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20화 (20/157)

00020 CHAPTER 2. 악을 위하여 =========================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귀가한 공작은 격노했다.

라이네를 오래도록 섬겨온 가신이 쓰러져서 그대로 급사할 뻔했고, 그 원인에 내가 삼분지 이 이상을 기여했으니 그럴 만 했다. 나이 여든셋. 그런 노인에게는 버거운 충격이었다. 수백 년 안전했던 오드리나에 괴물들이 접근했다는 사실도, 가출이라는 내 거짓도, 갑자기 위험해진 내 신변도. 충격일 만 했다. 그는 항상 충성스러웠다.

공작은 언성을 높였다.

“어딜 기사도 없이 돌아다니느냐. 돌아다니길!”

“으아니, 한두 번도 아닌데, 어떻게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실 수가 있습니까! 아버지도, 집사도!”

나는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높였다.

공작은 내 말을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엄격하던 표정이 약간 풀어지더니, 잠깐 눈이 망연해지더라.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해했군.

“너 지금, 너 때문에 사람 하나가 죽을 뻔 했다는 그 무게, 이해치 못하겠느냐.”

“결과적으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을 뻔 했지 않느냐!”

“아버지.”

나는 정말 심각하게 그를 불렀다. 공작은 일단 입을 다물고 내 말을 기다려주었다. 아, 이런,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들어주려 하면 내 양심이 아픈데. 앞으로 하려는 말을 바꿔야 하나 재고도 해 보았지만, 역시, 하려던 말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세상은 결과가 다입니다. 결과론, 모르십니까? 아실 텐데요. 그거 아버지가 가르쳐주셨는데.”

공작의 눈에 지진이 일어났다.

나는 공작의 말없는 명령을 받은 기사 둘에게 양팔을 잡혀 질질 끌려갔다. 그들은 빠르게 나를 공작의 목전에서 제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걸음이 몹시 급했다.

그러나 나에게 몇 대 채이기도 하면서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에, 나와 공작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그들은 나를 끌고 가며 사이좋게 탄식했다.

“아가씨, 제발, 생각을 전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는 각하의 화를 돋우려 작정하신 것 같았습니다.”

“음?!”

나는 질질 끌리는 구두 뒤꿈치로 탕탕 바닥을 두드리며, 온몸에 힘을 팍 주었다(정말, 진심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자 기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옳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공녀를 이렇게 품위 없이 끌고 가는 것은 좋지 않다.

그들은 끌려가지 않으려 하는 내 의지를 읽었는지, 나의 팔을 놓고 제대로 세워주었다. 나는 그제야 몸을 돌려서, 우리가 가던 방향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부릅뜬 눈으로 그들을 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작정한 것 맞는데, 그걸 몰랐어요?”

“…….”

기사들은 말이 없어졌다.

해서 나는, 한숨 쉬며 이마를 짚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겠군요. 진심을 제대로 내보일 수 없다니 이런 불상사가…….”

“…….”

“하여튼, 미안합니다.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내가 다시 뒤로 돌자, 그들이 기겁하여 내 양 팔뚝을 잡았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아, 괜찮다니까?”

“……그 표정을 보면 그 누구라도 수상해할 겁니다!”

“이런 눈치 빠른 사람들. 아주 매력적이야.”

매력적인 것은 매력적인 것이고, 내게 용건이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매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 어? 하는 사이에 그들은 끌려왔다. 나중에는 내가 다칠까봐 황급히 손을 떼었으나.

나는 공작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공작은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너……, 근신하라고 내가…….”

“그런 말씀 안 하셨습니다.”

“…….”

어디까지나 눈짓으로 이루어져 눈치로 때려 맞춰야 하는 근신 처분이었던 지라, 이 정도는 뻔뻔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공작은 떨리는 숨을 흘리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일단, 일단은 근신하여라.”

“그 전에, 아버지, 들어주세요. 베르덴을 제 호위에서 직위 해제하고, 서임을 부수겠습니다.”

그 포기 어린 목소리에 내 발랄하게 마른 음성은 참 어울리지 않았다.

난 웃고 있나.

문득 손을 올려 뺨을 감싸듯 입가를 매만져 보았다. 웃고 있다. 나는 좀 더 씩 웃었다.

몸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듯했다. 망치질 받은 제방처럼 물 같은 게 줄줄 새어나가서, 아니, 바람 같은 게 줄줄 새어나가서 목소리에서조차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눌렀다. 쾅쾅. 판화를 찍는 것처럼 음성에 대고 힘을, 쾅쾅, 탕탕, 망치질했다.

그 묘한 허망함을 억누르고 덤덤한 척 말하니, 이제는 공작이 허탈해진 모양이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서임을 부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발리앙가와 척을 지겠다는 것이냐.”

“저 이제는 베르덴이 필요 없습니다.”

“너는 차기 라이네다. 라이네 그 자체야. 이 시기에 그를 호위에서 제하는 게 말이 되나. 집사의 건강이 너를 흔들 정도의 일은 아니다.”

“아버지.”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다.

그리고 무슨 즐거운 일을 만났듯 벙긋 웃었다.

“베르덴, 더는 필요 없습니다.”

그 말에 공작은 무언가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는 수 일 내로 필르 발리앙과 함께 발리앙 저택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미쳤느냐. 발리앙 후작이 무어라 생각을 하겠어!”

“어어, 베르덴의 서임 전에 저와 그분 각하사이에서 이야기는 이미 끝내두었으니 아무 문제도 없을 겁니다.”

나는 그 말을 하며 이유도 모르게 머쓱해져서 목을 긁적이고 말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깨달은 바, 공작이 되지 않겠다는 말을 전처럼 분명하게 할 수가 없었다.

아리엘.

그녀가 나를 망설이게 했다. 웬만하면 공작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진심이다. 그 진심은, 아리엘과도, 쥰과도, 글의 그 어떠한 부분과도 상관이 없다. 나는 공작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책임, 그 짐의 무게, 지고도 내가 멀쩡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런데, 내가 그토록 거부해왔던 그 길에 대하여 내게 아직은 선택권이 있음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감사하게 되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입을 열고, ……열고, 다시 닫았다가, 침을 삼키고 재차 열었다.

“아버지. 제게 시간을 주세요.”

아직도 목을 긁적이던 손으로 목살을 둔하게 꼬집었다. 그 아픔을 잠시 유지하다 손을 풀었다.

공작은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에 어설프게 웃었다. 그리고 반복했다.

“시간을. 주세요.”

무슨 말인지, 이는 무엇을 위함인지, 그는 알 것이다. 그는 결국 허락했다.

집무실에서 나와서 기사들에게 설렁설렁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걷는데, 아, 무언가가 나를 지치게 했다. 조금 멍한 머리를 한 채로 비척비척 내 방 지근까지 걸어왔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리는 대체로 공상이나 사색으로 인해 온갖 생각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방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나는 끝끝내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무언가, 시답잖은 것이라도 좋다. 생각을 하고 싶었다. 내겐 생각이 있어야 했다. 상상? 상상을 해 볼까. 그러나 무슨 상상. 집사가 내 눈앞에서 쓰러졌다.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에이씨, 상상 한 번 끔찍하게 하는군. 나는 진절머리를 치며 고개를 털었다.

다른 상상. 헤르조가 몬스터에게 머리가 터져 죽…….

……아, 나.

글러 먹었음을 깨달았다. 오늘 본 끔찍한 상황들이 최악으로 치달았을 때의 모습만 상상되는걸. 눈을 찌푸리고 입을 비죽였다. 무얼 생각해야 하나. 공작? 공작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까.

그런데, 아, 잠깐만. 그 단어를 선택하자마자 드디어 떠오른 어떤 생각이 있는데, 그것이 엉켰다. 아니, 잠깐만. 결국 두 손을 들어 손끝으로 이마 가장자리를 짚고 눈앞을 가렸다. 잠깐만.

……잠깐만.

어라, 잠깐만. 생각을 해 보자.

“…….”

쥰이 나 대신 아리엘을 선택하면. 아니, 필시 그리 선택하겠지만, 정말 선택한다면. 그런 상태에서 쥰이 공작이 된다면.

“……음?”

어라, 잠깐만. 나는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그럼, 그때에 나는? 아리엘을 선택한 쥰이 공작이 되면, 나는?

내가 떠나도, 알드리히가 아리엘의 종용에 따라 나를 수색하면? 타국까지 사람을 보내어 나를 찾고자 노력한다면?

……아, 잠깐만.

잠깐만. 생각을 해 보자. 결국에는 나를 쫓는 사람이 아리엘뿐이 아니게 되잖아. 아니, 결국이랄 것도 없이, 원래부터 그랬잖아. 그럴 것을 알았잖아. 쥰이 아리엘을 선택할 것을 알았잖아. 그런데도 그에게 나를 죽일 권력을 쥐어준다고? 내가 가질 수도 있었던 권력을?

아, 잠깐. 잠깐만.

손 아래 그늘진 눈에 힘이 들어갔다. 쥰이 누굴 선택할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여태 쥰이 나를 좋아해주었기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쥰이 글대로 공작될 시 일이 어떤 식으로 심각하게 번질 수 있는지를 실감을 못하고 있었, 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박였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이십 년을 이렇게 생각도 못하고 살 수가 있는 거야? 어라, 진짜?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질 않았었다. 너무도 간단한 추론인데.

이리 되면, 귀찮다, 짜증스럽다, 살고 싶다는 둥의 연민에 빠져 뜬구름 잡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아, 아하. 난 자칫하면 정말 죽을 것이다. 내게 강한 마법이 있고, 강한 육체적 능력이 있어도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당해내지 못한다.

나 죽어.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머릿속 제방을 뚫고 물이 세차게 빠져나갔다. 굳게 쌓아두었던 성채는 또 다시 무너졌다.

원작. 애초에 원작이라는 것은 뭐지? 내가 쓴 글이라는 것은?

그것에 내 눈은 도대체 얼마나 가려 있는 거지?

이마에 댄 손가락 끝에 물기가 만져졌다. 식은땀이다. 나는 진정 이해할 수 없었다. 준비해 왔다고 생각해왔건만, 아무 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난 정말 훌륭한 공작이 될 깜냥은 없을뿐더러, 공작의 의무와 책임을 의연하게 질 도량도 되지 않았다. 나를 안다. 나는 결국 그 무게에 집어 삼켜지고 말 것이다. 해서 쥰에게 공작위를 떠넘기려 했다.

그러나 뼈대 굵은 가문의 가주라는 자리, 그 권력. 애초에 쥰에게 쥐어줄 수는 없을 것들이었다. 쥰은 아리엘을 사랑해. 사랑하게 될 거야. 아리엘이 존재하는 한, 난 이걸 그에게 넘길 수 없는 사람이다. 결국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아, 모든 것은 쥰을 만나서 결정해야 할 것 같다.

쥰. 경멸 받는 게 ‘이 집안에서는 온당했던’ 그 아이. 어쩌면 나도 공작처럼 경멸해야 마땅했던 그 아이. 나를 걱정하던 그 아이. 그 다정한 웃음에 내 눈이 가려 있었던 걸까. 과연, 그리도 내가 미련했던 건가.

어라.

“…….”

그럼 나는 도대체 여태 뭘 해온 거야. 도대체 무얼 생각해온 거야.

모든 게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여기는 글 속인데’, 하는 혼란. 꿈에 빠질 것만 같아도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던 나.

또 다시 머리가 텅 비었다. 가슴 사이가 절절 끓었다. 아니, 목이. 아니, 입술이. 아니, 머리가. 손이. 명치가. 다리가.

온 몸이.

끓다가 종국에는 내 안 모든 게 피와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이 공허가 정신이 없어……. 안절부절 못하겠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그런데 무엇에 대한 갈피인지 스스로도 알 도리가 없어서 더 웃겼다.

손끝이 점점 축축해졌다. 나는 일그러지려하는 입술을 이로 물고 끌어올렸다. 시선이 느껴진 탓이었다. 끌어올리고 이를 감추었다. 웃어야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웃는 얼굴로 옆을 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베르덴이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웃지 않아도 될 사람. 내 입 꼬리는 내려갔다.

“…….”

무얼 위해 왔나,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죄송하다 무릎을 꿇었던 것도 거짓이었던 모양이지. 부리나케 서임을 깨러 왔군.

깔끔한 눈매에서 박혀오는 시선은 내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기에는 날카로운 기가 있어서, 나는 다문 입으로 쓴 웃음을 지으며 콧김을 푹 쉬었다. 어쩌면 같은 시선일 수도 있겠지. 내 심경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일 수도 있음을 알고는 있었다.

나는 몸을 바로 세우고 방 앞까지 걸어갔다. 문은 내가 열었다. 따라 들어오라고 열어둔 채로 먼저 입실했다.

내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으나 스스로 느끼기에 어색하더라. 시립한 신하를 뒤에 두고 떠나는 이 방의 왕인 것처럼. 떨리는 한숨을 쉬며 책상 앞에 섰다.

열쇠가……. 방황하던 손을 흠칫 움직였다가, 첫째 서랍을 열고 그 안을 뒤적거리는 척 열쇠들을 불러왔다.

그리고 몸을 굽혔다. 맨 아래 서랍.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열쇠 뭉치를 책상 위에 두고, 서랍을 열었다. 베르덴의 맹세는 아주 고급스럽게 장식된 방, 서임식에서 이루어졌었다. 나는 절차대로 그에게 새 검을 주었고, 그는 내게 장갑과 그의 낡은 검을 주었다.

나는 장갑이 담긴 상자부터 집어 들었다. 뚜껑을 올리자 보이는 것은 약간 색 바랜 감이 있는 흰 장갑. 이 장갑이 내게 있는 한 기실 그는 항상 내게 싸움을 건 상태였다. 깊은 뜻이……, 있었다.

탁. 뚜껑을 내렸다. 맞아 들어가는 딱딱한 모서리를 엄지로 쓸었다. 아직은 책상에 가려 있었다. 나는 빈손의 끝으로 이마 가장자리를 누르고 더듬었다. 아이의 것처럼 작고 짧은 손톱인지라 손끝의 살이 손톱보다 더 높았다. 딱딱하게 박인 굳은살을 굴리듯 꾹, 꾹. 내가 앞서 끊어내고 저 찬 시선이 견디기 힘들다니. 그러면 안 된다. 내가 끝냈어.

채 닦지 못했던 식은땀을 모두 닦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베르덴을 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작은 상자를 왼 손에 든 채로, 오른 쪽 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검을 가져와요.”

두 개의 잘 깎인 고정대 위에 놓인 검의 가운데를 오른 손으로 쥐었다. 위로 호를 그리며 들어내자마자 묵직해졌다.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먼지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에는 이제부터 먼지가 쌓일 것이다.

오래도록 손에 익은 검을 놓아야 하는 기사. 그것을 돌려받는 주군. 무기를 주고받는 건 뜻이 그리도 중했다. ‘너는 이 무기를 네 몸에 익숙하게 만들어도 된다. 네 충성의 맹세를 나는 믿고, 나는 죽기까지 너를 거둘 것이다.’ ‘제가 당신을 모시게 되기까지 저를 갈고 닦으며 저와 동반했던 무기를 맡깁니다. 첫 무기를 맡기며 저를 당신께 맡기니, 저는 죽기까지 당신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베르덴. 나는 처음부터 너를 내치도록 네 부친과 약속했었다.

미안하게도 나의 맹세는 처음부터 거짓.

그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말괄량이를 보살피느라 힘들었지요.”

어차피 그가 내 기사가 된 이유로 들었던 바도 처리된 지 오래였다. 암살 시도는 없다. 아마도 쥰의 모친이 사망한 뒤부터. 그녀가 죽은 이후로 몇 번 더 있긴 있었지만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벨트에서 검을 풀어낸 베르덴은 내게서 먼저 검을 가져간 뒤에, 돌려주어야 할 것을 내밀었다. 손이 스쳤다. 내 손에 완전히 풀어 놓기 전에 덜그럭거릴 정도로 한 번 쥐었다가 놓더라. 나는 그 힘을 느끼고 눈을 감으며 침을 삼켰다.

곧 왼 손도 비었다. 나는 검을 품에 품듯 끌어와 두 손으로 잡았다. 내가 뿌렸던 것을 아마도 다 거두었다. 목소리가 젖었다. 사막에 야금야금 내린 비를 마신 것처럼. 젖었으나 말라서 쩍쩍 갈라졌다. 나는 그 미친 음성으로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고마웠습니다.”

잠간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나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로 사양했다.

“저는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야. 나는 예의상이라도 부정하지 않았다. 혹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입 발린 소리를 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나……, 저도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은 없어요.”

“…….”

나 역시 감사에는 사양했다. 내 눈은 이미 그를 떠나 그의 뒤를 보고 있었다. 슬슬 공작이 명령하여 보냈을 사람들이 열린 문 앞에 섰다. 그들이 내쉬는 숨만으로도 혼잡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찌푸리듯 헛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경.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베르덴은 조용히 나를 보았다. 물으라는 허락이다. 하여 물었다.

“내게 암살 시도가 있었던 것, 경이 내 호위가 되기 전부터 알았다 했지요.”

“…….”

“어찌 알았습니까.”

나 홀로 알아내려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정체를 걸어야 하는 일이 발생. 그런 위험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았다.

나는 물어 그의 대답을 기다렸고,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혹, 열지 못하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코웃음을 푹 웃었다.

내 이 판단에 후회할 것이다. 이렇게 끝내는 것을 나는 필시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진심 다 하여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리엘이 베르덴을 시켜 내 약점을 잡거나, 나를 해하려 들면, 내 가까이에 있는 호위기사이니만큼 내가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베르덴이 나를 향한 암살시도를 알았을 때, 내 마음은 다시는 망설이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는 결국 내게서 떨쳐 보내야 할 사람이다.’ 하는 그 명제가, 후작과 약속을 할 때보다도 훨씬 분명해졌다.

그는, 나를 위해, 내 옆에서 사라져 줘야 한다. 나는 이 일에 목숨이 걸려 있다.

내가 알아내야 할 것이 분명 존재함을 그는 침묵으로 알려주었다.

“가세요.”

검을 주고받았으니 되돌릴 수 있는 일은 없다. 베르덴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라고 몹시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그대로 수 초간 머물렀다. 다시 섰을 때 그는 내게 한 자락 시선을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기 전에 나도 몸을 돌려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보니 이미 시종이 있다.

문 닫히는 소리. 두 팔을 들어 머리를 슥슥 모았다. 지키는 자, 필요 없는데. 묶을 리본이 당장 손에 없다는 걸 깨닫고 손을 풀자, 머리가 산발이 되어 흩어져 떨어졌다. 난간에서 떨어져 나왔다. 테라스의 입구에 서서 방 안을 빤히 살폈다.

긴 세월 머문 이 방에 미시감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떠날 지도 모른다 하여 그러하나.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풍성한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내 시야를 휘감았다.

“…….”

고요하다. 사락사락하는 소리조차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았다. 조용하게 숨 쉬었다.

바람이 그치길 잠시 기다리다 검을 움직여 눈앞의 커튼을 걷어냈다. 검에 커튼이 휘감겼다가 춤추는 치맛자락처럼 둥글게 풀렸다.

시간을 달라 하였으니 나는 그 시간을 가질 것이다.

나를 위해 에본느와 글이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