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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꽃 작가님-28화 (28/157)

00028 CHAPTER 3. 이기심을 위한 선 =========================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숄랑이 투덜거렸다.

이제 고통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덕에 나는 마음 놓고 싱글벙글 웃을 수 있었다. 이들 용병단이 서로 다치면 얼마나 알뜰살뜰하게 걱정을 하는지 본 적이 몇 번 있다. 나도 그 걱정을 받고 있다는 게 참. 춤추듯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날 치료하고 있던 모리스에게 한 소리 듣고 멈추었다.

그리고 용병단 중 몇몇은 쉬고, 몇몇은 내 주위에 있는 와중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기사들과 무언가 대화를 하고 있는 윌리엄과 케니스 쪽을 보았다. 용병들과 다르게 기사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시신도 한 곳으로 모아두어야 하고, 부상당한 라이네의 기사와 병사들을 챙기기도 해야 하고. 그리 명령을 내린 시드니는……. 나는 애매하게 웃음 짓고 다시 내 팔을 보았다.

윌리엄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시드니였다.

그는 내가 이 자리에서 가장 피해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앞으로 삼십 분 안으로 헤어질 사람이기도 하니, 그 정도만 조심하면 되니까. 나는 시드니를 머릿속에서 떨쳐내 버리고 말을 돌렸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여태 묻지 못했던 바. 이들이 나를 걱정해 주는 것처럼, 나 역시 그들을 걱정했다.

“그런데 나 아까, 누구 비명 들었는데?”

“어?”

모리스가 갸웃했다. 전투 중에 비명이든 외침이든 왁왁 지르고 다닌 사람이 한두 사람인가 싶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강조했다.

“비명. 용병들 중 누군데. 분명. 어디 다친 것 같았어.”

“아……, 그거, 뭔지 알겠다. 막심 형님일 걸요? 괴물이 형님한테 토했거든요.”

“풉.”

일제히 터졌다.

모두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처음 듣는 소리에 참지 못하고 낄낄 웃었다. 시드니가 있는 걸 깨닫고 곧바로 줄이기야 했다, 물론. 한쪽에서 옷을 벗고 상체를 드러내고 있던 막심이 삿대질하며 벌떡 일어났다.

“웃어? 웃어?! 야, 인마들아!”

“토, 토했대……! 크하하!”

“야, 야, 야! 으아악, 이 자식 머리에! 덩어리! 덩어리!”

“으아아악!”

“아, 야! 오지 마!”

막심은 아직도 구토물이 묻어있는 머리를 무기로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모두 일어나 흩어졌다. 안전한 사람은 나와, 나를 치료하고 있는 모리스뿐이었다. 싱글싱글 웃으며 이 난장판을 바라보고 있자니, 곧 치료가 끝났다. 그러나 저 난장판에서 더럽혀지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모리스도 마찬가지라서, 모리스는 치료가 아직 덜 끝난 척 손을 움직였다. 나도 말리지 않았다.

윌리엄이 이야기를 끝내고 오자마자 줄줄이 한 대씩 쥐어 박혔지만. 윌리엄도 차마 막심의 머리는 손댈 수 없었는지, 머뭇거리다 넘어갔다. 그건 차별이라고 아무도 주장하지 못했다.

그런데 케니스는?

뒤늦게 떠오른 의문에 눈을 깜박이는데, 이마를 문지르던 숄랑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 단장. 케니스는? 아, 저기 오네.”

과연 그랬다.

케니스와, 기사단의 갑을 입은 기사 두 명. 그런데 그들은 나를 향해 왔다. 심지어 전혀 모르는 사람 한 명은 내 앞에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기까지 하더라.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신관입니다.”

조금도 온화하게 생기지 않은 데다, 갑주로 무장을 했는데, 밝힌 정체는 신관이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

이것이 갑자기 웬 친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지금 많은 걸 경계해야 하는 상태였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자, 신관이라 한 남자의 표정이 약간 슬프게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이 승강이를 보고 있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우리 단장님께서 베푸시는 걸세. 괜찮으니 시료, 받게.”

……시드니가.

그럼, 그렇다면, 이 신관이 알드리히의 밀명을 받아 온 그런 건 아니겠지. 아마. 나는 아주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 붕대를 풀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신관과 기사가 시선을 나누더라. 그러나 그뿐이었다. 신관은 두 손을 내 손 위 허공에 두고 신성한 힘을 부었다. 따스한 느낌의 초록빛이 내 손을 한참 감싸고 있다 사라졌다.

아직 끊어지지 않은 근육과 선홍색 내부 조직, 손등 아래의 땅바닥마저 보였던 구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물론 신관의 치료는 완벽하지 않으니 한동안 조심하며 재활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나는 곧바로 두 손을 모아 이 신관을 위하여 기도했다. 신관의 신력은 각각이 받는 기도가 모여 발휘된다. 해서 많은 신관들이 그 신력의 강화를 위하여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그들의 기도를 받곤 하지만, 기사들을 위하여 일하는 신관들은 보통 귀족 출신인지라, 많은 귀족들은 귀족 출신의 신관만이 저희를 치료할 수 있도록 했다. 하여 귀족 출신 신관 당사자가 평민 치료하기를 원하여도 주변 시선이 그들을 제한했다.

작금의 경우, 다른 때 같으면 기사들이 신관의 행보를 제한했으리라.

시드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치료 받지 못했겠지. 그러나 이 신관에게도 분명 감사하다. 나는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했고, 기도가 끝났을 때 신관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자매님.”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치료, 감사합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이상할 정도로 신관들은 내 기도를 좋아하더라.

신관과 기사의 뒷모습에 눈길을 주다 머쓱해져서 폭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들이 시드니에게 도착할 무렵 용병들의 대화로 주의를 돌렸다.

“오드리나의 기사단은 우리가 있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몰라?”

“라이네 기사들의 체면을 지켜줘야 해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긴 했지만, 분위기가 그랬어. 나중에 우리 없을 때 죽도록 깨지지 않을까?”

윌리엄의 설명에 케니스가 덧붙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대로 내려갔다가는 용병들이 괴물들과 함께 사이에 끼게 될 것을 알자마자 기사들을 두 무리로 나눴을 지도 모르지. 시드니는 말이 많지 않고 혀를 삼가는 진중한 사람이라 일견 융통성 없는 완고한 청년인 것 같지만, 실은 꽤 융통성이 있는 냉철한 사람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박힌 기사이기도 하고. 그는 라이네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지는 않겠지만, 선 안에서 라이네 기사들을 죽도록 깰 것이다.

나 같으면 그냥 라이네 공작한테 이를 텐데.

그러나 그건 내가 단지 소공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미 포르타의 후계자인데다가 기사단장까지 맡고 있는 시드니는 불가한 선택지.

막심이 무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조용히 물었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그래.”

괜찮은 사람이고말고. 뒤통수 칠 사람은 아니다. 내가 그리 묘사해서 알아.

나는 당초 계획했던 대로 곧 떠나기로 했다. 여기 있을수록 들킬 확률이 높아진다. 시드니라면 안심이다. 용병들이 개죽음으로 몰릴 일이 없어졌지.

용병들의 대화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듣지 않도록 조심하며, 신관을 배웅하느라 일어났던 자리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치료 후 가지고 왔던 꾸러미 매듭을 끌렀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명심해야 할 당부 같은 것들이 끝나고 대화가 그럭저럭 마무리되자, 용병들은 다시 짧은 휴식에 들었다. 내 주위에도 나와 특별히 친한 용병들이 앉더라.

케니스가 물었다.

“……그건 또 웬 거냐.”

“근처 땅에에, 음, 묻어두었던 육포, 오, 꾸러미.”

뒤적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하자, 숄랑에게서 태클이 걸렸다.

“너는 다람쥐냐.”

그러자 모리스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내리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그거였어. 무슨 동물이었는데 뭐였는지를 모르겠더라. 다람쥐. 여기저기 먹이 박아두고 나중엔 어디에다 박아 뒀는지 홀랑 까먹는 그 동물.”

“얜 까먹지는 않았잖아. 그건 좀 심하지 않냐?”

“심한가?”

“그럼 머리 좋은 다람쥐로 하지.”

“결국엔 쥐새끼냐……?”

케니스가 중얼거렸다.

여태 듣다가 그 말에 인상을 쓴 나는 일단, 세상에 다시없을 이치를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게 좋게 가는 게 좋은 거다.

“내가 좀 귀엽지.”

“너는 쥐가 귀여워? 원하면 잡아다드리지.”

“……이 돼지 자식이!”

그러나 안타깝게도, 더는 커버 불가능한 지경에 도달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며 숄랑을 발로 찼고, 얻어맞은 그가 벌떡 일어나 내게 덤벼들었다. 육탄전으로 번졌다. 놈이 내 멱살을 잡았다.

“뭐? 멧돼지? 멧돼지이?”

“……프렌드 실드가 언제 멧돼지랬냐.”

“안 그랬어. 저놈이 그렇게 들은 거지. 듣던 버릇이라는 게 참 대단하지?”

“허구한 날 듣더니 아주 그냥…….”

그럼, 그럼. 아무도 그에게 멧돼지라 하지 않았다. 혀를 메롱 내밀고 그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후드가 흘러내리면 낭패다. 후드를 잡고 그에게서 물러났다.

용병들은 나 대신 꾸러미를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이거 먹는다?”

“다 먹어도 돼. 그러려고, 가져, 온 거야, 아, 좀, 진짜 주먹을 휘두르고 있어, 이 자식.”

“그럼 너는 가짜로 나 걷어찼냐?!”

“근데 누님, 이 산맥 초행 아니었어요?”

“아니니까 먹을 것을 파묻어놓고 다니겠지.”

내가 어느 정도 격투가 가능하다는 걸 안 까닭인지 숄랑은 전처럼 마냥 봐주다 져주는 루트로 가지 않았다.

공격을 막고 지르기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우리 있던 자리에서 조금 멀어져 있었다.

아직은 제대로 힘을 줄 수 없는 왼 주먹은 거의 쓰지 못하고, 체격 차이도 있는 데다, 후드도 관리해야 해서 구슬땀이 흘렀다.

“나 피 많이 흘린 지 얼마 안 됐는데.”

“아.”

음. 외치고 싶다. ‘훼이크다, 병시나!’

바로 자세를 풀고 멋쩍어하는 숄랑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렸다. 그리고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짚고 섰다. 습격에 얻어맞은 몸을 접고 끙끙 앓던 숄랑이 버럭 소리쳤다.

“야!”

“후. 이게 바로 심리전이라는 거다.”

“비겁함이겠지! 아오!”

“얄미워 죽겠지?”

내 얄미운 질문에 그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다리에서 힘을 뺐으나 아프긴 아플 테고, 나도 미안하긴 미안하여 그가 고통에서 벗어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더 놀렸다가는 후환이 두려울뿐더러 얘가 숨 넘어 갈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나이든 목소리로 누군가가 묻는 게 들리더라.

“저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아, 혹 용병들 때문에 그러십니까? 제지할까요?”

나와 숄랑을 말하는 건가. 아, 그러고 보니 기사들 쪽에 조금 가까워졌다. 어차피 그렇잖아도 그만 하려고 했다. 하여 흘려들으려는데, 대답이, 시드니의 것이라서.

“아니.”

나도 모르게 그쪽을 보고 말았다. 그가 무얼 보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고개는 이제 막 다른 쪽으로 돌려지는 참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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