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6화 (16/157)

00016 CHAPTER 2. 악을 위하여 =========================

“괜찮으십니까?”

“아…….”

결국 입에서 신음이 새었다.

역시 나, 지금, 정신없는 거지?

손을 들어 뒷목을 잡았다. 묘하게 여유 없게 느껴지던 알드리히의 얼굴이, 그 여유 없는 표정이, 내가 했던 거절이, 전부 물 흐르듯 떠올랐다. 나는 재차 앓는 소리를 냈다.

“아…….”

그러나 그 신음이 내 호위 기사에게는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음을 깜박했다.

“다치셨습니까?”

내가 제대로 서자마자 손을 떼고 묻는 베르덴의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 차분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그는 놀랐다. 아무렴. 격의 없이 지낸 게 몇 년이요, 내가 시비 걸어 결투를 한 게 몇 년인가. 그 정도는 서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제의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은 숨기는 것에 능하여 저는 당신의 의중을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이십여 년 지속된 우정에도 선은 있었다. 내게는 웃음과 발랄한 기행이 그랬고, 베르덴에게는 역사 오래된 경어가 그랬다.

선 아래의 우리는 숨기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젯밤 베르덴이 내 웃음을 건드릴 줄은 몰랐다. 숨김 운운 하는 건 우리 서로 선을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당시에는 내 울음과 진정이 바빠 넘겼지만 꿈에서조차 그 말이 나오더라. 선을 넘어 엉망이 된 우리 우정이.

어제 베르덴은 너무 많은 걸 쏟아놓았다. 도로 합쳐지려면 사소한 시비와 결투가 필요한데, 지금의 나는 발랄한 시비를 걸 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손과 그의 염려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다쳤어요. 경이 내 여린 마음에 상처를 냈거든.”

“…….”

정중하게. 거절.

헛소리를 들었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베르덴이 나를 보았다.

“말 돌리지 마십시오.”

“아, 들켰나?”

삐죽 웃고 나서 몸을 돌렸다. 보폭은 더 이상 넓지 않았고 걸음이 거칠지도 않았다. 베르덴이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이다.

헤르조와 결별한 이상 최대한 늦게 끝내고 싶은.

“아리엘은요?”

“시종장이 기사를 선택하여 동행시켰습니다.”

“같이 돌아가야 할 텐데요. 어찌 해야 하나.”

“정 피로하시면 먼저 들어가시지요. 자리를 이탈한 분은 필르 발리앙입니다.”

생각보다 매정한 발언이 나왔다. 나는 건물에서 나와 햇빛을 보며 묘하게 웃었다. 그 필르 발리앙이 네 여동생이에요, 인마.

“오늘 볕이 좋아요. 그렇죠?”

노랗고도 투명한 이 한때의 빛은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 너무 진하지도 않고, 너무 옅지도 않아. 노을 진 붉은 오후가 나를 몽롱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베르덴이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아리엘을 한 번 찾아볼까요? 적당한 볕은 건강에도 좋고.”

그리고 그 전에 네놈을 응징하겠다. 옷을 정돈하는 척 뒷걸음질 치다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찍었다. 필시 그런 감상을 할 수 있는 너는 누구냐, 하는 뜻이었을 터.

지나가던 시종 한 명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말았는지, 움찔 우리를 보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씩 웃었다. ‘당장에 못 본 척 꺼지지 않는다면 뒷일은 장담할 수 없다.’ 라이네 공녀는 미소가 천진하고도 우아한 꽃으로 남아있어야지, 그렇지? 시종은 애써 미소 짓곤 인사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런데 시종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해보니 대외적으로 알려진 내 이미지는 이미 우아하지 않은 쪽이었다. 음.

베르덴이 내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왜 애꿎은 시종을 겁주십니까.”

“시종들이 겁준다고 겁먹을 인사들입니까?”

“아가씨는 전하의 총애를 받는 분이라는 걸 기억하십시오.”

“…….”

쓸데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잊으려 했건만. 그가 결국 상기시킨 바에 대하여 웃으려 했지만 일차적으로 실패했다.

입을 꽉 다물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담담하게 넘길 수 있던 그 단어가 이토록 듣기 싫을 줄은 몰랐다.

나는 진심으로, 황태자가 아리엘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풋사랑이자 첫사랑이 마음 깊이 박혔다고. 내가 그렇게 쓰기도 했고, 아리엘이 첫사랑이라는 이야기도 그 스스로 했으니까.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목메어 침묵으로 울부짖는 중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 조금 끔찍했다. 음, 아니다. 확언은 못하겠고, 끔찍할 지도 모르겠다. 내가 내 속을 모르겠어. 손을 들어 배를 감쌌다. 다시 떠올려도 막연한 역겨움이 있었다. 토할 것 같은. 아, 이건 역겨운 게 아니라, 긴장이나 초조 같은 걸까.

사랑?

아리엘을 향해야 할?

거기까지 생각한 내 입술이 양옆으로 쪽 늘어났다. 문득 자각한 까닭이다. 웃음을 잊고 있었다. 아, 나는 웃어야 한다.

“……그게 그렇게 충격이십니까?”

“뭐가요.”

건성으로 되묻자 베르덴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 아가씨께 마음이 있다는 것.”

“……난 실력 있는 무인들이 제일 싫습니다. 그게 또 들어집니까?”

“그 실력 있는 무인들이 눈치도 채지 못하게 유유히 사라지곤 하시는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서 다른 꼬투리를 잡았다.

“……그리고 방금 질문은 정말 배려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난 정말 이런 패턴에 약하다. 양심의 둔통을 참을 수 없어 말을 고쳤다.

“아, 아니야. 아니에요. 거짓말이었어요. 경이 날 배려해준 질문이잖아요. 알아요.”

나는 마음을 정리할 때 말로 하지 않으면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충격을 받았으면 충격을 받았다고 말로 하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러지 않으면 파도치던 마음에서 해일이 일어.

파하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 받았어요.”

“…….”

“낌새도 안 보였어. 한 번이라도 상상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이분이 나를 좋아하나? 하는 의문이 잠깐이라도 든 적이 없었어요.”

“…….”

“소름……, 끼칩니다. 우와아, 소름. 다시 생각해도 소름. 어떻게 저한테 그런 감정이 드신답니까? 전하께서 내게 시비를 걸면서 지내신 게 장장 몇 년인데요? 도대체. 내가 진짜. 예전에 헤릊, 포르타 영식이 나한테 장난으로 고백했다가 그날 걔 작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르조를 향한 내 마음도 꺾이기 직전까지 갔었다. 헤르조가 곧바로 낄낄 웃으며 우리 에본느 표정 보라고, 장난임을 시사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몹시도 편해졌을 것이다. 나는 그를 좋아했으나, 우리는 결국 친구였다. 친구여야, 했다. 그는 아리엘을 좋아하니까.

처음부터 내 짝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날 것을 알았다. 짝사랑이기에 시작했을 지도 모르는 감정.

나는 빛을 보다 못해 손 그늘을 만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끼쳤다.

“포르타 영식도 그랬는데 하물며 황태자 전하라고.”

순서가 그랬다. 그리도 친했던 헤르조도 그만 내쳐야 할 때가 왔느냐고 마음이 차가워졌었는데, 알드리히라고 다르겠는가. 우린 지인으로 남아야 한다. 그러는 게 좋다. 아리엘한테 죽긴 싫어서.

알드리히가 내게 한 고백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친구 이상으로 엮여서는 아니 되는 관계였다. 회귀한 아리엘은 나를 잔혹하게 죽였다. 아니, 그러니까, 이 몸을. 에본느를.

팔에 다닥다닥 돋았던 소름도 거의 정리 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분명해졌다.

“전하의 부르심으로 올 일은 이제 없을 거예요. 음. 없어야 하는데.”

“…….”

“경은 어떻게 생각해요? 반대해요?”

그를 돌아보았다. 나보다 뒤에 있던 그의 얼굴에는 콧날 그림자가 져 있었다. 어둡다. 눈을 찌푸리고 그를 보고 있자니, 베르덴의 손이 올라와 내 손 그늘을 도왔다. 눈 옆을 막아준 그가 옅은 한숨을 쉬고 입을 달싹였다. 대답은 아니었다.

그대로 잠간의 침묵. 그는 눈을 부드럽게 감았다 떴다.

“뜻대로 하십시오.”

“그게 뭐야.”

나는 씩 웃었다. 기사의 정석을 행하는 중인가. 다른 호위기사라면 저리 대답하는 게 보통이지만 베르덴이 할 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차피 베르덴이 반대해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인 고로…….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이 일에 대한 결정은 확고했다. 반대가 나오면 내 마음만 불편해질 따름이다. 이만 가자고 하기 위해 그의 팔을 가볍게 잡았는데,

그가 말했다.

“아가씨께서 이 일로 인해 떠나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예? 아, 가출이요?”

슬슬 머릿속 얕은 곳으로 꺼내려 하던 계획과 닮은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내 반응은 늦었다. 뒤늦었고, 어수룩하기까지 했다. 가출을 말하는 거냐고 덧붙인 게 다행이다. 임기응변에 이만큼 강해졌을 줄이야.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몸을 틀었다.

“에이. 안 합니다. 한다고 해도 경한테는 말 안 해요. 지난 번 결투를 아직도 잊지 않았거든요?”

“가출을 말씀드린 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런데 넘어가주겠다고요? 마음 넓어라.”

팔뚝을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이것 역시 선이다. 넘지 마라.

다시 떠올랐다.

-후작 작위보다는 아가씨가 중요했습니다. 헤르조와의 우정보다도 당신의 일이 중요했습니다.

-헤르조와의 우정보다, 나와의 우정이, 중요했겠지.

-……예. 우정이.

다시 생각해도 베르덴의 말은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다.

단어의 선택이 묘하게 뒤틀려서, 그 순간의 공기가 참 답답했던 것도 아직 선연했다. 우리의 우정. 정말 있긴 있었나. 왜 베르덴은 거기서 기묘한 답을 하였을까. 너무 느렸고, 너무, 진득했다. 그게 내 어설픈 짐작과 어설픈 의심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당시의 느낌은 분명 나를 소름끼치게 했다.

……어쩌면 베르덴과 친구지간으로 지냈던 것이 처음부터 잘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글대로 우리가 멀었다면 어땠을까. 글대로 나와 알드리히가 그리 친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내게 수많은 것들을 재고하고, 후회하고, 상상하게 만들었다. 내 가치가 추락하는 기분이다. 내가 나를 부정하는 느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겉으로는 싱글벙글 웃으며 몸을 완전히 돌렸다. 눈이 조금 시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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