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27화 (27/157)

00027 CHAPTER 3. 이기심을 위한 선 =========================

불침번이 아닌데도 늦게 잠들었던 나는 괴물들이 몰려오는 것을 눈치 채자마자 일어나서, 주변 사람들을 깨웠다.

“일어나 봐. 곧 습격이다.”

내가 그것을 말했을 때부터 이미 습격이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그들의 급한 기상을, 그러니까 용병들과 기사, 병사들의 기상을 보다가 입맛을 다시곤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세수하고 올게.”

“지금 그런 걸 할 때가 아닐 텐데.”

“깨워줬잖아. 난 연약해서 피해 있어야겠어.”

“넌 세수 안 해도 돼. 그게 그거거든.”

습격 전에 내가 습격하고 싶다. 케니스에게 발을 날리고 안정적으로 착지한 후에 두 팔을 하늘을 향해 펼쳤다. 그리고 소곤소곤 소리를 죽여 외쳤다.

“나는 프렌드 실드를 쓸 수밖에 없는 애물단지다!”

“하!”

누군가가 코웃음을 쳤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제의 전투는 특별했던 거다.

어제처럼 위험한 상황이나 우회하여 합류한다는 그 기사단이 혹시 말도 안 되는 작전으로 이 용병단을 몰아넣을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그다지 웬만하면 전투에 참여할 마음이 없었다. 이렇게 선뜻 참전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헤르조와 함께 다닐 때 그를 방패삼아 놀지도 않았다.

하지만 태세 변환이 너무 빠르잖아. 이 자식들아.

“그리고 숨어 있으라 할 때는 언제고!”

“그건 어제 네가 박살내 놓은 것들을 보기 전이고!”

“그런, 그런 적 없거든요.”

“…….”

말을 더듬고 눈을 피하니, 그들은 한숨만 폭폭 쉴 뿐, 더 반응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연기력을 가진 너를 가엾이 여겨 보내주마, 하는 정도인 것 같다. 나는 마지막으로 싱글벙글 웃어주고 그곳을 벗어났다.

무어. 그래도 문제는 있더라.

아예 몸을 피하는 것은 혹시 모를 불상사가 있을 때 대처하기가 어려우니, 근처 나무 뒤에서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아마도 합류한다던 기사단이, 용병 일행이 가던 방향의 산마루에서부터 달려 내려오는 것이 보임과 동시에 내 뒤에서는 무슨 소리가 났다. 나는 나무와 풀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사이에 있었고, 또 다른 기사들이 바닥을 훑듯 기민하게 나무 사이사이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인즉슨 내 등 뒤로.

와, 이런. 용병을 사이에 두고 샌드위치처럼 공격한다는 작전 아니었어? 갑자기 웬 후면과 측면 동시 공격?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옆으로 달려가서 숨기엔 이미 늦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였을 기사들에게는 경의를 표하지만, 이건 내가 곤란하다. 저들 중엔 필시 마법사가 있겠지. 피할 수 없다.

고민 끝에 결국 나는 나를 지나쳐 내려가는 기사들에게 반짝반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누가 보면 아침 운동 나갔다가 옆집 친구 만난 줄 알리. 어차피 후드에 시야가 가려서 그들 하반신 밖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 지나갔다 싶어서 다시 전투로 몸을 돌렸다. 후드를 눈썹 위로 올렸다.

그래서.

“…….”

시야가 참 깨끗해서. 그래서.

그래서 나는 한눈에 내 지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용병들의 사이로 섞인 기사들 중에서도 그가 그저 눈에 들어오고, 그대로 못이 박혀 사로잡혔다.

“…….”

시드니.

나는 조용히, 천천히,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었다. 아, 그랬지. 그가 토벌작전을 주로 수행하는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깜박 잊고 있었네. 입술 안쪽 살을 이로 물고 웃었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쓰고 비틀렸다.

눈을 깜빡깜빡 몇 번 떴다 감자 그에게서 해방되었다. 나는 숨을 다시 풀어내며 시선을 돌렸다. 쥰. 쥰. 그는 시드니의 휘하 기사다.

하지만…….

“음.”

산마루에서 용병의 퇴로를 막듯 달려 내려온 기사들이 합류하자, 사람 찾기는 요원하게 되었다. 시드니가 단번에 눈에 들어온 건 기막힌 우연이었을 테지. 이번 작전에는 투입되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전투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이 전투는 몹시도 거칠었다. 나는 토벌작전 중의 제대로 된 극렬한 전투를 오늘 말고 본 적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좀 더 보고 마음의 준비를 해둘 것을 그랬지. 괜히 너무 먼 곳까지 다녀와서는.

저들의 손속이 가차 없었다. 기사는 기본적으로 기마하여 하는 전투에 더 익숙한 사람이지만, 이들은 토벌을 위해 특별히 훈련된 기사들이라서 그런 모양. 품위나 고상한 모양새에 치중하기보다는 실로 실용적이다. 투박하기는 용병들이 확실히 투박하지만 살기의 지독한 날카로움은 기사들이 더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구별해낼 줄을 알고…….

나무껍질에 올리고 있던 손을 약간 오므렸다.

눈의 물기가 마른 것처럼 따가워졌다. 눈을 파라락 깜박이며 나는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어라. 구별할 줄 아네.

라이네 저택에서 훈련하는 기사들과 괴물들을 죽이는 용병들을 자주 봐서 그럴까.

“악!”

멍하게 멈춰있던 눈동자가 번쩍 굴러갔다. 비명. ……비명?

어디? 어디에? 내 눈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스러진 병사 둘, 갑옷의 모양으로 판단하건대 라이네의 기사 하나. 그러나 그 시신은 아까부터 있었다. 어디?

나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분명 용병단의 일원일 텐데, 어디? 누구? 부상으로 끝난 것이라 하면 좋을 텐데.

움직이는 괴물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전투를 마친 기사들 중 일부가 일단 물러났다. 편히 움직이기에는 제한되어있는 공간인지라 그리 했을 것이다. 다수가 달라붙는 게 항상 능사는 아니라고 나 역시 배웠다. 저희들이 아닌 용병들을 물러나게 하자니 아직 그들에게는 상대하고 있는 괴물이 있었고.

나는 그렇게 듬성듬성 빠진 곳에서도 용병 중 누가 다쳤는지, 누가 죽었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집중을 해도 영 안 보인다. 설마 괴물에 깔려 있는 건 아니겠지. 움직이고 있는 용병들의 대부분이 아직 활달했다.

전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무렵, 나는 꺼끌꺼끌하게 거친 나무 표면에 손을 대고 왼쪽으로 좀 더 나왔다. 괴물의 시체가 많아지자 서 있던 곳에서는 전투 전부를 관찰하기가 어렵게 된 탓이었다.

그러나 미련한 선택이더라.

“아, 어.”

내가 너무 넋 놓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내게로 달려오는 괴물의 갈색 몸뚱이는 나보다 몹시 컸다. 사자머리의 입이 쩍 벌려졌다. 반인반수의 괴물은 이것이 문제다. 시각적으로 미리 두려움을 조성할 수가 있어.

“아…….”

누가 날 좀 구해달라고 소리를 지르자니, 지금 그랬다간 일이 커진다. 그렇다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는 좀.

……음. 기사들에게로 도망하는 게 좋겠다.

나는 간발의 차로 괴물의 아가리를 피해 옆으로 물러난 뒤, 전투를 하고 있는 길로 달려 내려갔다. 팔짝팔짝 뛰며 무능력함을 강조하자니 뒤에선 진짜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어서. 그리고 나는 미련함의 정점을 찍었다.

호기심에 뒤를 돌아본 것이다.

“헉.”

당연히 내 뜀박질은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괴물은 나를 찢어발길 살의를 담은 손토……, 발토……, 앞발? 손이냐? 발톱이야, 손톱이야? 어찌 되었든 그 뾰족하고 둥글게 말린 갈고리 같은 손토……, 제길, 왜 이족보행을 해서 날 헷갈리게 하는데!

나는 진심으로 분해하며 그 손톱을 피해 뛰어올라 허공에서 괴물의 머리통을 돌려 찼다. 내 정강이뼈에 정확히 맞았다. 그대로 밀어내듯 차며 몸을 휘릭 돌렸다. 이번엔 왼다리의 종아리로 찰 수 있도록. 종아리에 보호대를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깜박한 탓이었다. 자칫 경련을 일으키게 되면 당장 걷는 것도 요원해진다. 뒤늦게 당황하여 아무런 추가공격도 하지 못하고 뚝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두 손으로 짚은 땅에 뾰족하게 갈린 돌멩이가 있었다.

“윽.”

아파. 피난다. 돌가루, 흙 알갱이가 상처 주변에 붙은 것을 탈탈 털다가 옷에 슥 문질렀다.

손톱은 기어이 걸려서 내 로브가 찢어져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는 후드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잘 잡은 뒤에, 괴물이 발로 차고 손으로 찍어 내리는 것을 이리저리 피했다. 시야가 너무 가렸다. 숨을 몰아쉬며 살짝살짝 후드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저것이 맨손으로 덤비고 있다고 나도 맨손으로 상대했다가는 죽기 십상이라는 건 아는데, 빼앗을 무기조차 없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이 도착하기까지 앞으로 십여 초. 그러나 그 전에 내가 죽겠다.

“엔젤!”

“응? 아, 아, 으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낚아챘다. 죽을 뻔했다. 진짜. 던져준 이한테 고래고래 소리치려고 했는데, 아, 그러나.

그러나 괴물이 먼저다.

나는 나를 다시 갉으려던 손에 손을 올리고 팔에 힘을 주었다. 훌쩍 뛰어올라 그것의 두꺼운 팔에 서자마자 두 손으로 자루를 잡은 검을 그것의 목에 가로로 찔러 넣었다. 야구 배트로 하는 스윙과 아주 약간 비슷했다. 왼손이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자루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날에 베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베이며 미끄러진 손의 종착점이 괴물이 비명을 지르느라 벌리고 있던 입 안이었던 게 문제…….

콰득거리는 소리와 현실감 없는 고통이 손에서부터 노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떨며 이를 악물었다.

……와, 씹혔다.

손등이 뚫렸어.

단번에 절명할 줄 알았는데 계산 착오다. 드디어 도착한 기사들이 괴물의 머리통에 검을 찔러 넣었다. 나는 뒤로 넘어가는 괴물과 함께 쓰러져, 괴물의 어깨에 턱을 박았다. 손등에 박혀 있던 이빨이 살과 근육 같은 것을 밀고 들어가 상처가 벌어진 게, 차암 잘 느껴졌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흐트러진 호흡으로 헉헉거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있자, 기사들이 날 달래려 애써 주었다.

“잠시만 참게.”

“아주 잘 참고 있어.”

아마 손을 보고 여자인 걸 알게 된 후에 차리는 상냥함 같은데, 내 손을 빼주려 하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은 출혈 등을 멈출 방도도 없고, 처치할 방도도 없으니 그러하리라고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 극도로 감성적이다. 아파 미치겠어. 여기서 라이네 소공녀인 걸 밝히고 당장 신관 데려오라고 깽판치고 싶다…….

신관들도 분명 같이 입산했을 텐데, 어디 있……, 아니, 아니지.

나는 그 생각에 회의감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들을 위해 온 신관들이 퍽이나 용병들을 위해 치료해줄 수 있겠다. 신관이 있어봤자 소용이 없겠군. 나는 물린 손과 괴물의 머리를 노려보았다.

점점 고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 악물고 참는 것도 어지간해야 가능한 일이다. 괴물의 사후경직이 시작되면 뺄 때 엄청나게 아플 테고. 없는 정신으로도 후드만은 꼭꼭 챙기고 있던 오른 손을 내려 괴물의 윗입술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입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이봐!” “이보게!”

“놓아 주십시오.”

아득바득 말했다.

나는 내 손목을 잡은 기사의 악력이 풀리자마자, 벌린 입, 꽂힌 이빨에서 내 손을 뽑았다.

그 순간의 충격과 고통은 여태 버티고 있던 것과 비교할 수가 없어 내 눈이 뒤집힐 뻔 했다. 천에 막힌 것처럼 턱 막힌 숨으로 우뚝 멈춰있자, 누군가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숨길은 그제야 뚫렸다. 나는 구멍 난 손등에서 뚝뚝 피가 쏟아지는 걸 보면서도 손을 머리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피가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팔꿈치에 일순 맺혔다가 똑, 똑,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 출혈량이 더 많아지기 전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까 내가 있던 곳으로 뛰어 올라갔다. 킨들 라이네 산맥 세 번째 산부터 내가 군데군데 심어둔 게 있었다. 그러나 이 근방은 아니다. 내가 있던 나무 뒤를 지나쳐 더, 더, 더, 달렸다. 자잘한 돌무더기가 기둥 주변에 박혀있는 가녀린 나무 하나를 찾아내자마자, 달려가 돌무더기를 발로 찼다. 빌어먹을. 지금 하나하나 내려놓을 계제인가.

한 손으로 땅을 파헤치고 파헤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세 겹으로 싸두었던 꾸러미가 보였다.

나는 매듭을 풀러, 그 안에서 나온 약을 손에 쏟아 부었다. 피와 섞인 약물들이 기괴한 색이 되어 땅으로 줄줄 떨어졌다. 그래봤자 지혈하는 약효 말고는 없지만. 진통제는 곧장 복용했다.

약효는 양쪽 다 빠르게 돌았다. 수 초, 혹은 십 초 하고도 수 초. 느끼는 고통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단번에 가셨다.

그럼에도 아직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비싼 값을 하네. 한결 여유가 생겨서 이 두 병의 값을 떠올리고 나서 눈물을 참았다. 이게 한 병만 샀으면 그냥 웃으며 샀을 텐데, 여기저기 숨겨두느라고 수십 병을 구입해서…….

“음.”

피가 멈추는 것이 드디어 눈에도 보일 때쯤, 나는 예까지 정신없이 달려온 길을 돌아보고는 머쓱하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여태 이 세계에서 살며 이보다 더한 부상을 당한 횟수를 세어보면, 이만한 부상에 당황해서야 역시 민망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손가락이 아직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휑하게 뚫리고 헤쳐진 모양은 그리 보기 좋지 않았으나, 이게 어딘가. 어서 일을 끝내고 오드리나로 돌아가 신관에게 치료 받는 수밖에.

너무 늦은 치료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 귀경이 너무 늦을 때는 재생약을 부을 예정이니 아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꾸러미를 달랑달랑 들고 전투가 있던 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찾으러 올라오려 하고 있던 용병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내 꼴을 보자마자 욕하며 그 자리에 나와 함께 퍼질러 앉더라.

“미쳤어. 미쳤지.”

“그걸 또 웬 배짱으로 빼고 지랄이야.”

나는 팔을 내민 채로 멀뚱하게 그 말을 듣고 있다가 흐흣 웃었다. 온갖 더러운 것이 묻은 손이라서 최대한 조심하며 깔끔하게 붕대를 감아주려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자 조니가 또 시비를 걸었다.

“마조히스트였어요? 왜 욕을 들으면서 웃어요? 아, 혹시 아파서 훼까닥?”

야, 이.

앉아서 발로 확 차버리니, 피한 조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거 보세요. 아주 건강하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누님, 이 형님들이 지금, 아무도 크게 다친 사람이 없어서 심심해서 이럽니다.”

“아. 납득.”

“‘아, 납득’ 같은 소리 하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숄랑이 투덜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