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CHAPTER 헤르조. 네가 미워 =========================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고 하기에는 그가 친 장난이 너무 빈번했다. 아리엘양 참 예쁘지. 아리엘양 참 착하지. 좋아할 만한 아가씨야. 그렇지?
……그것은 단지 그의 인간적인 호의였으나.
“그리고, 헤르조야.”
손을 뻗는 그녀에 맞추어 몸을 숙여주었다. 그의 목에 팔을 건 에본느는 은근하게 씩 웃었다.
“다시는 내게 이런 장난치지 마라. 또 하면 그 날 널 지하수가 나올 때까지 땅을 파서 묻어버리겠어.”
“물이 오염될 텐데.”
“깊이를 알았으니 다른 땅을 그 깊이로 한 번 더 팔 거야.”
“…….”
또 파는 수고를 해서라도 묻어버리겠다는 의지다. 상당히 장난스러운 협박에 헤르조는 내심 긴장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에본느는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실실 웃어도, 때때로 농담 한 마디에 뼈를 담고 기둥을 세워 사람을 가늠했다.
에본느라면 일단 우리 언니, 우리 언니 하며 좋아하고 보는 그의 누이도, 에본느에겐 저번에 뵙게 되었던 황태자 저하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가끔 진저리를 쳤다. 설마 친구는 닮아가는 거냐고. 저하는 더는 뵙지 않고 싶으니 언니마저 날 버리지 말라고.
헤르조는 그녀를 보다 그저 웃었다. 수 년 전보다 훨씬 장난기도 짙어지고, 가출하여 돌아다닐 땐 그야말로 선머슴과 다름이 없어졌는데, 깊은 곳 어느 부분은 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니다, 션. 친구라 닮아간 게 아니라 두 사람은 본디 닮은 구석이 있었을 거야.
에본느는 말 한 마디로 서넛의 결과를 끌어내곤 하는 사람이었다. 회고해보면 어릴 적부터 그러했다.
“그리고 아리엘의 말은 아무리 소소한 것이라도 다 기억해 주고 챙겨줘.”
그게 무슨 말인지 그는 정확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이성간의 관계에 얼마나 진저리치는지 그녀는 말한 바 있었고, 그것을 짚고 있는 것이다.
갈가리 찢겨서 구른다.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그의 장난이 그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에본느는 정말로 이성적인 접근을 막았다. 헤르조는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다가가면 끝이 날 것이다. 그녀는 그를 꺼려한 적이 있고, 아마 아직도 종종 그러했다.
그러나 그 일은, 어쨌든, 그에게 묘한 슬픔을 남겼다.
거절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상하리만큼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 슬픔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더니, 수 년 후 어느 날 밤에 풀렸다.
내가 키운 너. 내가 다독인 너. 내가 너를 도왔기에,
그렇기에
너는 이제 강하다.
뿌리 깊은 이기심과 뿌리 깊은 자조와 뿌리 깊은 피해의식이었다. 오드리나에 아직 정식으로 데뷔도 하지 않은, 사교계의 꽃인 에본느의 교묘한 언행 하나로 어쩌면 매장당할 수도 있는 아리엘을, 왜. 뿌리쳤는가.
어디가 끔찍했어?
참을 수 있을 사람이.
넌 참을 수 있었어.
그는 지금 저가 아리엘을 염려하고 있는 건지, 에본느를 염려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시드니를 향한 피해의식을 결국 에본느에게 덧씌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어지러웠다.
“에브. 왜 그랬어?”
“아리엘?”
무언가가 안에서 속살거리다 폭발했다.
“먼저 물을게.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해?”
“응.”
“왜?”
“…….”
“왜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야? 쥰이 어찌 사과했는지도 전해 듣지 않았어?”
“들었어.”
“그런데 왜. 나를 믿지 않지?”
“나는 내가 이룬 것에 대해 맹목적이고, 너는 아프다고 손을 쳐내는 사람이 아니니까. 너는, 에브, 너는, 아파도 이 악물고 인내하다 조용히 쓰러질 사람이니까.”
“…….”
“너는 강해, 에브.”
공작이 될 수 있도록 태어난 너를, 아무 것도 아닌 내가 강하게 만들었잖아.
가늠하는 듯, 재보는 듯,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던 사람이 그 순간만큼은 참 다정하게 그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대라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는 웃었다. 창이 내려 꽂혔다. 빛 없는 피를 덧바른 것처럼 차가워. 어두웠다.
처음 보는 에본느다.
그러니까, 처음 보지는 않았으나, 그의 시선을 받아치면서도 그 어둔 냉정함을 쭉 유지하는 에본느는 처음. 그녀는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는 지쳐있다가도 웃는 사람이다. 그런데 에본느가 그 눈을 해서는 무덤덤하게 말하더라.
“헤르조. 나는 공작을 물려받지 않을 거다.”
그는 가지고 싶어도 가지지 못하는 그 자리에 대하여, 말하더라……. 헤르조는 예상치 못한 말에 숨을 멈추었다.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네게는 아리엘과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말하지 않겠다. 말할 가치가 없어. 말해도 믿지 않을 사람에게 말하여 무엇 하지?”
“…….”
“너는 나를 믿지 않고 왔다. 나도 이제는 널 믿을 이유가 없지.”
그는 멍하게 생각했다.
아, 알았다. 그는 그녀가 서툴게 퍼주던 호의를 기대어서 받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모르던 와중에 그렇게 되었던 모양이다.
“가. 헤르조. 다시는 나를 찾지 마라. 나도 너를 찾지 않을 거야.”
그런데 끝이네.
“에브.”
“이런 상황, 다 생각하고도 내게 와서 물었던 걸 텐데.”
네가 끝을 고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순간 내가 깨달은 게 너무 커서 우리의 관계가 끝이다. 헤르조는 조용히 일어났다.
묵은 슬픔의 이유를 알았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거리낌이었다. 내내. 그의 눈길에 약간의 절망이 리본처럼 묶였다. 내가 널. 에브. 내가 널 말이지……. 목이 메었다. 몸을 돌려 그녀의 방을 나왔다.
문 옆에 사람이 있었다.
베르덴이었다. 헤르조가 바라마지 않는 자리를 버리고 에본느를 선택한 남자.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것 자체는 진실.
그러나 그와 베르덴이 멀어졌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 그렇다. 너도 이제는 에본느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여자가 죽은 뒤로 잠잠해지긴 했으나, 옆에 두어 좋을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는 비상시에 어떤 식으로든 도와줄 수 없을 테니 이만 베르덴도 떨어지는 게 좋다.
그런데 그의 입이 열리기 전 베르덴이 차갑게 물었다.
“아리엘이 그리도 중요했나.”
간단한 질문이 그에겐 비수처럼 꽂혔다.
아마 에본느도 그렇게 묻고 싶었을지 모른다. 아리엘이 그리도 중했냐고. 베르덴이 오해하듯 에본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헤르조는 손을 들어 이마를 힘주어 쓸었다.
조금 전 깨달은 것.
참 신기하지. 에브. 내가 널 이렇게 미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사랑하나 밉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감정이 다른 것을 압도하고 있지를 못했다.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충격이게도 미움이 더 큰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의 자격지심이 지나치게 뿌리 깊었다. 헤르조는 시드니가 있는 한 결코 가주가 될 수 없을 터. 그 운명. 그리고 에본느 역시 결국엔 시드니와 같은 입장이니까. 본디 시드니와 에본느가 잠시 어울려 다녔던 것도 비슷한 입장이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비소가 깃들었다.
물론 아리엘은 사랑할 만한 여인이다. 그는 그 어린 날의 에본느를 웃게 만든 아리엘에게 인간적인 관심이 분명 있었다. 인간적인 관심만, 있었다. 두 여인 함께 서 있으면 단연코 에본느만을 바라보면서도, 떨어져 있으면 에본느를 보며 아리엘을 왕왕 떠올렸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에본느의 빛에 눌린 어느 둘째를 향한 연민과 공감이었던 것뿐.
……그가 개자식이고, 미친놈이었다.
미워하는 것조차 몰라. 빌어먹을. 허탈하게 쓴웃음을 흘리고 베르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베르덴도 몸을 바로 세우고 그를 마주 보았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가 에브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것이다.
에본느보다 아리엘이 그리도 중요했냐고?
헤르조는 흐리게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너야말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 사람 붙잡고 지랄 마라.”
베르덴의 눈에 시퍼런 안광이 멈칫 스쳐 지나갔다. 보았고, 느꼈다. 헤르조는 베르덴을 경멸한다. 에본느가 방금 썰물처럼 빠져나가 봄이 비었는데, 그 허망함은 내색도 못하고 지금 하고 있는 건 그녀를 향한 마지막 염려다.
그는 써늘하게 경고했다.
“설마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나, 아니면 네가 잊었으려나. 무얼 잊었어? 네가 쥰의 모친을 사랑한 것? 아니면, 그녀를 도와서 에브를 지속적으로 죽이려 했던 것?”
“무슨…….”
“아니지. 잊어도 잊으면 안 되지. 너는 잊으면 안 돼. 네가 에브를 지켜? 웃기지 마라. 내가 왜 계속 저 녀석을 데리고 다녔는데.”
헤르조는 다가가 베르덴의 코앞에서 픽 웃었다.
“설마 이제 와서 에브를 연모한다는 둥 소름끼치는 소리는 하지 말고. 그렇다고 네 미쳤던 행각이 사라지나.”
다리 옆에 늘어져 있던 베르덴의 손이 말리더니 힘이 들어갔다.
헤르조는 냉정하게 저를 떨친 에본느를 떠올리고는 마음을 정돈했다. 그는 저가 가지지 못할 것을 가진 에본느를 질투한다. 밉다. 어쩌면 내내 꺼려해 왔을는지도 모른다. 베르덴의 짓거리를 알면서도 무의식중에라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다른 게 있을 수가 없었다.
미안. 에브.
“내가 떨어져나가니 너도 이만 떨어져라.”
끝이다.
============================ 작품 후기 ============================
헤르조 외전 끝.
***주의:
다음편은 에본느와 쥰의 대화가 있던 날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장소가 확 바뀌므로, 분위기 역시 무진장 확 바뀝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