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31화 (31/157)

00031 CHAPTER 4. 꿈에서 =========================

CHAPTER 4.

길고 어두컴컴한 공간을 걷고 걷는 꿈을 지나 나는 눈 떴다.

안타깝지만, 혹은, 조금도 안타깝지 않게도, 그곳 역시 꿈이었다. 실로 놀랍게도 그곳은 지구가 아니더라. 그런데 더 놀라운 게 무엇인지 아는가.

-누님, 저는 누님이 저와 관련하여 무엇을 감수하셨는지, 무엇을 겪으셨는지, 그것을 제게 어떻게 숨겨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

-그런데 누님께서는 숨기는 것에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절 보면 화가 끓어올라도 온당하고 절 죽이고 싶어 하셔도 그것이 온당한데, 절 동생으로 품어주셨지요. 누님. 누님이 계시기에 제가 있을 수 있어요. 제게는 누님이 전부고, 제 세상이십니다.

있던 적 없는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쥰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저를 주장하는 것을 나는 가만히 보았다. 간소한 차림을 하고 있는 ‘에본느’에 비하여 쥰은 차림이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이 상황의 기묘함을 안다.

내가 쓴 글에서 쥰과 에본느는 저런 대화를 나눌 관계가 조금도 아니고, 일말의 여지조차 없다. 저건 차라리 나와 쥰에 가까웠다. 나와 쥰의 사이에 있던 대화라면 차라리 이해가 가. 그러나 저런 대화는 나눈 적이 없으니 이는 내 기억이 아니다. 허면 미래일까. 그럴 확률이 얼마나 있나. 나는 저 상황이 미래의 일이라는 가정에도 회의적이었다.

그렇다면 내 의식 속에 깊이 박힌 희망이나 소망이거나, 아예 개꿈이거나.

-저를 놓지 마세요.

그러나 저것은 내가 들은 적이 있는 말이라 오싹 소름이 돋았다.

-누님이 계시지 않은 라이네는 제게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저를 이런 식으로 놓지 마세요.

-그만 해. 응? 그만 해.

-제발, 제발, 누님, 대신 저를 바친다 해 주십시오. 제발. 제 목숨을. 모든 혐의를 제게 넘겨주세요.

에본느가 괴로운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만류했지만, 쥰은 오히려 더 흐트러져 간구했다.

보고 있던 나는 침을 삼켰다.

하필 꾸는 개꿈이라 해도 이런 꿈을 꾸나. 에본느가 결국 죽기까지 몰린 상황인가 보다. 그에 쥰은 대신 저를 바치라고 애원하고 있고. 에본느의 말투가 묘하게 나와 비슷하고, 에본느와 쥰의 관계 역시 묘하게 우리와 비슷하여 현실감이 있었다.

하여 결론. 현실감이 있어서 더 기분 더럽다.

그러나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과는 별개로 저기의 에본느의 얼굴은 ‘차마 흐느끼지도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럴 수 없어.

-누님, 제발. 제발.

-……내가 있어 라이네가 가치 있다 했지? 쥰, 내게 라이네는 아버지였고, 나였고, 너였어. 내 어린 동생, 네 산목숨을 나 대신 내 죄를 씌워 바치면 나는 나로 있을 수 없을 거야. 너 없는 라이네는 내게 의미가 없다. 너와 같아.

에본느는 쥰의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또박또박 말했다.

쥰의 눈에서 눈물이 또 떨어졌다.

-널 진정으로 사랑한다. 넌 내 동생이야. 누가 무어라 해도 내 동생이다. 폐하께서 연좌하지 않겠다 하셨으니, 라이네를 부탁한다. 아니, 아니다. 라이네를 끝내 버려도 좋으니, 너는 반드시 살아남아 훌륭하게 있어다오. 내가 미안해.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내가 미안해. 모든 게 내 탓이다.

-무엇을요. 누님이 무엇을. 아무 것도…….

-전부.

그녀가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치맛자락이 흐르듯 내려왔다.

-전부, 미안하다.

쥰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중얼거리는 에본느의 얼굴이 마침내 발개졌다. 아, 눈물이다. 우네. 소리도 없는 그것을 들은 것처럼 쥰이 에본느를 꽉 안았다. 다시없을 남매애처럼 보인다. 나는 눈을 찌푸리면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 상황 자체는 이해가 되지만, 이 지경에 이른 사정은 모르겠다. 쥰과 에본느가 저리 사이가 좋을 정도라면 에본느도 딱히 아리엘에게 나쁜 짓을 했을 것 같지 않은데. 이 꿈은 결국, 의식 깊은 곳의 소원과, 내가 쓴 글이 이리저리 짬뽕된 발로인가.

보고 싶지 않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풀었다. 그리고 그리하며 눈을 감았다 뜨자 꿈이 바뀌었다. 깨지 않는군. 미치겠다. 이런 악몽이 없었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에본느에게 묻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기회가 있다면, 이 생, 다시 살고 싶으십니까?

-이 생, 말입니까?

나는 회색 감옥에 있었다. 에본느 역시 그랬다.

-쥰이 내 동생이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 아버지이신. 그런 생을 말하는 겁니까?

-당신이 라이네 소공녀이고, 필르 발리앙이 여전히 당신을 적대할 수도 있는 위험성을 가진 그런 생이기도 합니다.

-압니다. 내가 여전히 죽을 수도 있는 위험성을 가진 그런 생이기도 하겠지요.

끔찍한 고신을 당했는지 몸 성한 곳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무릎은 으스러져 걸을 수도 없었고,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한 쪽 눈은 인두로 지진 자국이 눈가에도 남아있었다. 그런데 가장 어이가 없던 부분은,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행색이 피나 고름 엉긴 곳 없이 깔끔했다.

알드리히와 아리엘 중 누구 취미인지는 모르겠는데, 고문 시킨 사람을 이렇게 유지시키는 건 또 무슨 막장인가.

깔끔하지 못한 곳은 얼굴, 그것도 지진 눈이 있는 쪽의 뺨뿐이었다.

이미 빛바랜 눈에서부터 흘러내려 말라붙어 있는 핏줄기는, 아무래도 씻고 나서 흐른 피처럼 보였다.

나는 저 무섭도록 고통스러운 모습을 뚫어져라 살폈다. 저 꼴을 하고서도 멀쩡히 대화하고 있으니 이것은 꿈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그저, 저 모습이 되지 않도록,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 하나를 더 단단히 마음에 다지면 되는 거고.

그러나 나의 내심에 관계없이 꿈은 계속 흘렀다. 무언가를 고심하는 것 같던 에본느가 입을 열었다.

-그 생에서, 그럼 당신은 그때 또 다시 내 친구가 되렵니까?

-……죄송합니다. 그러지 않을 겁니다.

지독히 매정한 대답이었다. 듣고 있던 내 눈썹이 올라갈 정도였다. 그럼에도 에본느는 마음이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것처럼 웃으며 반문했다.

-어째서요?

-제 증언은 제가 당신과 가깝다는 이유로 위증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당신과 멀리 지내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살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습니까.

에본느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직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도 동의합니다. 다시 살아야 한다면, 나도 당신의 친구가 되지 않을 겁니다.

-…….

-당신은 나를 비호하다 그 작위를 잃을 처지가 되었고, 이미 무릅쓴 위험 외에도 앞으로 무릅써야 할 위험이 많아졌습니다. 둘도 없는 친구란 게 이런 식으로 당신 삶을 파탄낼 관계라면, 차라리 친구가 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또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하는 납득이다.

-그렇군요. 말을 하다 보니 알겠어. 생을 다시 살게 된다면 바꾸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당신과 친구가 되지 않을 것. 하여 당신을 지킬 것. 내 가족과의 사이가 좋지 않을 것. 하여 그들을 지킬 것. 내 이 죽음에 나도 납득할 이유가 생기면 금상첨화겠지요. 죽지 않으면 더 좋겠고. 아니,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공작이 되지 않고 오드리나를 떠나서 살면 상황이 좀 나아질까.

-……하여, 다시 살고 싶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이번에는 에본느가 냉정했다. 에본느를 보는 그의 눈이 아주 조금 커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어째서 에본느가 아니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당신과 쥰에게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지쳐서, 실은, 어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삶이 참 피곤하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다시 살 생각을 하면 더 피곤해져서요.

그러자 그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아, 저것은 무너진 것이다.

-내가 쥰에게도 당부했지만, 당신도, 꼭 살아남아야 합니다. 건강하게. 멀쩡하게.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합니다. 베르덴에게도 마지막으로 안부 전해주

-필르 발리앙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여태 힘없는 음성으로도 잘 말하던 에본느가 그 말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창살을 휘감아 잡았다. 검은 장갑에 붉은 녹이 묻어나는 것이 보였다. 내가 저 사람에게서 이만큼 절박한 분위기를 느낀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꿈, 맞지?

이거 개꿈이어야 하는데. 음, 개꿈일 거야. 아무 의미 없는. 이런 장면 글에서는 안 나오고, 나올 수도 없으니까.

그가 말했다.

-어째서, 끝까지. 끝까지 홀로 안고 가십니까.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에서 흔들렸다.

-그녀를 정죄하라 명령하십시오. 명령이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부탁이라도 하십시오. 일의 전말을 말씀하시고, 제가 좀 더 능동적으로 당신을 구명할 수 있도록 부디, 말씀을 해 주십시오.

-…….

-각하.

틀렸어. 아리엘이 악녀 에본느를 몰아갈 때는 빠져나올 구석이 조금도 없도록 몰았다. 살 방도가 조금도 없다. 어차피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흉하게 상처 남은 얼굴로 빙긋 웃었다.

-어차피 떠나는 것, 남기는 것 없이 가고자 합니다. 당신에게 이 이상 더 남길 짐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면목이 있어야지요. 난 안 미쳤습니다.

-짐이 아닙니다.

-짐이 맞습니다. 아주 무거운.

에본느는 단호하게 말한 뒤 하나 남은 팔을 올렸다. 창살을 잡은 그의 손 위에 그녀의 마른 손이 겹쳐졌다.

-폐하께서 당신을 집행인으로 하셨다지요.

-…….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까맣게 죽어가는구나. 저런 눈이야말로 그런 표현에 걸맞은 눈이다. 죽어가고 있었다.

저 상황에서 결국엔 제3자에 불과한 나조차 마음이 격동하는데, 에본느의 얼굴에 걸린 것은 쓴웃음뿐이다. 그녀의 색 없는 입술이 달싹였다.

-끝의 끝까지 나쁜 기억 남기게 되어 미안할 따름입니다.

말을 끝마치고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아마 그도 보았으리라.

그는 에본느의 손 밑에 있던 제 손을 빼어 그녀를 감쌌다. 혹은, 그녀를 쥐었다. 손 크기의 차가 상당하였는지, 에본느의 손이 거의 다 덮였다.

그는 그리고 눈에 그녀를 담고 담다가, 웃음기 한 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야말로.

-예?

-저야말로 당신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죄송합니다.

나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마 에본느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그리 말했다. 나는 깊게 한숨을 풀었다. 꿈 한 번 자세하게도 꾼다. 이 설정으로 글을 썼어도 될 뻔 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아리엘이 아니라 에본느가 주인공에 가까워졌을 테고, 지구에서의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을 테지. 썼어도 될 만한 설정이지만 그때 이 꿈을 꿨다 하더라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리엘을 원했다.

그녀가 주인공이기를.

저리 순순하게 웃고 있는 에본느가 아니라, 아리엘을.

한 번 악녀로 정하고 나서 그런지 에본느에게 정이 안 갔던 것 같다. 아리엘을 선하게 만드는 데 힘쓰고, 에본느를 악하게 만드는 데 힘쓰다보니 처음엔 두 사람의 캐릭터가 극과 극이었다. 초고가 그렇고 퇴고한 후에는 바뀌었다는 말이 아니다. 이야기 초반, 이야기의 처음에 그러했다. 아리엘이 에본느에게 복수하는 것을 쓰다 보니 후반부에는 아리엘도 상당히 성격 나빠졌더랬다.

아리엘의 쌍둥이는 제 세상에 거의 아리엘 밖에 없는 것처럼 아리엘을 예뻐하였고. 아리엘을 몹시 사랑하는 황태자……, 그러니까, 에본느 죽기 전에 황제가 된 알드리히와 공작 된 쥰이 아리엘의 복수를 돕고. 헤르조는 대놓고 아리엘을 지켰었지. 베르덴은 주요 인물은 아니라 몇 번 나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리엘을 비호하고. 시드니 역시 주요 인물은 아니라 사랑 운운하는 감정을 묘사한 적은 없지만 아리엘을 지키는 것처럼 표현을 했고,

그러나 단언컨대, 나는 글을 쓰는 중에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저들이 에본느와 친한 장면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에본느가 죽어 마땅한 인물임을 설득하고자 넣었던 에본느의 악행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그런 그녀에게 저들이 조금이라도 호의를 내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이 꿈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개꿈이라 결론을 내린 것처럼 하려 했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거리끼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미련이다. 어리석다 하는 미련이 아니라, 남았다 하는 미련.

저들이 에본느를, 아니, 아니다. 장차 올 아리엘의 복수에서 나를 비호해준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남은 미련.

하여 이 꿈이 내 미련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면, 내 마음 깊숙한 곳엔 그러한 미련이 남아있을 터. 여태 몰랐던 것을 꿈 덕분에 짐작하게 된 것 같다. 나는 엄지 뿌리로 눈 밑을 문질렀다. 땀도 없고, 눈물도 없었다, 물론.

에본느가 물었다.

-내 뜻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그것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도록 그녀를 바라보더니 가만히 입을 달싹였다.

-각하.

-예.

-……에본느.

덤덤한 부름처럼 들리나, 내 가슴은 어째서인지 저몄다. 여기서 웃는 사람은 에본느 뿐이다.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미소하며 대답했다.

-예.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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