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29화 (29/157)

00029 CHAPTER 3. 이기심을 위한 선 =========================

……너무 소란을 피웠나.

나도 조금 머쓱해졌다. 그리고 이내 고통을 갈무리한 숄랑의 팔에 목을 휘감겼다. 다 죽어가는 신음을 내며 탁탁 팔을 내리쳤는데도 용서가 없다. 그런데 그가 내 후드 위에서 이렇게 물었다.

“갈 거냐?”

돌덩이 같던 팔이 조금 느슨해졌다.

나와 이 용병단이든, 나와 헤르조와 이 용병단이든, 바르게 인사하고 헤어진 적이 처음 밖에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훌쩍 만났다가 훌쩍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관계였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대답했다.

“응.”

“언제.”

“지금.”

“끝까지 살아서 갈 수는 있고?”

“둘 다 살아서 돌아가려 하는데. 못할 것 같아?”

“너, 그냥 미친 프렌드실드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사연 있는 놈이었구나.”

사정이 있음을 넌지시 말하자, 숄랑은 의외로 잘 때려 맞추었다. 그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절대 아니야. 그냥 이 자식이 말한 마지막 문장에 한 마디가 더 많아서 나도 속이 꼬인 것뿐이야.

숄랑의 팔이 완전히 풀리자, 나는 혀를 차고 차림을 정돈했다.

“그럼 난 간다.”

“잘 가라. 다음엔 진짜 술 사고.”

마지막으로 한 판 붙을까 하는 유혹에 일순 휩싸였으나, 음, 그래도 머문 자리 아름답게……. 나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런 나를 분명 보았을 텐데도 용병들에게선 한 마디 인사도 외쳐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기사들을 헤쳐 지나가고, 이제 병사들만 지나가면 되는데,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았다.

뒤돌아보니 기사더라. 무슨 일인지 몰라 멀뚱하게 보다 뒤늦게 후드로 눈을 가렸는데, 아까 내 손의 치료를 지켜보았던 그 기사가 입을 열었다.

“혼자 내려가는 것은 위험하네.”

“아.”

이 정도 되면 참 굉장히 상냥한 기사다. 그렇지 않아도 공손해야 할 상대이지만, 내 마음도 사르르 풀려 사탕 얹은 혀처럼 달콤하게 답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염려 감사합니다. 사정이 있어 가 보아야 합니다.”

기사에게 공손하게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더 잡지 않았다. 이 역시 당연한 일이라 타박타박 병사들을 피해서 내려가는데, 의외로 2차 장애물이 있었다. 거짓말처럼 내 앞에 선 사람. 나를 앞서기 위하여 달리는 소리 같은 것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병사 무리의 끝에 있었던 것처럼 그는 나를 막아섰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이건 또 뭐야.

기사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남자는 잠시 후 무뚝뚝하게 내게 물었다.

“어딜 가나.”

아니, 이건 질문이라기보다는,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중에 다른 용건을 위하여 말문을 연 것이다. 나는 약간 신기한 기분이 되어 소리 없이 입 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이곳에서 눈 뜬 뒤 단 한 번도 이 사람에게서 이런 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참 신기하고 재밌는데, 질문의 내용이 재미없다.

왜 일개 용병으로 추정되는 평민을 굳이 기사단장이 와서 잡는지는 모르겠고.

나는 목소리를 바꾸려 노력하며, 목에서 힘을 뺐다. 잘못 분 피리처럼 새는 소리를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체통이나 체면 같은 것은 포기해야 하지만.

“하산합니다.”

“불가하다.”

그는 딱 잘라 답했으나, 내 의견을 조금도 들어주지 않겠다며 내리 누르는 권위 같은 것은 이상할 정도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호의적이기 때문에 그리 느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나는 하산해야 한다. 소리 없이 숨을 훅 들이켰다. 이미 체면은 포기했다! 다른 이들도 다 듣도록 소리를 크게 키우고 곡하듯 외쳤다.

“아이고오, 저는 용병이 아닙니다요! 죄송합니다, 기사 나리. 집에 병으로 편찮으셔서 홀로 거동이 어려운 모친이 계십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습니다. 저는 가야 합니다요!”

보통 평민 여자들이 기사들을 대할 때 이런 식으로 말하던가, 하는 의문이 뒤늦게 떠오르긴 했다. 이건 남자들 말투였던 것 같은데…….

내 등 뒤에서 병사들이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걸 보니 남자 말투가 맞는 모양이다. 십 년 전부터 여행을 다니면서도 용병들과 주로 지내다보니, 아직도 평민의 언행에는 완전히 적응을 하지 못했다. 지구에서 지낼 때와 비슷한 생활상인데도 그러니, 종종 웃길 때도 있었다.

나 스스로도 웃기고, 저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도 웃으며 재미있어 하고 지나가고.

그러니 시드니도 부디 그렇게 넘어가주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더라.

“안 됩니다.”

목소리는 거의 그대로였으나 어조와 어투가 많이 바뀌어서. 잠시, 아주 잠시, 그의 말의 문제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러니까, 이 사람이 무어라 했더라.

나는 천천히 눈을 들어 그의 턱 즈음을 보았다. 방금…….

……방금, 뭐라고.

-안 됩니다.

“토벌하며 지나오긴 했으나, 그래도 홀로 하산하실 길은 아닙니다.”

“…….”

……아, 잠깐. 나 지금, 어떤 예감이 드는데.

“동행한다 하여 결코 안전하지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비상시 제가 당신을 지킬 수는 있습니다.”

내 다문 입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시드니는 내게서 무슨 대답을 바랐던 것은 아닌지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는 걸 내가 잡았다. 그의 팔을 잡아채자, 그는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우리 닿은 그 팔과 손을 보며 물었다.

“제가 누굽니까.”

“…….”

“경. 제가 누구고, 누구인지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고개를 더욱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얽힌 시선에 누구 한 명 흔들리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던 시드니는 내가 그의 팔을 잡은 쪽을 보더니, 눈을 깊이 감았다 떴다.

“……습관이 있습니다.”

“습관, 이요?”

내가 싸우는 것을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습관으로 나를 분별해낼 수 있다는 말 자체에는 수긍하겠지만, 그가 내 싸울 때의 습관 같은 것을 알 리가 없는데……?

설마 생활 습관이 싸울 때 들어갔나. 아니, 아니지. 잠깐만. 생활 습관이 싸울 때 위화감 없이 들어간다는 건, 내 평소 생활이 참 전투적이라는 말 같은…….

미묘한 기분에 표정이 복잡해지려 하는데, 시드니가 덧붙였다.

“사소하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내 손을 풀기 위함인지 그의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장갑이 약간 거칠었다. 어지간히 오래 된 장갑인 모양이었다. 그 손이 나에게 닿자마자 손아귀에 힘을 주고 그를 더 꽉 잡자, 시드니는 멈칫했다.

장갑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가 마음의 짐이 조금도 없이 안전하게 토벌작전을 끝마치고 오기를 바랐다. 라이네 소공녀가 부득부득 우겨 홀로 킨들 라이네 산맥을 탔다는 것은 그에게 큰 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기사단장의 책임감이다. 작전대장의 책임감. 지인으로서 최소한의 애정.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경이 막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 유일하게 내려가려 하고 있으니 경이 골머리 썩힐 것은 짐작이 가지만, 죄송해요. 토벌을 따라가면 귀경이 지나치게 늦어집니다.”

“…….”

“경이 말씀하시는 게 무슨 습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투에 관한 거라면, 경도 제가 어찌 싸우는지 보지 않으셨나요?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 손으로는 무기를…….”

그는 반박조차 신중하고 느렸으나, 그런 신중한 반박마저도 도중에 끊어버렸다.

아, 나는 이러하여 그가 좋으나, 동시에 이러하여 그와 우정을 나누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여기에 계속해 남아야 한다면 이만한 지인도 없을 것이며,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면 이만큼 마음 아프게 할 지인도 없을 것이다.

기실 내 주관으로는 나는 헤르조보다 시드니와 더 잘 맞는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시드니는 점점 멀어졌고, 나 역시 그를 굳이 잡지 않았다. 동족혐오 따위가 아니라, 모르겠다. 잡지 않는 편이 더 좋으리라는 ‘기분’ 혹은 ‘느낌’ 같은 것이었던 것 같다.

전에도 생각했듯, 시드니는 그가 허락한다면 깊은 우정을 나누기 좋은 사람이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고, 나도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른 침을 삼키고 입을 열려 하는데, 시드니가 먼저 물었다.

“부득불 내려가려 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말씀드렸듯, 귀경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에요.”

“그 이유뿐입니까.”

나는 멈칫 눈을 찌푸렸다가 되돌렸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경께서 절 불안하게 만드시고 계세요. 오드리나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혹시?”

“아닙니다. 당신의 주장이 상당히 강경하게 느껴져 여쭈었을 뿐입니다.”

그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뒤쪽, 이제는 내가 병사들과 마주 보고 있는 고로 내 눈 닿는 곳에서 그를 부르는 외침이 났다. “단장님!” 그렇지. 시드니는 가야할 시간.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 나는 그를 납득시켰나.

의문이지만, 그를 놓았다. 시드니는 되돌아가는 팔을 보고 다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묻더라.

“가셔야겠습니까.”

“예.”

“……거짓 없이, 꾸밈없이 답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필르 라이네, 조금도 다치지 않고, 하산하실 수 있겠습니까.”

거짓을 말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다문 입으로 웃었다. 충분히 답이 될 수 있는 웃음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가 이것이 답이라 여기고 넘어가주길 바랐다.

시드니는 잠시 내 웃음을 보나 싶더니, 눈을 감았다 떴다. 단정한 이목구비에서 마른 감정이 느껴졌다.

“……마법사가 있다면 텔레포트라도 요청하겠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기어이 하산해야겠다면 약조를 하시고, 그리고 그 약조를 부디 지켜주십시오.”

아. 참 적절한 타이밍에 나온 말이 아닌가. 마법사가 없었구나. 그렇다면 약속할 수 있다. 나는 벌쭉 웃었다.

“약속할게요. 이 몸, 이 상태 그대로 하산할 겁니다.”

“…….”

시드니는 그 순간 웃는 것도 같았고, 찌푸린 것도 같았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른 시선을 잊지 않은 것처럼 그는 약식으로 인사했다.

“오드리나에서 부디 건강하게 다시 뵙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에 나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경이야말로. 건강히, 무사히 돌아오세요. 무운을 빕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그에게서 뒤돌아, 가던 길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다 내 정체를 눈치 챈 시드니 앞에서 보인 추태가 기어이 떠오르고 말았다. 중2병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지 불과 수개월인데, 이제는 밤에 이불 찰 거리가 진정 무언지 깨달았다는 뜻이다. 내가 뭐랬더라. ‘아이고오, 저는 용병이 아닙니다요!’랑, 집에 병으로 편찮으신 모친이 계신다고……. 그리고 ‘저는 가야 합니다요!’

“…….”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히. 히. 후.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 뜨거워지고, 양 입 꼬리가 축 내려갔다. 시드니가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글이라는 흑역사는 진정한 흑역사가 아니었어……!

나는 결국 하산 중에 어느 땅에 주저앉아 끙끙 앓았다.

============================ 작품 후기 ============================

루루롱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선추코 감사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D

날이 덥지만, 부디 기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퇴고 거치지 않은 초고입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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