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22화 (22/157)

00022 -CHAPTER 헤르조. 네가 미워 =========================

헤르조 외전

만난 건 그가 여덟 살, 에본느가 여섯 살의 일.

그의 형이 먼저 에본느를 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드니는 헤르조를 에본느에게 소개시켜주고는 에본느에게서 한 걸음 정도 멀어지더라.

처음 만났을 때 에본느는 느낌이 참 좋지 않았다. 얼굴은 또랑또랑하게 예뻤다. 단지 눈동자가 짙고 선명한데 그 색이 어쩐지 섬뜩했던지라, 실은 처음에는 많이도 꺼렸더랬다. 그 색이 공기에 산화되어 검어진 피 색과 비슷한 건 후에 머리가 좀 더 자랐을 때에야 알았다. 또한 아마 그런 감상은 여전히 에본느가 꺼려졌기 때문에 나왔으리라고.

아마도 가문의 필요에 따라 하는 교류인지라 적어도 그의 감정은 형식적이었다. 소녀를 보는 소년의 시선은 거의 항상 버석버석 말라 있었다. 만지면 부서져 부스러기마저 파사삭 떨어질 것만 같이 차가웠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변한 날. 그의 마음 꽃송이가 피어난 날.

에본느가 발리앙 영지에서 올라와 라이네 저택으로 잠시 놀러온 아리엘이란 소녀를 마주한 채로 참 예쁘게도 웃는 그 광경을 본 날.

검붉은 눈동자에 빛이 아롱진 그 얼굴을 눈에 담은 날.

에본느가 어느 구석이 변하고 변하지 않았는지, 설령 변했더라도 언제를 기해 변했는지 알아차릴 만큼의 관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 그토록 예쁘게 웃을 수 있었던 건, 에본느가 변했던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러한 사람이었는지.

그날은 에본느를 보는 그의 눈에 빛이 돌아온 날이었다.

어린 저보다 더 어린 소녀에게 관심이 생겼다. 포도주를 부은 것 같은 색의 머리칼이 하오의 반짝거리는 해 아래에서 얼마나 부드럽게 흐르는지 알게 되었다. 굳은 피 색의 눈동자가 아리엘을 볼 때 얼마나 예쁘게 반짝이는지 알게 되었다. 어린 동생을 볼 때 얼마나 어둡게 빛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가 소녀를 꺼려했던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훨씬 더, 소녀가 그를 꺼려하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말하는 속도가 약간 느려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게 참 어른스러운 것 같아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씩 알아갔다. 그리고 그에 따라 마음도 야금야금 먹히기 시작했다. 심장 한 가운데에 분홍색 봄이 피어나서 자리 잡았다. 해가 지날수록 빛이 점점 밝아졌다. 끊임이 없었다.

있잖아. 어떻게 이렇게 예뻐?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어?

네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어.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같은 감정이기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관망하듯, 혹은 떠넘기듯, 그에게 에본느를 맡기고 멀어진 시드니가 어떤 눈으로 에본느를 보는지, 어떤 얼굴, 어떤 눈, 어떤 표정으로 에본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지. 아, 헤르조는 그날부터 시드니에게서 무언가를 이긴 기분이었다.

어느 날 헤르조는 연하고 작은 품으로 제게 건네주는 종이상자를 받으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거. 괜찮다면 션에게 전해주지 않을래?”

“응? 이게 뭔데?”

“인형. 이랑 편지 답장.”

션이 기어 다닐 때부터 알뜰하게 귀여워해준 소녀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편지는 처음. 답장? 그렇다면 션이 먼저 보냈다는 건데, 배움이 느려 제 이름자 쓰는 것도 어려워하는 어린 애가 무슨 편지? 진심으로 놀라서 묻자 에본느는 의뭉스럽게 생그레 웃었다.

포르타 저택으로 돌아와서 막내 동생에게 상자를 주자, 션은 그 작고 가벼운 상자를 가지고도 낑낑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리본을 풀기 시작했다. 오, 좋다. 그도 바닥에 탈싹 앉았다.

뭘까.

줄줄이 나오는 작은 다섯 곰 인형도 곰 인형인데, 저 편지가 굉장히 궁금했다. 고사리 손으로 인형 두 개를 잡고 꺄꺄 좋아하던 션은 다음으로 옅은 밀색 봉투를 집어 들었다. 꼬마에게 보내는 건데도 에본느는 착실하게 봉인했다. 결국 깨지 못한 동생은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읽어줘.”

그러자 그의 얇게 깎인 입술에 은근한 미소가 들었다.

“싫은데.”

“읽어줘어!”

“싫은데에.”

말은 하면서도 봉인을 깨 주었다. 션이 일어나 그의 옆에 딱 붙었다. 기대어 목을 껴안는 가는 팔을 가만히 두고 편지를 꺼냈다.

-저도 션이 좋아요. 편지 고마워요. 션이 준 꽃은 아직도 반짝반짝 예쁘게 피어 있어요. 꽃을 볼 때마다 기쁘고 행복해요. 고마워요. 꼬마 곰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하루 보내길 바라요.

단언컨대 에본느의 문장력은 이렇지 않다. 단어도 이리 유치한 건 쓰지 않고. 반짝반짝. 꼬마 곰 가족.

헤르조는 편지를 보며 웃었다. 서툴긴. 션은 읽어 달라 그의 목을 잡고 흔들었다. 그가 계속 심술을 부리며 얄밉게 웃자, 편지를 빼앗아들곤 마침 방에 들어온 큰 오라비에게 달려갔다. 에본느가 준 거라고 읽어 달라 자랑하자 시드니가 픽 웃었다. 그리고 몸을 굽혀 션의 눈높이에서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의 친형인 소년은 그것을 다 읽고도 잠시 편지를 들여다보더라. 헤르조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 고개를 돌렸다. 시드니 열일곱, 헤르조 열여섯, 션 여덟. 그리고 에본느 열넷의 일. 인즉 에본느가 열다섯 되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에본느의 열다섯 생일에 그는 다시 그녀를 만났고, 찬란하게 빛나던 와인색의 머리카락이 갈색으로 변한 걸 보았다. 하루 만에 이루어진 대 변신이다. 갑자기 웬 염색이냐 묻자, 오늘부터 십 년간 준비할 게 있다며.

그날을 기점으로 에본느는 꾸준히 갈색 머리칼을 유지했다. 그게 ‘바깥’에서는 참 평범한 색이라는 걸 체감한 건 그의 주도로 베르덴, 에본느와 함께 나간 어느 축제의 낮, 그녀를 잃어버리고 나서다.

사방팔방으로 두 사람은 뛰어다녔다. 비슷한 옷,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들이 많았다. 찾지 못했다. 두 사람 능력이면 충분히 찾을 수 있으리라 보았는데 그게 아니야. 수 시간이 흘러도 그들은 빈손이었다. 수 시간 후 마지막으로 라이네 저택으로 가서 사람을 풀도록 부탁하려 하는데 에본느는 바람에 희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거짓말처럼 그의 뒤에서 나타났다.

“에브!”

“……미안.”

단 한 마디였다. 그것이 몹시 짧고 차갑게 느껴졌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는지, 소녀는 덧붙였다.

“길을 잃었었어. 미안해.”

힘겨움에 축축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에본느는 헤르조와 베르덴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계속 교묘하게 비껴가는 검붉은 시선을 둘은 굳이 돌리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그녀가 훌쩍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급작스레 달려온 쥰에게서 들었다. 잠시 다녀오겠다는 편지 한 장이 남아있었다고. 혹 우리 누님 어디 가신지 모르냐고. 베르덴이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순진한 애한테 참 좋은 걸 가르쳤다고 하는 걸까. 헤르조는 이미 종종 훌쩍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지레 찔려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실은, 제 한 몸 지킬 힘도 없는 열다섯의 소녀가 겁 없이 오드리나를 떠났다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수도의 밖은 위험하다. 라이네 영지나 발리앙 영지에 종종 다니던 에본느는 그걸 알고 있을 텐데. 라이네 공작이 어쩔 수 없이 에본느가 납치당했다 하고 기사들을 움직였다. 공표가 있고 나서야 소식을 알게 된 포르타 백작 부처에게 헤르조는 무진장 혼이 났다.

단지, ‘어쩌면’ 의외였던 건, 에본느는 한 달 정도 지난 후에 홀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

그가 라이네 저택으로 갔을 때 이미 와 있던 베르덴도 희게 질린 얼굴로 무척 놀라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은 아닌 기묘함이며, 그럼에도 어떤 사달의 시작, 혹은 진행. 에본느는 돌아온 이래 일 년 안에 세 번을 더 나갔다 왔다. 헤르조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에본느로부터 가장 지근거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베르덴은 다음 해 그녀가 열여섯이 되기 직전에 그녀의 기사가 될 것을 천명했다.

미친. 저 미친 새끼. 질색하며 말렸으나 어쨌든 성사가 되더라. 하여 헤르조는 그의 다음 가출부터 에본느를 빈번하게 데리고 나갔다. 베르덴은 그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아마도 대놓고는 말리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렇게 다른 에본느를 아주 가끔이나마 보게 되었다.

항상 웃던 그녀가 무감정한 눈으로 괴물을 보고, 때로는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보고, 사람을 겪고 참느라 속이 썩어 들어가고, 지쳐도 지쳤다 하지 못하고, 힘들어도 힘들다 하지 못하고. 그녀는 종종, 밝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모습은, 그가 그녀를 돌아보면 언제나 싹 사라져 있더라. 싱글벙글 웃고 다니는 그녀의 내심을 알 수 있었던 것도, 함께 하루 종일 부대끼며 지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그걸 그녀와 안 지 십 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살해당할 위험에서 몇 번이고 벗어난 뒤 늠름하게 다니던 그녀가 아니었다. 에본느는 마냥 강하지 않다.

차기 공작인데. 강하지가 않아.

지쳐 있어.

그래서 헤르조는 에본느가 거친 용병들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게 될 수 있기까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네가 내게 욕을 해도 널 미워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네 편이야. 아마도 너는 내 봄인 걸.

“에브.”

“왜.”

“좋아해.”

“…….”

“와아, 표정 봐.”

그가 스물다섯 된 가을. 발리앙 영지의 어느 마을. 잠시 아리엘과 그녀의 쌍둥이를 만나고 난 뒤. 헤르조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비를 건 패거리를 때려눕히고, 벽에 기대어 쉬고 있을 때였다.

에본느는 그의 말을 듣고 빤히 그를 쳐다보더니 픽 웃으며 고개를 까닥했다.

“아리엘과 잘 안 풀린다고 내게 화풀이 마라. 너희 둘, 내가 보기엔 잘 어울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