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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꽃 작가님-19화 (19/157)

00019 CHAPTER 2. 악을 위하여 =========================

진이 떠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헤르조 없이 홀로 다닐 때에나 호신을 위해 가끔 운용했던 마법이 사람들의 위로 쏘아져 내려갔다.

퍽. 정수리에 맞은 덩어리에 괴물들의 머리가 터졌다. 점성을 가진 덩어리들이 날았고, 그것을 맞은 용병들이 욕설을 소리쳤다. 그에 나는, 찬 돌에 대고 있는 손목을 움찔 움직였다.

나는 마법에 처음부터 능숙했음에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능숙함과 익숙함은 다르다.

하여 다시 조절하여 속성을 바꾸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공중에 독물이 섞였다. 그것은 부드러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내려앉았다. 소리 없다. 손가락 끝에서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듯했다.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 중 아무도 이만한 크기의 마법을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사람과 괴물을 함께 덮치고도 괴물만을 골라 죽이는 이런 섬세한 노도는 더더욱. 이 세계의 마법사는 모두 약했다.

“잠깐!”

“피해! 독이다!”

“마법사!”

“아, 누구냐! 조절 잘 하라고!”

내가 그렇게 설정했다.

정수리부터 독물을 맞은 것처럼 흘러내리는 괴물들을 내려다 보다 주먹 쥔 손의 엄지로 검지를 문질렀다. 괴물도, 마법사도, 내가 설정했는데, 실은 나부터가 설정의 오류 자체였다.

내가 쓴 에본느는 아무 힘도 없었다. 오로지 차기 공작으로서 받은 교육과 타고난 머리로 아리엘을 옭아맸다. 그러나 나는 힘이 있다. 이 글의 등장인물들을 인간으로 인정하기가 힘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아, 그 이유들.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를 더 대보라 하면, 여러 개가 있지.

나는 손을 풀었다가 다시 주먹 쥐었다. 그리고 풀고, 다시, 주먹. 마디마디 저렸다.

이유. 다시 돌아갈 거라면 정을 주지 말자.

이야기에 의해 저들에게 버려질 거라면 정을 주지 말자.

내게는 저들이 없더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재물도, 물리적 힘도.

나는 나의 어느 구석을 안다.

여기가 차라리 내가 쓴 글 속이 아니었다면, 저들이 내 손에 탄생한 이들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이 세계의 사람들이 지구의 사람들처럼 여겨졌다면. 나는 확신한다. 나는 어디 여행도 다니지 않았을 테고, 가출은 생각도 못했을 테고, 얌전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작이 되었을 테고, 계속해서 상처를 받을지언정 누굴 버린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테고. 내 삶은 지구에서의 삶과 아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내가 지구에서 정말 죽었기에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라도 있었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누굴 버린다는 둥의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 나는 홀로 있는 게 좋았다. 그런데 홀로 있는 게 싫다. 아니, 아니야, 좋아한다. 좋아하는데 싫어. 상처를 받아도 우그려 넣고, 상처의 잘못은 내게 있다고 나를 반성하고, 나는 헤르조도, 베르덴도, 알드리히도, 나아가 쥰도, 시드니도, 션도, 아리엘도, 르네도, 내 곁에서 떠나는 걸 두려워했을 것이다. 아주, 정말 아주 견디기 힘들 지경이 되면 그제야 파들파들 떨며 끊어냈겠지. 아니면, 떨며 계속 끌어안았든지. 인간  관계에 있어서 나는 정말 겁이 많았다.

그럼, 혹시, 내게 힘이 없었다면.

내게 마법이 없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몸을 보전할 자신감이 없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

그랬다면 다른 선택지는 없다. 나는 감사히 공작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힘을 가져야 하니까. 힘이 없다면 다른 힘이라도 있어야 했다. 있기를 바랐다. 나는 어느 상황에서, 어느 주도권이라도 잡기를 바랐다. 힘은 내 자존감의 원천 중 하나였다. 이 꿈 같은 세상에서까지 무력감을 겪고 싶지 않은 자의 말로라 할 만 하다. 권력욕이었다. 어떻게든 쥐고 싶은. 어떤 속성의 힘이든지.

내 꽃길…….

이물감이 드는 눈을 깜, 박, 감았다 떴다.

뒤, 멀리, 말발굽 소리의 무리가 몰아쳤다. 기사단일 것이다. 그들과 함께 마법사가 한 명이라도 올 터. 이미 들켰을 것이다. 그들은 감히 시전할 수 없는 마법을 시전한 어떤 강한 마법사가 있음을.

나는 그들이 성문을 통과해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까지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바깥? 바깥……. 코웃음을 쳤다. 그보단 헤르조를 보았다는 게 차라리 옳겠다. 내 눈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이 자리에 있음을 들키지 않는 게 가장 좋다는 생각은 뒤늦게 들었다. 나는 수 초간 더 보다가 성벽에서 손을 뗌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헤르조. 옛 친구. 버려지느니 버리겠다며 종국에는 끊어버린 내, 소중한 친구.

내게 힘이 없었다면, 배신을 당하든 버려지든 안고 가려 몸부림을 쳤을 인연.

그리고 베르덴.

돌가루 묻은 손가락으로 눈가를 훑었다. 아무 것도, 물론, 묻어나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자리에 몸을 굽혔다. 오른 손의 손끝을 바닥에 대어 몸을 지탱했다.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말이 엉긴 물처럼 밀도가 높아지다 쿠웅 내려앉았다.

이 텔레포트의 마나 역시 마법사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있는 자리는 분주한 성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성벽 앞이었다. 집까지 텔레포트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으나, 마나를 쫓아온 마법사들에 의해 라이네 저택에 마법사가 살고 있음이 알려질 가능성이 있었다. 텔레포트처럼 강한 마법을 쓰면 마나가 참 길게도 꼬리를 남기기에.

일어나 툭툭 차림을 정돈했다. 조금 전 많은 생명체들을 죽였으나 무덤덤했다. 심장이 쿵쾅거리지도 않았다. 죄책감은, 죄 없이 죽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성벽 높은 곳을 일없이 올려다보다 걸음을 옮겼다.

걸음걸음마다 벽을 훑어가는 손끝이 지지지직 갉혔다. 차갑다. 차가워.

문에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 한 자리에 뚝 멈춰 섰다. 망부석처럼 서서, 우왕좌왕하는 병사들, 용병들, 실어 날라지는 시신들, 머리, 팔, 다리, 꾸러미, 피 비린내 물씬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공작위를 버리고, 필르 라이네로서 만난 사람들도 버리고, 너무도 약한 민간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려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찬찬히 생각했다.

각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반드시 마주치게 될 괴물들도 자주 죽이게 될 것이다. 이 나라에서 안전한 곳은 오로지 오드리나 뿐이기에.

만일 진실로 그리 살아가기로 온전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그것은 죄책감의 문제도 아니고, 주도권의 문제도 아니며, 영웅 심리의 문제도 아니었다.

내 생명을 위해서다.

하여 그렇게 떠돌며 살다 언젠가 모든 게 귀찮아지는 때가 오면 잠시 쉬다가, 도로 내키게 되면 또 돌아다니겠지. 이 결정과 계획은 나를 위해서. 힘이 있다는 안도감에 취하여 결정했다는 속내가 한 칠십 퍼센트 정도.

아하, 다시 생각해보자.

라이네와 오드리나를 기어이 떠나게 되면 나는 저 황무지에 몸을 담글 것이다.

입을 뻐끔거렸다.

“내가…….”

“야, 팔! 팔 잡아!”

“나, 내가…….”

“다리 떨어진다! 야, 피! 피!”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건 아니다. 명치에서 무언가가 쿵쿵쿵쿵 뛰어서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고자 입을 열었던 것뿐. 입을 다물었다.

내가 저 피에 몸을 담그게 될.

것.

……나는 왜 이리 아리엘이 두렵나. 왜 이리 그녀가, 그녀의 감정이 익숙지 않나. 어째서 이토록 내 긴장을 못 이겨 떠나고자 하나.

왜 나는 글과 글자라는 것들에게 꺾인 자존심을 회복할 생각도 없이 아리엘을 두려워하나.

손을 올려 머리를 쓸었다.

시선은 피와 시신들에 여전히 박혀 있어, 사람들의 피 위로 초록색 잔상이 맴돌았다. 나는 역한 침을 삼켰다. 내가 내게 질린다. 손이 툭 떨어졌다. 사람 시신이 내게 익숙하여, 저 조각조각 떨어진 지체 부위를 보면서도 몸이 떨리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저들은 사람인데, 지구에 나가면 그저 활자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이건 환상이니 모든 것이 내게서 멀게 느껴진다든지. 확실히 여태 이십여 년, 그리 살아온 감이 있었다. 그래서 아직 모르겠다.

‘나는 글이 두렵고, 아리엘이 두렵다.’하는 그 인정. 내 자존심이 그렇게 꺾여서 꺾인 그대로 여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저 평민들을 향한 인식은, 글에 이름이 두 번 이상 적힌 고정인물보다는 나아서,

말했잖아. 저들은 사람이고 인간이라고.

그래서 죄책감이 든다고.

눈이 마주쳤다. 쥰이었다. 무어라 입술을 움직이는 모양을 보자니 ‘누님.’ 정도 되겠다. 나는 조금 더 그를 보다 몸을 돌렸다.

“누님……!”

이런. 자칫 잡히겠다.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에 부딪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궁에 다녀오느라 꽂았던 빗 핀이 아직도 머리에 달려 있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그것은 결국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빠져 땅에 떨어졌으나, 나는 줍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왜냐.

쥰이 예상보다 겁나 빨랐다.

“누님!”

“아, 좀. 으아아.”

“누님!!”

나는 오른 손을 올려 후드를 올렸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를 아는 용병들이나 그 외의 사람들이 나와 쥰의 관계를 짐작하는 일이 없도록 빠르게 벗어났다.

쥰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많이 걷고 달려 아픈 다리로 끙끙 앓으며 라이네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얌전하게 집사에게 인사했다. 괴물 소식을 막 들은 참이었다던 집사는 무너졌던 세상이 다시 세워진 것처럼 벅차하며 뒷목을 잡았다. 그리고 쓰러졌다.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응?

“지, 집……,”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집사? 집사. 노인이 쓰러졌다. 주름진 얼굴로 강건하게 웃던 그가. 그가 쓰러져서 눈을 허여멀겋게 뜨고 나를 노려봐……. 아. 노려보네.

나는 숨을 들이켜고 팔짝팔짝 뛰며 외쳤다.

“집사가 죽었다아!”

“안 죽었습니다! 아, 윽, 혈압이.”

노인은 한 손으로는 머리를, 한 손으로는 뒷목을 잡고 끙끙 앓았다. 내 외침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부축하는 시종들을 보다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 그래. 그대, 오래 살아야지.”

“이게 지금 누구 탓……, 제 혈압 탓입니다.”

“에이, 다 아는 걸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돼.”

“…….”

이번에야말로 정말 기절할 것 같은 안색으로, 집사는 부축을 받으며 떠났다.

그리고 나는, 아, 아니다, 내 웃음은 그 뒷모습을 보며 조금 부서졌다. 조금 전 죽음을 보고 와서 여기서는 시트콤을 찍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내 손이 드디어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조금 전 집사가 쓰러진 사실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손으로 손을 잡고 배 위에 눌렀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내 방으로 가기 위하여 계단을 밟을 수 있었다. 가는 길에 마주친 킴에게는 멀쩡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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