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25화 (25/157)

00025 CHAPTER 3. 이기심을 위한 선 =========================

가슴이 철렁했다. 용병들은 대체로 직설적이다. 쫓아내려는 건가. 아, 그렇다. 의뢰를 받은 용병단에게는 내가 민폐겠지. 당황했다. 초조감 같은 게 있었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뾰족뾰족하게 올라오는 급한 긴장. 나는 아직 긴장을 정돈하지 못했다. 여기서 이들과 떨어져나가면 나 잡아가쇼 하는 꼴밖에 더 되는가.

내 입술에 여유를 가장한 웃음이 걸렸다.

“돌아다니는 중이에요. 그런데도 여러분을 만났으니, 이것은 운명! 쫓아내지 마세요!”

윌리엄이 멈춰서더니 몸을 반쯤 돌렸다. 경사가 심한 곳을 올라가고 있다 보니, 윌리엄이 나를 보기 위해서는 내려다봐야 했다. 나는 씩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이네 공작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그는 잠시 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린가.”

“누님 또 삽질하는 소리죠.”

조니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윌리엄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일정이 급한 게 아니라면 우리와 같이 있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는 거였다.”

“…….”

어? 내 눈이 동그래졌다.

“이 시기의 여기 산맥은 위험하다. 어떻게 여태 다치지 않고 다녔는지 정확히는 모르겠고, 아마 네게 그럴 능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혼자 다닐 산들은 결코 아니다.”

“…….”

“자신이 있으니 돌아다닌 것도 알아. 널 모욕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홀로 하는 등산은 위험하다는…….”

갑자기 입을 다문 윌리엄은 고개를 돌리고 나무들을 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숄랑이 낄낄 웃으며 뒤에서 내 양 어깨를 잡았다.

“그래, 그래. 우리 단장이 없는 말솜씨로 쩔쩔 매고 계시잖냐.”

“아, 아니, 나는,”

양 손 끝을 말았다. 두 주먹이 복부 부근에서 엄지끼리 만나 엎치락뒤치락. 이런 식으로 곧게 오는 무언가에 나는 어찌 반응하는 게 정답인지 아직도 몰랐다. 결국 그대로 배꼽인사를 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잘생긴 단장님. 세계 최고 미남. 마음도 미남. 얼굴도 미남.”

“…….”

윌리엄은 잠시 나를 보다가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 같은데. 상처다. 내가 울상을 짓자 내 주위에 있던 용병들이 낄낄 웃으며 놀렸다.

산행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 잠간의 휴식 아닌 휴식에 다리가 적응하였는지, 몇 걸음 오르자마자 숨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 이런. 뒤에서 숙덕거리는 인간들을 한 번 돌아보지도 못하는 건 그 탓이다. 체력 탓. 다른 이유, 없어.

“사과해야 할 일이 있었나요? 저 방금 저도 모르게 정신을 잃고 있었어요?”

“아니, 못 따라가겠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괜찮아.”

“근데 야, 엔젤, 너 좀 소심해지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사디스트는 원래 간이 작았다고.”

주제가 내 어떤 상태에 대해 돌려졌다. 내게 관심이 전혀 없다면 모를, 느끼지 못할, 그런……. 나는 타박하지도 않았고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들었다.

“아니, 아니. 뭔가 좀 말이…….”

“말?”

“방금 단장이 한 말, 전 같았으면, 쫓아내지 말라는 둥, 미남이라는 둥, 마음에도 없는 그런 입에 발린 말은 안 했을 것 같은데. 헤죽헤죽 웃다가 갑자기 휑하니 사라지는 게 훨씬, 아, 그러고 보니 방패 녀석 말이다.”

나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숄랑이 내 어깨를 툭 찍었다.

“야, 야, 들어봐. 이번에 우연찮게 그 놈 만났거든?”

“…….”

“프렌드 실드는 어디 갔냐고 물어보닉, 아, 왜!”

뒤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땀이 날 듯 말 듯 하는 이마 가장자리를 엄지뿌리로 훔쳤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물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절교했대?”

“절교했냐? 그런 말은 없었는데.”

“그럼 무슨 말을 했다고.”

“너 만나면 전해달래. 다들 찾고 있다고.”

헛소리.

몽글몽글 따스한 거품으로 차오르려던 마음을 애써 식혔다. 한 번 내리 누르면 된다. 거품이 터졌다. 헛소리. 너는 나를 걱정하지 않는다.

오드리나를 떠난 지 사 개월 만에 듣는 이 소식에는 가치가 없다. 마음에 들일 가치가 없고, 여러 번 곱씹을 가치 역시 없었다. 나는 털어내고자 노력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알아? 내가 지금 누구한테 쫓기는지. 아, 이것도 걱정의 일종인가. ……걱정치고는 너무 살벌한데. 왼 손을 들어 오른 쪽 어깨를 더듬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마음 식히러 나온 것이니 곧 돌아갈 것이다. 그 전에 할 일도 있기야 있지만.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라이네 공작의 모습에는 이를 악물었다.

나무가 울창하게 가린 먼 하늘을 보다 눈을 내렸다. 나는 떠돌이이고, 나와 헤르조 두 사람이 함께 만난 이들은 이 용병단이 아니더라도 많다. 다음에 또 어떠한 소식이라도 들게 되었을 때도 동요할 건가. 언제까지 사로잡히려고.

헤르조는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리고 지금쯤 오드리나는 아리엘의 아리따운 세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있을 것이다. 내가 너무 늦게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

정리는 항상 참 간단하지. 묘한 허탈감에 목을 만지작거리다 낭떠러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길을 보고 있지 않으니 미끄러운 나뭇잎을 밟고 뒤로 나자빠질 뻔 했던 건 당연하다. 도미노처럼 내 뒤의 사람들을 전부 쓰러뜨릴 뻔했다. 날 또 잡아준 숄랑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돼지 같으니.”

그래서 나는 나와 숄랑만을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앞세워 보냈다. 그리고 숄랑을 내 앞에 세웠다. 그때부터 스릴러는 시작되는 것이다. 숄랑은 힐끔힐끔 수시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씩 웃어주었다.

불안하겠지. 그러나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그가 나를 보지 않을 때에는 낭떠러지 쪽을 끊임없이 내려다보았다. 다만 문제는 그 깎아지른 날카로움이 아니라, 저 공기다. 그렇게 옆을 보는 척 뒤쪽을 살피고 있었지만, 내 고개는 기어이 뒤로 돌아갔다.

이젠 답답함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섬뜩하게 등허리를 찌르는 살기. 점점 커지고 있는 소리와……. 걸음을 멈추고 몸을 굽혔다. 손끝이 흙에 닿고 얼마 있지 않아 느낄 수 있었다. 이 땅울림.

더 지체할 순 없다. 나는 숄랑의 바로 뒤로 달려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근데, 아까부터, 무슨 소리 나지 않아?”

“네가 내 멱을 따는 미래의 소리?”

개새끼.

“……괴물 소리. 함성. 땅울림.”

“안 들리는데? 어이, 너희는?”

“안 들려.”

“저도요. 안 들리는, 아, 잠깐. 잠깐. 잠깐. 다들 조용히!”

조니의 날카로운 외침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는 아직까지 있다. 그러나 조니와 숄랑이 무언가를 들었는지 고개를 번쩍 듦과 동시에 모든 자연적인 소리가 사라졌다.

살갗을 벗겨낼 정도로 거칠게 날 세워진 적막.

케니스가 낮게 말했다.

“어이, 잠깐. 여긴 지금 길도 없다고. 단장.”

“…….”

윌리엄은 즉시 지도를 펴서 땅에 놓았다. 뭉툭한 검지가 그 위를 방황하고 있자, 그가 있는 선두까지 달려가서 비집고 들어가 그의 손을 잡아 한 지점에 놓았다. 내가 보던 지도보다 훨씬 간략화 되어 있으나 볼 만 했다.

나는 침을 삼키고 말했다.

“여기쯤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

“……그렇다면, 여기로 가면 되겠군.”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공터 비슷한 것이 좋겠다 하시면 그쪽은 안 됩니다. 나무들이 확실히 듬성듬성 자라있긴 하지만, 전부 굵은 거목들이고요. 지대가 약간 경사가 있고.”

“낭떠러지 옆에서 싸우는 것보단 낫겠지.”

그건 확실히 그렇다.

일어선 윌리엄을 선두로 모두의 이동속도가 빨라졌다. 체력 배분은 작금의 상황에 있어선 둘째 문제다. 나는 그들을 따라 달리며 뒤를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아직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는 짐작 가능하다.

저 수많은 것들을 스물한 명이 맞이해보겠다고?

토벌단이 오기 전까지 이들을 지켜보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아마 내가 힘을 써서 느끼기로, 지금 괴물들은 몰려서 쫓기고 있다.

기사들. 작전 부대다.

나는 찬 기운이 묻어나는 뒷목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뒤늦게 깨달은 바, 손끝이 미미하게 축축했다. 손의 땀이 목에 묻기를 원치 않았다. 즉시 손을 떼고, 후드를 썼다. 아무리 괴짜로 소문났다 하더라도, 이런 곳에서 팔랑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건 조금 상황이 다르다. 날 알아보는 귀족이 있으면 나중에 공작한테 잡혀 죽을 거야.

그리고 지금 나를 쫓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거취의 정보가 들어갈 지도 모르는 일이고.

긴장으로 이미 팔이 저릿저릿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여러 번 상상해왔던 이 상황,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는 이미 몇 번이고 돌렸다.

한 가지 오류라 한다면, 내 상상 속에는 이 용병단이 없었다는 것 정도. 나 혼자 맞닥뜨리고 나 혼자 빠져나가는 상상은 한 적이 있어도, 옆에 용병단이 있는데다 이곳은 토벌 시기를 조금 놓치고 만 킨들 라이네 산맥의 산이었다. 일이 과연 내 생각대로 잘 풀릴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미 남아서 지켜봐야 하느냐고 망설이고 있으니 더더욱.

저 토벌단이 신뢰가 가지 않았다. 선발대 있는 걸 몰랐나? 어떻게 이렇게까지 밀고 들어와.

군사전법은 한 번도 실생활에서 써본 적이 없지만, 내가 읽은바 이게 미친 짓이라는 것은 안다. 이 용병단과 계약한 귀족과 용병단이 사전에 약속한 계획을 저들도 들었을 텐데. 들었어야 하는데. 설마 용병의 목숨을 전혀 고려치 않았을 경우.

“…….”

내가 무언가 대처를 하려 해도 사람의 눈 아래에서는 못한다.

일단 나는 인사 없이 이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물론 나중에 다시 합류할 생각이었다. 사람들의 정신이 없으니 인사를 하지 않는 게 외려 시선을 덜 끌 터. 다리를 멈추고 몸을 돌려 최대한 태연하게 걸어 내려갔다. 그런데 어떤 놈이 내게 달려오더니 훽 잡아채서 끌고 가더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 가다가,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뭐야?”

“너 어디가나 해서. 후, 후으.”

“아. 좀.”

팔을 비틀었지만 숄랑은 아예 내 허리를 잡고 땅에서 내 발을 약간 떼어냈다. 헉. 그는 그대로 달리며 말했다.

“야아, 미쳤냐. 흐, 헉, 이 산맥을 혼, 자, 푸흐, 내려가겠다고?”

“올라오기도 혼자 올라왔다.”

“그 이후에, 흐아, 저 기사 나리들이, 괴물새끼들을 빡치게 만들면서, 헉, 올라오셨잖냐.”

힘들 텐데도 기어이 꼬박꼬박 대답을 한다. 목이 말라왔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이 상황이, 나를 데리고 가는 이 상황이, 참. 나는 시린 눈을 깜박이다 입을 열었다.

“내버려 둬. 지금까지 요행으로 살아남았겠나.”

“운은 굉장하지. 후우.”

“그렇다면 앞으로도 운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위험한 건 여기 계속 남아있는 너희다. 번식기의 괴물들이 얼마나 사납고 영리한 지 몰……라서……, 아.”

지금의 각도로는 나만 볼 수 있다. 미친. 나는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다가 입을 떡 벌렸다.

괴물들이 산길을 가득 메우고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숨을 들이키는 그 순간, 숄랑을 마지막로 모든 용병단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망연하게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용병들은 나를 뒤로 보냈다. 숄랑이 뒤로 보내더니, 조니가 뒤로 보내고, 그냥, 그렇게, 쭉 뒤로 떠밀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무리의 맨 뒤에서 보호받고 있더라.

몰려온 몬스터들은 앞뒤 퇴로가 모두 막힌 탓인지, 용병들이 달려들자 그때부터 악에 받쳐 무기를 휘둘렀다.

용병들 사이사이로 몬스터들이 섞였다. 이러다 내게도 도달하겠다 싶어 주춤주춤 물러나는데, 몇몇 몬스터들이 나를 보는 게 보였다. 그 눈과 살기가 섬뜩하다. 나는 더듬더듬 소리를 높여 물었다.

“어……, 누가 나 좀 지켜주지 않을래? 응? 지켜주지 않을래요?!”

“바빠서요! 행운!”

조니가 상큼하게 소리 지르고 저쪽으로 뛰어갔다. ……행운이 뭐. 행운이 어쩌라고. 적어도 뒷말은 끝내고 가. 뭔가 행운이 오다가 달아날 것 같잖아. 올라갔던 손이 허망하게 툭 떨어졌다. 여차하면 달려오려고 숄랑과 케니스가 전투 중에도 이쪽을 계속해서 살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러다 저들이 죽는다.

그러나 마침 두 사람이 나를 지켜줄 겨를도 없이 내게 던져진 도끼가 눈에 들어오더라. 아, 농담은 끝이다. 그걸 주시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자니, 숄랑이 달려오며 외쳤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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