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7화 (17/157)

00017 CHAPTER 2. 악을 위하여 =========================

*

“아리엘이 여기에 정말 있으려나…….”

아리엘을 누이로 가진 베르덴은 실마리 하나를 던져주었다. ‘포르타경이나 도련님을 뵈러 가지 않았겠습니까.’

아하. 맞다. 그랬지. 아리엘은 칼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외려 좋아했다. 여타 아가씨들과는 많이 다른 점이다.

“있네.”

“…….”

“와. 경 진짜 여동생이랑 친하나 봐요.”

“도련님께서 무얼 좋아하시는지는 아가씨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응? 모르는데?”

멀뚱하게 부정했다.

쥰이 무얼 좋아하는지 글 쓰며 정했던 것들은 다 잊었다. 그런 걸 흑역사 수첩에 적어 두진 않았었고, 자라면서 그 아이의 취향을 일부러 살피고 기억할 정도로 큰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이번에 준 생일 선물만 해도 야시장에서 급히 산 인형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 중 대충 집히는 대로 준 것밖에 더 되나. 성의도 없었다. 나는 쥰이 무얼 좋아하는지 모른다.

“아가씨.”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건 더더욱 모르지요.”

그러니 별 것 아니다. 너무 무겁게 반응할 필요 없어. 나는 쥰을 족히 아끼고 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다. 쥰이 내 애정을 바라고 있다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 나는 멋대로 주고 있는 것뿐이니까. 멋대로 주는 애정은 서로에게 해가 가지 않고 서로 부끄럽지 않은 선에서 가져야 하질 않겠는가.

종종 애정의 분량이라는 것은 내게 참 애매한 개념처럼 느껴지곤 한다. 애정 자체도 그렇고.

나는 연무장 안의 의자에 앉아 있는 아리엘을 보며 입을 열었다.

“경. 나는 필르 발리앙이 전하의 짝이 되면 좋겠습니다.”

“……필, 르 발리앙 말씀이십니까?”

“예, 당신의 누이요.”

“……그래서 필르 발리앙과 함께 입궁하신 겁니까?”

교활한 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베르덴에게 개자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알겠다.

방금 고백 받은 사람의 짝이 네 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니.

나는 아리엘을 지금 사랑하고 있을 지도 모를 쥰도 배제했고, 내 옛 친구인 헤르조도 배제했다. 오로지 아리엘이 사랑하는 사람이 알드리히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정을 거부하지는 않겠다. 나는 아리엘이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에 약간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야기대로 흘러가준다면 나는 다 막아낼 자신이 있다. 그러나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도 역시 하고 있다. 아리엘의 회귀 전에, 아리엘은 쥰의 생일 다음 날 나와 함께 황궁에 입궁한 적도 없고, 쥰이 나를 감쌀 정도로 에본느 남매의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아리엘의 오라비인 베르덴이 에본느의 기사이지도 않았지.

언젠가는 분명 떠날 거지만, 떠나기 전까지 아리엘의 분노를 중화시키고자 하는 건, 세상 어디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적길 바라서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전과 다르게 나는 죽음에 대한 분노를 알고 있었다.

기실 내가 정말 죽었는지는 확신치 못하지만, 설령 죽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는 지구에서 벗어나 이곳에 와있다. 더군다나 아리엘은 믿었던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것과 마찬가지인 수준까지 몰렸었다. 그 분노가 결코 작다고는 못할 터.

“예.”

“이해치 못하겠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아리엘이……. 아리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아리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멋대로 움직였던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아리엘. 그 사건을 내가 썼다 하더라도, 네가 날 엿 먹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널 위선적으로나마 위하는 이유는,

그 이유는…….

“음, 정에 취했을까요? 나 말입니다. 경. 정에 취해서일까, 아니면 이 환경에 안주하고 싶어서일까요?”

그녀의 분노가 따가웠다. 정확히 말하면, ‘놀랍도록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다.’

평온을 유지하기가 쉬웠던 시간이 너무 길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질투 섞인 적의에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익숙하단 말이 그걸 쉽게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 익숙한 느낌도 내가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 줄어갈수록 줄어들었다. 여기에 와 사교계에서 지내며 다시 그 적의를 받는 횟수가 늘었으나, 전에 비하도록 무서운 것들은 아니었다. 여기 아가씨들은 훨씬 가식적이었고, 나는 꽃이었다.

그런데 회귀한 아리엘의 눈은 기묘할 정도로 어제부터 나를 뒤흔들려는 중이었다.

목숨을 건 분노는 처음이라서 그런 것 같다. 약간의 동질감이 느껴지는 아리엘보다는 아리엘의 분노 자체가 내게 옛 스트레스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건 상당히 매웠다. 이십여 년을 이곳에서 살면서 점차 잊고 점차 낯설어졌던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겪지 않으면 잊는다.’

그 사실을 나는 선명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쪽이라도 한심해.”

“…….”

희극적으로 푸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봐 봐요. 경. 나와 열흘 길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한테도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는 건 참 비경제적이죠. 그럼에도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이걸 듣고 포르타 영식이 내게 그러더군. 안 어울리게 완벽주의자라고.”

“…….”

그러고 보니 그 말, 기분 나빠해야 했을 것 같은데.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기분 나쁘다고 표현하기엔 이미 늦었어.

나는 약간 불퉁한 얼굴을 하곤 뒷머리를 쓸었다. 완벽주의가 안 어울린다는 말은 여기 와서 처음 들어봤다. 너 완벽주의자일 줄 알았다는 말은 들어보았을지언정.

“그런데 더 간단해요. 나는 참 한심해서, 친구의 미움이 단지 무서운 거예요. 내가 받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요.”

막상 나는 항상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예상을 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아리엘의 옆에 있던 기사가 나를 보고 아리엘에게 몸을 숙였다. 아리엘이 이쪽을 보았다. 말을 맺자마자 나는 방긋 웃으며 익살맞게 손 키스를 날렸다.

“어휴, 예뻐라. 경 누이는 역시 세계 최고 미인이라니까.”

아리엘이 앉아있다는 건 쥰이나 시드니가 있다는 말인데, 일부러 기사들 쪽은 보지 않았다. 나는 목 짧은 장갑 안에 넣어두었던 종이를 주섬주섬 느꼈다. 왼쪽 손바닥에서 부스럭거리는 그것에는 내가 오늘 아리엘에게 해야 할 말이 정리되어 있었다. 간만에 쓴 한글치고 필치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문법도, 단어도 거의 본능으로 떠올려 썼다. 이 나라의 언어는 글자가 참신하다 뿐이지, 그 외의 요소는 한국어와 비슷하니까.

언어 쪽은 고어를 제외하고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설정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지만, 오니까 그렇더라. 나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주춤거리며 일어나려는 아리엘을 손짓으로 마다했다. 괜찮다. 기다릴 수야 있었다. 말했던 것처럼 볕도 좋고, 바람도 선선하게 부는 예쁜 날이다.

다만, 양산을 가져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긴 들었다. 나는 잠시 연무장 주변 다른 건물이나 돌아볼까 하여 몸을 돌렸다. 그래서 내 바로 뒤에 있던 베르덴과 맞닥뜨렸다. 나는 멈칫 물러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베르덴은 내 왼 팔을 잡았다.

물에 적셔가는 천처럼 천천히 죄여갔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상냥하지 않았다. 나는 의연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분칠을 하듯, 오른 입 꼬리를 올리는 웃음을 발라갔다. 비웃었다.

베르덴이 이 악물고 물었다.

“아리엘이 아가씨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내가 말했지. 그에게 개자식이 될 수도 있다고.

“미워해요? 아니요. 아니요.”

미워하다니.

나는 웃으며 잡힌 팔의 손을 바깥쪽으로 돌려 베르덴을 잡았다. 호신술을 간단하게 응용했다. 이제 우리는 서로 팔을 잡고 있었다.

내 웃음이 좀 더 느려졌다. 꽃비가 내렸다.

“날 죽이고 싶을 거예요.”

그의 턱이 일순 떨렸다.

“그 착한 아리엘에게는 안 어울리지 않아요?”

이 모든 말이 지나치게 뜬금이 없지. 믿는 사람이 바보인 거다. 식어가고 있는 가슴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 최대한 늦게 끝내고 싶지만, 어차피 헤르조처럼 배신할 거라면 일찍 끝장이 나는 편이 나았다. 베르덴이 어제 내 부끄러운 눈물을 앞에 두고 한 말은 발리앙의 핏줄이기 이전에 내 기사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아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리엘이잖아.

그가 나보다 뒤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람이 아리엘이잖아. 그게 말이 되나. 동생이다. 내가 한국을 뜸으로 잠적하기 전까지 결국 놓지 못했던 사람이 동생들이었다. 미워 죽겠는데도 포기하지를 못하겠더라. 가치 없어야 하는데 가치 있었다. 내리사랑은 무시치 못한다. 나는 안다.

본디 사이좋던 남매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베르덴은 돌아가서 발리앙 맏이의 역할을 할 때가 왔다. 나는 잠재적인 배신자를 곁에 두고는 불안해서 살지 못한다. 제자리로 돌아갈 것은 돌아가고, 끝낼 것은 끝낼 때가 왔다. 본디 내가 쓴 글에서 베르덴은 아리엘의 든든한 조력자다.

나는 꽃비를 맞으며 한숨 쉬듯 말했다.

“미움 받기 싫어요. 그리고, 그녀에게 죽고 싶지도 않아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었다. 그래서 아리엘이 회귀하지 않길 바랐더랬다. 그녀의 선한 술책, 그 선한 복수에 걸려들어 형장에 끌려갈 에본느는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냥, 아예 처음부터,

기왕에 강도에게 온몸을 찔리는 끔찍한 고통을 당했으니 이곳에서 눈뜰 일이 없었다면 좋았을 걸. 나는 눈을 좀 더 들었다가 시선을 도로 고쳤다.

호흡도 고쳤다.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벙긋 웃었다. 그리고 조금도 슬프게 보이지 않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경. 날 믿어요?”

내 눈이 가늘어지며 눈웃음을 지었다.

바깥에서 말을 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사람은 집처럼 익숙한 곳이나, 그 외 실내에서 어떤 고백을 듣는 것보다 바깥에서 들을 때 비교적 평정을 유지한다. 눈이 있으니 유지할 수밖에 없지. 말하는 화자의 경우에도 무거운 고백을 부담을 훨씬 던 상태로 할 수 있었다.

찾지 않아도 되는 아리엘을 굳이 찾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오늘 그녀와의 이야기를 끝낼 작정이었다.

나는 베르덴에게 하나를 더 물었다.

“말해 봐요, 경. 경과 나의 우정은 진실된 것이었나요?”

“…….”

몰아세웠다. 베르덴은 나를 내려다보다 눈을 감으며 고개를 조금 틀었다. 잠시 후 내 잡힌 팔이 사르르 풀렸다.

나는 씩 웃었다. 예상했다. 헤르조 같은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랑에 정말 미칠 정도로 눈에 비늘이 덮이지 않는다면, 이성보다야 친구를, 친구보다야 가족을 선택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은 참 헛된 것이다. 우정도 물론 헛되다.

나 역시 그의 팔을 풀어주었다. 벼랑에 매달린 사람을 구해주듯 서로 얽혀 있던 두 팔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헤르조와 헤어진 이상, 최대한 늦게 끝내고 싶었던 연. 나의 친구야.

눈 감아 나의 시선을 모르고 있을 그를 최대한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나와 가깝던 세 인물을 이틀에 걸쳐 떨쳐버리는 중이었다. 내가 공녀의 자리를 계속 원했으면 아리엘과는 아예 개싸움이 될 뻔 했다. 입을 다물고 한숨 쉬듯 웃자, 훗 하는 콧바람이 나왔다.

나는 살아야 한다.

죽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리엘의 분노를 사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아예 떠나는 건 차선.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집에 박혀 있는 것이 싫은 거지. 공작이 되지 않고 떠나는 건 최대한 늦추고 싶은 일이다. 떠난 후의 내 생활이 눈에 보일 듯 선하여 끔찍해서.

손을 들어 그의 왼뺨을 감쌌다. 어제 헤르조에게 한 것처럼.

똑같다. 나는 내 목숨을 위해 인연을 끊는 중이다.

버려지느니 내가 앞서 버리고, 반드시 경멸 받아야 하느니 차라리 내가 그 경멸을 의도하겠다. 그런 못난 주도권이라도 잡겠다.

그새 말라버린 입술을 달싹이다 소리를 담았다.

“한 달 내로, 경, 경은 포르타 영식과의 우정을 회복하게 될 겁니다.”

베르덴의 눈이 뜨이고, 묵묵히 나를 보았다. 눈동자가 떨리는 듯했다. 베르덴은, 실은 그의 어렸을 때 헤르조보다도 성질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경어로 시작하여 차츰 갈고 닦아 나가더니 그는 이윽고 차분해졌다. 시드니를 복제해둔 것 같다며 헤르조가 질색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했다. 저건 선이라며. 내가 내 어린 친구들에게 좀 더 많은 웃음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베르덴은 차분해지며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시 말해 에본느 스물다섯 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바뀌었다. 내가 쓰지 않았던 그의 어린 시절이 불같았다는 걸 안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손을 거두었다. 헤르조를 끝내는 것보다 마음의 격동이 덜했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요.”

“……진정 내치시는 겁니까?”

“내치는 게 아니라……. 이런, 경.”

할 말을 제대로 고를 수가 없었다.

하여 나는 이만 그를 지나치려 했다. 베르덴이 내게서 물러나 무릎을 꿇지 않았다면.

비단 기사의 형상이 아니라 죄인의 형상이었다. 기사가 주군 아닌 사람에게 두 무릎을 꿇는 건 더 없는 굴욕이다. 이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연무장 안의 기사들에게 보일 것이다. 작은 폭포수처럼 부드럽게 흘러 떨어지는 드레스 자락을 흉하지 않게 잡고 몸을 굽혔다. 베르덴과 눈높이가 맞도록 쪼그려 앉은 뒤 두 무릎 위에 양 팔을 올려두었다.

우리 둘이 하고 있는 건 기사가 할 일이 아니고, 영애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쓴웃음 지은 그대로 한숨을 쉬고는 표정을 풀었다.

“베르덴.”

“…….”

“후작 각하께는 네가 내게 맹세하기 전에 이미 말씀드려 놨었어.”

“예?”

“넌 언젠가 반드시 돌아갈 거라고. 반드시 내가 널 내칠 테지만,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시지 말라고.”

“아가씨!”

“나는 모종의 이유로 네 누이에게서 위협을 느끼고 있고,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을 걸 처음부터 알았어.”

역시 여기 인간관계는 깊게 맺지 않는 게 서로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도 마음이 덜 아프거나 아예 안 아플 수 있었는데.

정말, 아프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홀로 있도록 지키고자 했던 내 마음은 소리 없이 물들어왔다. 이들에게.

“…….”

“우리 우정을 시험해서 미안해. 우리 이십 년 시간을 시험해서 미안해.”

미안하지 않다. 미안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는 것을 놓고 고르라 해서, 미안해.”

미안하지 않다.

미안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는 공작이 되지 않았을 테고, 그럼 언젠가는 끝나야 했던 관계였어.”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못 들은 척했다. 실로 실수라 하더라도, 내가 의도한 실수다.

또한, ‘실수라니, 그렇다면 누굴 믿을 건데?’하고 꼬투리를 잡으면 그가 이번에는 능히 대답할 수 있으랴. 나는 그 상상에 부정적이었다. 누군가가 내 앞에 내게 무릎 꿇고 있는 게 편치 않았다. 어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내가 먼저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씹었다가 침을 삼켰다.

“……경. 내가 당신이 이곳에서 지킬 수 있는 존엄성 정도는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저는 아가씨의 기사입니다. 발리앙이기 이전에 당신의 기사입니다.”

그건 어제도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었지. 가족의 정이 앞설 것이라고.

나는 소리 나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그런데 나를 믿지 못하고 망설였지요.”

“…….”

설령 내가 몰아세우고 의도한 것이라도, 어찌 되었든 그는 망설였다. 그 망설임에 대해 나쁜 감정은 없다. 그럴 것이라 반쯤은, 반 이상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망설이도록 아마도 내가 몰았다. 망설이지 않았다 해도 나는 다른 이유를 붙여서라도 그를 이 자리에서 잘라냈을 터.

망설여주어 차라리 고마웠다. 나는 어떻게든 이유를 붙여야 했고, 이 정도는 그럭저럭 이유일 법한 이유였다.

잡았던 나를 풀었다.

“내 시선을 너무 편협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호위 기사가 든든하게 중립적인 시선을 가져주는 것이 좋습니다. 알아요. 호위 기사는 신중해야 하지요. 그런데, 왜, 그런 아가씨 있잖습니까. 굉장히 막무가내인. 한 번의 무시도 못 받아들이고 난리를 치는.”

“…….”

“이 순간은 그런 아가씨가 되기로 했습니다. 자신 있어요. 내가 오늘 라이네 저택으로 돌아가서 아버지께 어떻게 참신한 생떼를 부리는지 봐요. 흥미진진할 겁니다. 바닥에 누워서 막 파닥대야지.”

“아가씨. 부디”

“오라버니!”

베르덴의 입이 꽉 다물렸다. 나는 달려오는 아리엘의 맑은 목소리를 듣고 잠시 후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나는 수많은 기사들 앞에서 아리엘의 오라비를 무릎 꿇린 여자가 되었다. 베르덴 끊어내다가 아리엘의 분노만 더 쌓게 만드는군.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리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서 분노를 키우는 것보다, 황망함이 약간이라도 남았을 지금 처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몰려 죽은 사람에게, 내 말이 들리기나 할까. 나와의 대화 내용이 그녀가 분노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옆에 선 아리엘은 내 손을 거부하고 있는 베르덴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일어나세요. 이게 지금 무슨…….”

“…….”

베르덴도 나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아리엘이 마침내 나를 돌아보았다.

“에본느!”

또 다시 적의가 스쳐지나갔다.

순간 공기마저 굳은 것 같았다. 얼음물이 정수리부터 온몸을 적셔 내리는 것처럼 마지막에는 발끝이 찌릿찌릿 아파왔다. 차갑다. 굳은 게 아니라 내려앉아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 느낌은 내 상상이 필시 아니었다.

제길. 이건. 시드니가 말했던.

내가 표정을 일그러트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아리엘은 훨씬 당당하고, 정말이지 내가 아는 그녀답지 않도록 차갑게 말을 박았다.

“아무리 라이네라 하더라도 이건 말도 안 돼요. 에본느. 오라버니는 발리앙의 후계자……이셨던 분이에요.”

“…….”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리다니. 이 무슨 무례를.”

목 주위가 섬뜩했다. 무언가가 맴도는 느낌, 목을 조르거나 쳐서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그…… 아리엘의 살의. 나는 즉각 판단했다. 살의다. 살의에서 파생된 움직임이다.

그 판단에는 근거가 있었다. 아리엘이 죽은 방법이 참수였다 하는.

그녀는 나를 목 잘라 죽이고 싶을 것이다. 내가 그리 썼다.

나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침을 삼켰다. 이런 일에서 내 기감이 상당히 예민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견디기 힘든 건 내 목을 맴도는 것의 정체나 속성이 아니라, 예민한 기감 탓에 높아진 섬뜩함을 조금도 내색할 수 없는 작금이었다.

사전에 시드니에게서 말을 들어두지 않았다면, 지독하게 당황하고 지독하게 두려워할 뻔했다. 또 글이 내게 경고를 하고 있는가 하여. 그가 떠오른 김에 그의 무뚝뚝하고 신중한 무표정을 일부러 떠올렸다. 훨씬 차분해질 수 있었다. 자아……. 아리엘이, 방금 무얼 말했더라.

이 무슨 무례냐고.

순간적으로 그녀의 맑은 눈이 어둡게 느껴졌다. 손에 힘이 들어가려 했다. 아리엘의 저런 눈을 나는 무어라 묘사해 놓았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을 떼었다.

“경은 내 호위 기사이고, 따라서 아리엘이야말로 내게 무례한 말을 하고 있어요.”

“에본느……! 어떻게 제게 그런 말을……!”

어젯밤 내 손으로 내친 것처럼 보인 아리엘이. 이런 곳에서 저런 말을 하면.

나는 웃음이 얼굴에 스치지도 못하게 했다. 잠시라도 스쳐서는 아니 된다. 삼켰다.

“…….”

얇게 드러난 팔뚝에 오소소 서리가 내려앉았다. 아니, 소름이. 살의의 섬뜩함이. 그러나 그렇다고 우습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멋쩍은 척 웃으며 신중하게 두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보였다.

“내가 장난을 심하게 쳤나 봐요. 무서운 이야기를 좀 했더니 다리 힘이 풀렸다고…….”

“……뭐라고요?”

“아리엘도 봤죠? 나도 놀라서 얼른 일으켜세우려 했던 것. 경은 내 호위기사이고 내 친구이지만, 맞아요, 아리엘의 오라비이기도 하지. 동생 앞에서 수줍은 모습 보이게 해서 미안해요.”

이 순간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많았으나 적당하게 사과했다. 손가락으로 개미를 눌러죽이지 않고 너그러이 보아주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나는 무력하기로 관대하게 결정했으므로.

때문에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네 살의, 눈치 채지 못했다고. 네가 자연의 것을 끌어와 내 목을 조르려 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아리엘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포기했다. 아마도 그래서 끔찍하게 오른 이 감정은, 어쩌면 불안감이었다.

베르덴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지금 내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깨달았을 터. 이제야 순순히 일어나 아리엘을 달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 속에서 내가 순간적으로 찾아내 눈 마주친 사람은 쥰이 아니라 시드니였다.

나는 당연히, 자연스럽게 시선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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