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CHAPTER 3. 이기심을 위한 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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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며 겪은 일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사실 몇 개 있다.
그러나 역시 무엇보다도 시드니는 내가 전투가능자라는 것에 그리 놀란 것 같지 않아 보였다는 것의 내막이 가장 궁금했다. 그가 본디 표정을 잘 짓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리 보였던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놀라지 않은 건지.
우리가 자란 이후 어울린 횟수가 극도로 적어졌음을 생각해보면 기묘하긴 하지만, 나는 그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읽어낸다는 것은 어쩌면, ‘나는 작가이며 너는 그 글에 나오는 글자이니 나는 그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정말.
“음…….”
그는 놀란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드니를 생각할 때가 아니지.
나는 결국 나를 찾아낸 이들이 기절한 사이에 서서 손의 양면을 살폈다. 시드니의 말이 맞다. 이 손으로는 싸우기 어려웠다. 죄 기절시키긴 했지만,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욕봤다. 하산하는데 텔레포트를 쓴 건 좋았지만, 공작이 도착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문제였고, 손이 어느 정도 쓸 수 있는지 괴물들을 상대로 미리 알아두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자주 멍청해진다……. 나는 기절한 이의 옷을 뒤지며 중얼거렸다.
“……황태자만 아니었어도.”
아무리 뒤지고 뒤져도 알드리히가 보냈다는 표식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찾을 수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으리라.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이들은 단 한 번도 내게 귀경을 종용하지 않았다. 무작정 침을 던지고, 나를 몰아갔다. 이쯤 되면 알드리히가 나를 무조건 기절시켜 데려오라 명령했는지 궁금하게 되지. 나는 그의 멱살을 잡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놈이 황태자만 아니었어도. 그놈이 아리엘이 사랑하는 사람만 아니었어도.
그들이 가진 침으로 그들을 일단 찌르고 나머지는 내가 챙겼다. 무엇이 중요한 것이 될지 모르니까.
나는 그들을 떠나 첫째 산의 입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쫓기느라 또 산을 타버려서.
에본느가 쥰의 생일에서 쥰에게 완전히 버려지는 해의 9월, 가을. 그 해 따라 늦게 토벌이 시작되고, 토벌 중이던 9월의 마지막 주 어느 날에 공작은 살해당한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살리려 하고.
이십 분 정도 내려가자 슬슬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평지를 보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공작이 되겠다고 결정한 후, 공작을 살리려 하는 이 모습을 봐. 중요한 갈림길에서 글과 다른 길을 선택하였으니, 공작도 살리겠다고 하는 이 꼴을 봐. ……그런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그저 공작을 죽도록 내버려 두었을 이 못난 나를 봐.
오로지 내가 살겠다는 일념 하에 일들을 바꾸어 가는, 나를, 좀 봐.
한심해서 비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하루 남았는데…….”
평지를 밟고 나서도 수십 미터 좀 더 걸어가다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이즈음에서 쓰러질 것 같다. 시신이 누워있기에 적당한 곳처럼 느껴졌다.
이 글을 쓴 사람의 감일까. 이 정도로 능력이 있는 거라면, 아리엘의 적의도 처음부터 없앨 수는 없었나. 뭐, 물론 다른 곳에서 공격을 받는다면 내 감이고 뭐고 계획이 전부 날아가 버리겠지만.
“……언제 오시려나.”
몸을 틀어 괴물이 내려올 산길을 올려다보다 주저앉았다. 공작과 괴물이 만나는 일이 없도록 여기에서 원천 차단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텐데.
시드니를 만난 날로부터 이미 열흘을 이 주변에서 노숙했다. 날 쫓는 자들이 나를 찾아내기 쉬워질 것을 알면서도, 그리하여 끝내 쫓기고 쫓아내기를 두 번 반복하면서도,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은 아예 수면이든 마비든 뭔가를 시켜놓았으니 최소 하루 정도는 날 방해할 일은 없을 것이다.
2주 정도를 이 산맥과 관련하여 긴장하고 있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어서 끝내고 오드리나로 가서 며칠 푹 자고 싶다. 두 무릎을 끌어안고 침울하게 입을 비죽였다.
난 도대체 뭘 쓴 건가.
쓸 당시에야 착한 아리엘과 나쁜 에본느에게서 권선징악 어쩌고 하는 주제를 얻어내서 썼지만, 역시 직접 당하고 있으면 마음이 휙휙 바뀌는 법이다.
“…….”
무릎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고 있는데, 묘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괴물의 살기 같지는 않은데. 쫓는 자들에겐 침을 꽂아두었고. 사람의 시선 비슷한 것 같은데, 정확한 것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혹 이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 하면, 이 사람은 나보다 육체적으로 강하다.
곧바로 털고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내가 마법을 쓰기가 요원해진다. 뒷목의 솜털이 비쭉비쭉 서며 정수리부터 등허리까지가 싸늘해졌다. 그 자리에 서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세밀하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찾아냈다.
기실, 나타났다고 봐야겠다.
내가 있는 쪽으로 쿵쿵 뛰어 내려오는 괴물들이 보였으니까. 이 소름끼치는 감각은 저것들이었나. 나는 다문 입 꼬리에 힘을 주어 끌어올렸다. 웃는 것처럼 호를 그리며 얇아지던 입술 사이로 이가 드러나는 느낌도 생생했다.
그러니까, 저것‘들’이라는 것이다.
하나가 아니었어.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하나는 막겠지만. 다섯이 나를 지나쳐갈 것이다. 나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말발굽 소리. 마차의 바퀴가 땅을 거치는 소리.
“빌어먹을.”
마차, 마차였구나. 총 여섯 체에 마차. 그래서 공작이 죽었어. 나는 공작의 죽음을 빠르게 이해했다.
원천 봉쇄를 해야 한다. 결정 했으니 움직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괴물들에게 마법으로 독물들을 날렸다. 공작 일행이 여기까지 다다르기 전에 마법을 끝내야 했다.
내가 미련했던 점은, 괴물들이 반드시 인간이 다니는 길을 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망각했던 점이다.
사람 다니는 일이라고는 토벌을 제외하곤 그다지 없어서 길 다운 길도 없는 이 험난한 산에, 그나마 길처럼 보이는 게 있는 건 토벌을 하며 주로 지나다닌 곳이 있는 덕분이었다. 그 길이 사람에게 편하니 괴물들도 그리할 거라 생각했다. 내가, 참 미련해서.
“…….”
순식간에 다섯을 죽이고 공작의 마차가 오는 곳으로 달려가던 발이 느려졌다.
마차는 이제 막 멈추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를 거치지 않고 마차를 향해 달려가는 괴물들이 일곱 마리.
내 숨이 멈췄다. 침착해야 한다는 다짐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야 해. 나는 이것을 막지 못하면 또 죽도록 후회할 거야.
움직여, 다리야.
내가 직접적으로 공격받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헤르조가 공격받을 때도 이러진 않았고. 저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차갑고 저렸다. 얼어버린 장작처럼 서 있던 숨이 파삭 터진 건, 결국 이성이 아니라 몸의 공포가 나를 이끈 덕분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떨리는 다리로 달렸다. 문이 열린 뒤 공작이 마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뱃속 깊은 곳에 힘이 들어섰다. 혀를 터치고 나온 것은 미친 것 같은 부름. 아버지.
아버지.
달려가며 울부짖듯 외쳤다.
“막아! 막아, 경-!!”
누구라도 좋으니 막아.
그리고 나는, 나는, 공작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를 안고 땅을 구르는데, 옆구리가 불이 나는 듯 뜨거워지더라. 헉 숨을 들이켜고 이를 악물었다. 물을 안위는 내 것이 아니라 공작의 것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그래. 에본느, 괜찮은 것이냐?”
안 괜찮다. 공작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팔에 힘을 주었다. 나는 그 상태로 빠르게 다리를 들어 올려 뒤의 괴물을 돌려 차서 걷어내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압박에 숨을 멈춘 공작의 허리에서 검을 빼내며 일어났다. 내 몸의 무게를 전부 실었다시피 하였으니 괴로울 게 당연하다.
움직임 탓에 더 벌어진 옆구리에서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에본느!”
아, 뜨겁다. 차마 부상을 손으로 덮을 수는 없어서, 상처 위의 멀쩡한 살에 손을 대고 오른 어금니를 악물었다. 제길. 그러나 상황은 아무 것도 완료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누워있는 공작의 앞에 서서 괴물을 마주보았다. 피 묻은 도끼날이 다시 내려쳐지고 있는데, 피할 수는 없었다. 내 뒤엔 공작이 있다. 피할 생각도 없고, 진실로 다른 방법이 없어 내가 죽을 지도 모를 ‘진짜 비상시’였다 하더라도 과연 피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깡!
“아윽.”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한 손으로 도끼를 막아낼 수는 없어서 두 손을 썼더니, 상처가 이제는 인두로 지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래도, 해야 한다.
나는 오른 팔에 특히 힘을 집중한 뒤 괴물을 밀어내듯 베어 내렸다. 도끼에서 검날이 기기긱 미끄러져 내려갔다. 됐다. 괴물과 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오른 팔을 왼 어깨까지 끌어 올리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거의 내려치다시피 하며 횡으로 긋자, 사자 머리를 한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복부만 잘렸지만 괴물이 비틀거리는 사이 내장이 그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주저앉으려 하는 그것의 턱 아래에 검을 찔러 넣었다. 다시 일어선 것처럼 일순 들어 올라갔으나, 내 힘이 지금 온전치 않았다. 나는 그 무거운 시체가 땅으로 무너질 때, 검을 뽑았다. 피가 솟구쳤다. 상처에 피가 섞이는 것을 원치 않아 몸을 틀고, 내게 덤벼드는 다음 괴물을 향해 검을 들고자 하였다.
공작이 뒤에서 나를 안다시피 하며 내 왼 어깨를 잡은 건 바로 그때였다. 공작이 말했다.
“물러서라.”
“…….”
입을 열면 멀쩡한 대답도 멀쩡한 부름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계속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려 노력하며 고개를 저었다. 반쯤은 경련이었다. 공작은 검을 잡은 내 손 위에 그의 손을 겹쳐 올리는가 싶더니, 내게서 검을 잡아 뺐다.
그리고 날 괴물과 그의 사이에서 빼내어 당신 뒤로 보내며 말했다.
“괜찮을 거다. 어서 끝내고 돌아가자.”
“전…….”
“조금만 참으면 된다. 알겠느냐? 정신 잃지 말고.”
이곳에서 죽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숨이 아니라 당신 숨이라고, 내가 아는 미래가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가물가물 숨지려하는 정신을 챙기며 입을 다물었다. 공작과 함께 온 기사 중 한 명이 나를 감쌌다.
그때부터 공작과 다른 기사들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괴물들과 격돌하였다.
한 몸 능히 지킬 수 있는 저 사람을 죽였던 내 글은, 공작이 어째서, 어떻게 죽었는지 소상히 쓰지 않았다. 괴물을 만나서 괴물에게 죽었다는 설명뿐이었던 걸 기억한다.
기사에게 부축을 받아 뒤로 빠지면서도 몇 번이고 그 전투를 돌아보다, 나는 결국 쓰러졌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분명하게 독이다. 아, 무슨 괴물 따위가 무기에 독을 바르고 다녀. 결국 멀쩡하게는 못 돌아가는구나. 가서 기회가 되면 알드리히에게 항의를 하고 말 테다. 쫓는 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그렇게 약 바른 침 같은 것으로 사람을 기절시키려 하냐고.
피가 아니더라도 시퍼렇게 물들어가는 살을 보고 기사가 경악하는 소리가 무어라무어라 들렸다. 아, 미안, 어지러워서 잘 안 들려.
나는 없는 정신으로 간절하게 그에게 내 할 말만 중얼거렸다.
“가서, 아버지를. 아버지를…….”
공작을 구해요.
죽을 사람을 구해냈으니 내가 대신 죽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죽지 않으려 몸부림을 쳐야겠지만. 나는 공작 대신 죽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 그를 구하기 위하여 왔을 뿐.
아리엘에게서 죽음을 피해 도망치려던 것도 돌려서, 정면으로 맞서보려고 했는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전부터 생각해 온 건데, 의지로도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중독되고도 정신 차리고 있는 것이더라.
공작이 이곳에서 살아남아 돌아가는 것을 봐야 하는데.
의식을 잃으면 안 되는데.
눈, 감으면 안 되는데…….
============================ 작품 후기 ============================
이번 가출의 가장 큰 이유.
수정하지 않은 초고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D
다음편은 새 챕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