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8화 (18/157)

00018 CHAPTER 2. 악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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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촌극을 마치고 우리는 마차를 타고 라이네 저택으로 돌아왔다.

베르덴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나를 붙잡아 이야기를 더 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 그에게 할 말이 없어, 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에 저택을 나섰다. 집사가 기사를 붙이려 했으나 거부했다.

또 집을 나가는 거냐고 불안해 보이는 노인에게 잠시 산책 좀 하고 오려는 것뿐이라 사실대로 말하기는 재미없어서, 일 년 뒤에 봅세, 하고 경쾌하게 인사를 남기고 튀었다. 집사가 뒷목 잡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하루 이틀이 길었다. 조금만, 숨을 돌리고자 했다.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래도.

의식적으로 종종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팔랑팔랑 걸었다. 심장 한 구석이 초조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명치에서 무언가가 뛴다.

나는 뒷목을 문질렀다. 어서 준비를 마쳐야겠다. 내 생존과는 관계가 없다마는, 베르덴 경질도 처리해야 하고. 그에게 한 말이 한 달이지, 하루만에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오드리나를 막상 걸어 다니니, 나온 김에 며칠 일정으로 어디라도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들더라. 실제로 갔다 올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산책은 기분 전환 삼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앞으로 오드리나를 나가자마자 다시 만날 그 넓은 황무지를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유혹이 들었다. 이왕 걸어 다니고 있는 김이다. 나는 가보기로 했다.

외성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나는 비근무자치고 외성의 성벽에 자주 올라가본 편이었다. 물론 침입이다. 이 나라 모든 도선생들이 내 밑이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을 정도의 실력으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치고 빠졌다. 후. 이 내 능력, 두려울 정도다.

내가 걸어 다니던 부근에서 외성의 남문까지는 부지런히 걸어도 한 시간이 넘었다. 그래도 강행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미쳤어. 미쳤다고. 난 미쳤어.”

여행을 겨우 두어 달 멈췄을 뿐인데, 다리가 뻐근했다. 힘들다. 엄청나게 힘들었다. 으아아아. 회의감이 들었을 때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끔찍하게 느껴질 정도로 멀리 온 상태였다. 외성을 가든 저택을 가든 걸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 울며 겨자 먹기로 꾸역꾸역 남문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미쳤어. 왜 겨자를 일부러 퍼 먹니. 그럼 울 일도 없었잖아.

내 미련함에 속이 끓어서, 속에서부터 열이 확 올라와 더웠다. 끙끙 앓으며 계속 걸었다.

그리고 아주 멀리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무언가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

사람들이 소란스러웠다. 이는 생활의 활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소란이다. 숙덕숙덕, 눈물, 동동 구르는 발, 외성을 바라보는 눈길. 저, 불안함…….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사정도 모르는데 이미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깨를 움츠렸다. 명치에서부터 휩쓸려 내려가는 건 여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분위기를 더 읽어내려 애썼다.

달려오는 아이들을 안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어머니, 접고 닫는 가판, 막 저쪽에서 뛰어오고 있는 용병들. ……용병? 나는 급히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달려오고 있는 그들은 저희에게 일직선으로 뛰어오고 있는 나를 보고 비키라고 손을 휘저어대다가, 눈을 크게 떴다.

“프렌드 실드?”

“애물단지?”

“뭐? 그 바보? 헉, 바보다.”

“미친 언니 떴다!”

……입 모양 다 봤다. 이 자식들아.

나는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달려갔다. 그들은 나를 만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것처럼 보였다. 나를 중심으로 뿔뿔이 흩어지려는 놈들 중 한 명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인질이 붙잡히자 다른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동료를 버리고 토꼈다.

“미안! 숄랑! 나중에 보자!”

“우린 살았어! 근데 쟤가 죽을 거야! 혈압으로!”

“야, 인마들아!! 그렇다고 다 튀냐! 감히 날 버려!”

피를 토할 듯 소리치는 숄랑의 목에 팔을 걸었다. 그리고 나보다 수십 센티는 더 큰 그의 머리를 끌어내린 후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뭐라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못 보던 새 얼굴에 큰 상처가 하나 늘었다. 나는 씩 웃었고, 내 얼굴을 바로 앞에 둔 숄랑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치고 박고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묻고자 했다. 그래서 잡으려 한 건데 이렇게 경기를 일으키고 도망치면 내가 속상하겠어, 안 속상하겠어. 팔에 힘을 주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극적으로 내 비위를 맞추려하던 마음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야, 내가 다른 때 같으면 놀겠는데 지금은 진짜 급하거든.”

“그런 것 같아. 해서, 하나만 묻자.”

“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아, 모르고 있는 거냐?”

숄랑은 내 팔을 덥석 잡더니 제 목에서 풀어냈다. 그렇게 허공에서 탁 놓자마자, 쓰러지는 나무처럼 돌아와 달랑거렸다. 곱게 놓는다는 선택지는 그의 사전에도 없고, 내 사전에 없었다. 곱게 놓아주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싸움이 났을 것이다. 이 자식이 무슨 닭살이냐고.

그는 목 뒤를 쓱쓱 문지르곤 어깨를 으쓱했다.

“오드리나 외성 바로 바깥에 괴물들이 출몰했다.”

“괴물들? 바로 바깥?”

“그래. 바로 바깥. 문을 부수려 들 정도로 가깝게.”

“…….”

“네 방패 놈 없으면 최대한 오드리나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이 정도로 가깝게 다가왔으면 오드리나로 들어오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 안색이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숄랑의 거죽 두꺼운 손이 내 정수리를 툭툭 무겁게 두드렸다. 답지 않은 손길이었다. 그는 쓴웃음으로 보이는 웃음을 이어 지었다.

“나중에 만나면 술 한 잔 사라. 저번에도 네가 샀지? 또 사.”

친근한 인사로 가장한 친근한 시비를 남기고 숄랑은 이만 나를 지나쳤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보았다. 괴물? 오드리나? 신성한 힘으로 보호받는 수도에? 문을 부수려고 해? 오드리나의 외성부터 일정 거리의 땅에는 신성한 힘의 여파가 있어 괴물들은 좀처럼 다가오지 못해야 했다. 그런데 뭐라고?

……말이 돼?

나는 로브 앞섶을 움켜잡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숄랑이 조언한 방향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역주행. 원래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달렸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나를 성벽에 올려 보낼 미친 자들은 없다. 내 신분을 이용해도 이는 안 될 일.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차기 공작이 될 귀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용병으로 신분을 밝히면 더더욱 오를 수 없다.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기사들이 있고.

해서, 성벽에 도착했을 때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적당한 수를 써서 위로 올라갔다. 벽 위를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병사는 몇 되지 않았다. 망루를 한 번 올려다본 뒤에 나는 사람 없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찬 회색 벽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입술은 이미 마른 데다, 호흡마저 불안정했다. 벽 너머에서는 비명, 웃음, 비명,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인즉슨 죽는 소리. 벽에 손을 올렸다. 오목여장의 사이로 광란하는 괴물 하나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로부터 내 시야는 점점 넓어졌다.

“…….”

괴물들이 도달할 당시 외성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신이 너무 많았다. 전투 중에 발로 채여 데구르르 구르는 목. 미처 몸에서 떨어지지 못한 목도 있고, 어딜 찔려 죽은 시신의 경우 몸 전부가 발에 채이고 있었다.

오드리나에 괴물이 이토록 가까이 다가왔던 적이 없어서 군기 느슨했던 수비대는 이미 무용지물이었다. 오드리나에 머무르고 있던 용병들이 굳이 나가 싸우고 있는 까닭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도움이 되려면 각지 토벌에 파견되었던 기사단이 나와야 할 터.

아, 잠깐. 돌 부스러기가 붙은 손을 회수해 배를 눌렀다. 잠깐. 이건, 꿈인가? 가래처럼 끈끈한 침이 목구멍에 붙었다. 삼키려 해도 떨어지지 않아 답답했다. 나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둥 회피할 수는 없었다. 훅, 하고 세게 숨을 내쉬었다. 산 정상에 오른 것처럼 고개를 들어 다시 훅. 먼 지평선을 훑으며 다시 한 번 훅. 마음이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붕 떠서 실로 복잡하던 생각의 실이 다시 가라앉았다. 한 올 한 올 풀려가기 시작했다. 오드리나가 공격을 받는다……고.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외려 내가 여태 생각지 못하고 있던 내 생활의 곁가지들이 떠올랐다.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 그 엉긴 기억 중 어딘가에 있을 텐데.

어째서 갑자기. 나와 관계없는 화면을 보는 듯 저 전투에도 비교적 침착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이 일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여장에 올린 손을 약간 오므렸다.

그리고 살해의 현장을 묵묵히 읽어 나가던 내 눈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어깨가 굳었다.

헤르조였다.

“헤르……!”

나도 모르게 그를 부르려던 입을 소리 없는 비명이 틀어막았다. 헉. 괴물이 그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급박한 상황 이전에, 이제 우리는 이름을 부르며 팔랑팔랑 뛰어다닐 사이가 아님을 잊고 있었다.

나는 헤르조가 몸을 돌리는 움직임에 맞추어 팔도 함께 뒤로 휘두르는 것을 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잇새 사이로 뜨겁게 떨리는 숨이 파들파들 새어나왔다. 그가 살았다. 안도하면 된다. 그리고 잊으면 돼.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괴물 떼거리를 만나면 헤르조를 프렌드 실드로 썼다. 툭툭 등을 떠밀거나, 아니면 아예 확 밀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낄낄 웃으며 그 악에 받친 싸움을 보곤 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내가 그의 가까운 뒤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잖아.

나는 허망하게 입을 뻐끔거리다 완전히 주먹을 쥐었다. 헤르조는 다시 오드리나를 떠나려다 저기에 있는 것일 테고, 나는 어제 그와 결별했다.

걱정조차 옳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젠장.”

그리고 이마를 짚었다.

설정이 나 아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그 이유를 숙고해보았자 제대로 떠오르지 않을 테고, 이 상황에는 필요도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내 짐작대로라면, 괴물들은 제멋대로 움직인 게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괴물이 내 손의 설정을 떠나서 더 악랄해졌다면 그건 악몽이다.

나는 긴장 어린 심호흡을 했다. 이제 막 잡혀서 갈기갈기 찢기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저런 싸움에 나는 헤르조를 프렌드 쉴드로 소환하여 밀어 넣고, 뒤에서 안전하게 쪼그려 앉아 지켜보았었다. 양심에 찔린 적은 없다. 그러나 저 사람들이 죽는 것에는 양심에 거리낌이 있었다.

괴물들을 내가 설정하지 않았다면. 저런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아리엘의 최종적인 행복을 위해,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괴물을 설정하지만 않았다면.

나는 괴물을 보거나 괴물에 대해 생각할 때면 항상 후회했다. 그리고 그 후회 중 하나. 아리엘. 내가 글을 쓰며 널 아낀 정도가 아마도 지나쳤다.

“…….”

왼 주먹을 풀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 해도 될 일은 명백해졌다. 손끝에 돌가루가 닿았다. 쿵, 하고 묵직하게 마나 움직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하늘마저 가라앉는 듯했다. 이 정도 분량의 마나를 움직이면 마법사들은 이 웅장한 압도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들킬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쓰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마나의 결이 보인다. 잡았다. 그리고 명령했다.

가서 죽여라.

============================ 작품 후기 ============================

+마법사 관련해서는, 에본느가 다이어몬드 빗핀을 없앴다든지 하는 등의 표현으로 몇 번 힌트 드렸습니다:D

힌트 찾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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