 버린 베르덴.

에본느는 빙그레 웃으며 베르덴을 만류했다.

-당신의 누이의 일이라면 사과는 되었다 했습니다. 경의 잘못이 아니잖아.

-하지만 이건……, 하지만. 죄송합니다…….

-……경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압니다.

에본느가 한숨 서린 음성으로 말하자, 베르덴의 눈이 커졌다. 두려워하나.

내가 느낄 정도였다면 이곳에 있는 에본느는 당연히 느꼈을 것 같다.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헌데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날 구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거리낌 없이 말하고 밀어붙였을 사람이 당신이라 하는. 하여 나는 구태여 묻지 않으려 해요. 짐작하기론, 그것이 나와 관련이 있지만 구명할 수 있는 것과는 관련이 없고……, 그렇군, 아마 당신과 관련이 있을 것 같긴 합니다.

-…….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경은 가끔 보면 참 혁명적이지요. 가문을 무너뜨릴 일이라도 결국 당신이 옳다 판단한 일을 추진할 당신과, 누이가 내게 죽을 뻔했다 하는데도 내게 달려와 나를 염려한 우리의 우정을 믿습니다.

-……각하.

-내가 가는 길에 걱정 끼치지 않으려 한 게 아닙니까? 이것 봐요. 경 얼굴이 얼마나 상했는지. 안색에 검은빛이 돕니다.

-……그 몸을 하신 분이 절 염려하십니까…….

눈물을 참으며 나온 베르덴의 음성은 말라 있었다. 꾸덕꾸덕하다. 생선포처럼 되어, 한 번만 쳐도 부스러질 것 같이.

에본느는 제 몸을 힐끔 내려다보고는 후후 웃음을 터트렸다.

-나야 어차피 갈 사람이고. 경은 계속 살아갈 사람이니까.

그 순간 스쳐 지나간 에본느의 표정이 묘했으나, 베르덴이 있는 꿈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가 눈을 깜박이자, 또 꿈이 바뀌더라.

-폐하.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이.

-누이가 가는 날인데, 그럼 와야지.

쪼그려 앉아있던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누추한 옥의 바닥에 앉아 있는 알드리히는, 아마 황제가 맞을 텐데.

에본느는 더는 창살 앞에 있는 게 아니라, 창살의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안색도 훨씬 좋지 않아졌고, 그녀의 다리 하나는 자취를 감춘 채였다. 무릎이 으깨졌어도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두 다리 다 붙어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알드리히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얌전했나 봅니다.

-……예?

-그러니까 저들이 내 말을 안 듣지. 그러니까 감히 라이네 공작을 내 눈앞에서 끌어내리지. 아예 처음부터 욕설을 바가지로 들어먹더라도 폭군 행세 같은 거나 해 볼 걸 그랬습니다. 폭군은 좀 심하나. 그럼 패황 같은 거.

-……여기서 더 뭘 어쩌시려고…….

에본느가 그렇잖아도 핏기 없는 얼굴로 정색하며 질색하자, 알드리히가 픽 웃었다.

-충분히 미친놈이 아니었지요. 내 사랑하는 누이 한 명 정도는, 누이가 날 죽이려 들었다 하더라도 구해낼 수 있을 정도로 저들이 날 두려워했어야 했는데.

-황제 시해는 미수로 그쳤다 하더라도 죄인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법도 쓸모없을 만큼, 황권이 강했다면 참 좋았을 거라고 말하는 겁니다. 저 썩을 것들 좀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네요.

-그거 폭군입니다.

-그러니까 그거 했더라면 참 좋았을 거라고 방금 말했……, 누이? 괜찮습니까?

정신이 나가기 직전 불러 세운 것이 정답이었다. 방금 대답한 사람 같지 않게 점점 감기던 눈꺼풀이 다시 확 떠졌다. 그리고 보이는 눈동자에는 빛이 없었다.

아,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꿈에서도 에본느는 죽어. 기적은 없는 것이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다리를 모아 세우곤 뒷목을 쓸어내렸다. 두어 번 심호흡을 한 후 그녀의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왔다. 처참한 감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알드리히가 억지로 웃음 짓고, 말을 멈추기보다는 주제를 돌리는 것을 선택했다.

말하도록 하여 그녀가 아직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처럼.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누이가 부탁했던 이번 진통제는 좀 듣나 보네요.

-예. 좋은 약이지요.

-……그거, 독성 강하다면서요.

-예?

-설마 누가 이것을 복용하였느냐고 어의가 기함하더군.

그러자 에본느가 픽 웃었다.

그 웃는 눈이 참 흐리더라. 그 웃음을 보는 알드리히의 눈도 아주 잠시 망연해졌다가 돌아왔다. 그는 추위 속에서 입김을 내쉬는 것처럼 물기 어린 한숨을 하, 내쉬며 고개를 올리더니 천장을 보았다.

-살 마음이 조금도 없는 거구나, 하고 그 순간 알았습니다. 라이네 영랑도 누이를 못 잡고, 나도 못 잡고, 발리앙경도 못 잡고. 그리고 내 마지막 보루였던 포르타경도 못 잡았어요. 누이의 살 의지를.

-…….

-참 분하지만 포르타경이라면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

-……어째서.

-누이의 마음은, 뭐……, 그렇다 쳐요.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도, 아, 그렇네요. 그냥 둘 다 그렇다 치고. 어쩔 수가 없었어요. 사내의 본능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워낙에 무감정한 사람이라서 처음엔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

-저기 누이. 나 방금 ‘사내의 본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선 뭔가 반응 없습니까? 누이가 아무리 둔해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아니에요.

-그 말씀을 하신 덕분에 방금 깨달은 것이 있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깨달은 것?

알드리히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에본느는 없는 힘을 끌어 모은 것처럼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이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필르 발리앙이 제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폐하를 연모하느냐는 것이었지요.

아아.

목이 심히 말랐다. 나는 목을 더듬으며 침을 삼켰고, 에본느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필르 발리앙을 사랑하셨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

-제가 폐하의 마음을 일찍이 알고 폐하의 곁에서 멀어졌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

-저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폐하. 폐하의 그 감정 때문에 제가 이렇게 죽습니다.

상대를 대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한다. 마음을 숨기고 숨기며 상대를 배려하였던 조금 전과 다르게, 알드리히에게 퍽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함부로 대하는 것과 아주 다르지 않다.

아마 꿈과 꿈 사이에서 성격이 바뀔 만큼 긴 시간이 흘렀거나, 흐른 시간은 짧지만 그 사이에 저런 고신을 당하면서 마음에 분이 쌓였거나. 혹은, 약과 고신 때문에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거나 하는 탓일 것이다.

알드리히는 화내지 않았다.

에본느도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주 약간도 동요치 않은 목소리로 잔잔하게 다른 말을 하였다.

-밤이 깊었습니다. 이미 새벽이지 않습니까. 이만 침소에 드셔야지요.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 아침에 누이가 죽습니다.

-그렇지요. 하여 아침에.

-내게 바라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까? 아니, 좋아요. 내게 말고. 그냥 누구에게든. 이 기가 막힌 일들을 겪고도 바라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까?

-설마요. 있습니다.

에본느는 벽에 기대었던 머리를 돌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보이는 것은 벽뿐이겠지만, 차라리 표정이 편해졌다.

알드리히는 살려달라는 말을 바랐을까? 혹은 살고 싶다는 말을 바랐을까. 어느 쪽이 되었든 그의 말로 판단해보건대 황제의 힘으로도 에본느를 구명할 방도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그런 말을 들으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옅게 한숨 쉰 그녀는 다시금 그를 보고 대답했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누가 봐도 온당한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것에 알드리히는 무어라 반응할 것인가. 궁금하여 그를 보는데, 언제라 할 것도 없이 장소가 바뀌더라.

처형장이었다. 나는 처형장에 꿇어 앉혀져 있었다. 에본느가 아니라 내가.

……아주 그냥, 확확 바뀌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수준도 뛰어넘었다. 헛웃음을 웃고 눈을 감았다. 나는 이것이 꿈임을 알고 있다.

곧 시드니의 검에 내 목이 잘렸다.

내가 죽었다. 단번에 잘려서, 잘리고 난 직후의 한순간은 시력도 있었을 정도였다. 아프지 않더라.

에본느의 이런 삶, 일장춘몽 그 자체다.

이것은 아무 뜻 없는 꿈인 데다 악몽에 불과하고.

이 꿈에서 에본느는 공작인 것도, 그저 내가 공작이 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 결정이 꿈에 반영된 것뿐이고.

내 목이 바닥을 뒹굴며 봄꿈의 꿈이 끝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괴물의 독에 당하여 아직 일어나지 못한 에브의 꿈입니다.

다음편에 에브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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