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CHAPTER 2. 악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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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드리히에게서 다음 날 오전 중에 기별이 왔다. 시간을 비워두었으니 입궁하라는 전언이었다. 이거, 뭔가 들었군. 마침 잘 되었다 싶었다. 나는 아리엘에게 소식을 알리고 채비를 하게 했다.
그리 크게 가치를 두고 있지 않는 인간관계에 괜한 미련을 두다 쪽박 차는 일은 없어야 했다. 설령 경멸을 받는다 해도 내가 의도한 경멸을 받겠다.
오늘 오후에 발리앙 저택으로 들어가기로 한 아리엘은 내가 그녀에게 외출을 권유하자마자 질색했다. 회귀하기 전에는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 놀라기도 놀랐을 터다. 그러나 황태자는 그녀에게 묵직한 의미가 있는 사람. 그녀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두 사람은 미니홀의 입구까지 안내 받긴 했다. 그러나 왜인지 알드리히는 시종장이 고하는 우리 이름을 듣고 나서, 입실을 허락하는 게 아니라 그가 나왔다.
“필르 발리앙도 오셨군.”
저 가식적인 웃음 좀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와, 좀.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오래 전에 발리앙 영주성에 갔던 알드리히는 아리엘에게 반하게 되었으나, 아리엘은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오드리나의 저택이 아니라 발리앙 영주성에 머무르고 있어서 좀처럼 만나지 못했다. 아련하게 마음에 잔재가 남아 있는 첫사랑이란 말이다. 이번 쥰의 생일을 기점으로 드디어 오드리나에 머무르기로 했으니 알드리히에게 아니 좋을까.
알드리히는 나는 아랑곳 않고 아리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무실의 소파에 그녀를 고운 손길로 앉히고 나서야 에스코트를 끝낸 그는, 알아서 걸어와 소파에 앉으려 하던 나를 잡아챘다. 덕분에 다리를 굽힌 엉거주춤한 자세로 끌려가야 했다.
구석에 나를 세운 그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누이?”
미친놈의 웃음은 무서웠지만, 나도 배짱 좋게 씩 웃어주었다. 무슨 일이긴. 네게 아리엘을 제물로 바치고 나는 빠져나가겠다는 속셈이지.
계산은 쉽다. 회귀하여 ‘나’와의 시간을 잊어버린 아리엘보다는, 회귀할 일 없는 사람들을 공략하는 편이 경제적이지 않겠는가.
아리엘의 경우 내가 도운 걸 잊지 말라 한 날, 잊은 데다 내게 엿도 먹였다. 또 닭 쫓던 개가 될까보냐. 어서 알드리히의 마음부터 아리엘에게 집중하게 해서 내가 떠나도 찾지 않게 만드는 게 좋음은 자명했다.
나는 오늘 기록적으로 기분이 좋았다.
“좋은 겁니다. 좋은 거.”
그 말을 남기고 소파로 돌아와 앉으며, 의식적으로 아리엘과 알드리히를 번갈아 보았다. 그 시선을 두 사람 모두 보았을 것이다. 흥흥 낮은 웃음을 흘렸다.
현 아리엘이 아는 나는 무척이나 악독할 텐데. 그 마법을 어찌 쓸 건지 긴장을 하고 있느니, 부딪힐 일을 최대한 만들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알드리히는 나를 보고 멈칫 눈을 가늘게 찌푸렸으나, 아리엘이 저를 돌아보자 금세 빙그레 웃었다. 아리엘은 에본느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두었던 알드리히에게 상처를 받은 상태다. 그럼에도 그가 그녀를 보며 웃자 얼굴을 붉히게 됨이 기묘했다. ……내가 썼지만.
나는 알드리히에게서 도무지 이성적인 매력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더 묘하게 느껴지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썼지만.
뭐지. 뭐가 매력적인 거지. 진심이다. 궁서체로.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았다. 알드리히는 먼저 아리엘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필르 발리앙. 우리 오래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요. 발리앙성에서.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요.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전하.”
적당한 때 빠져주고 싶지만, 이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이 나인 데다 두 사람은 오늘 우연히 재회한 것과 마찬가지라서 오늘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차를 따라주는 시녀에게 미소하고 찻잔을 들었다. 달각거리는 소리마저 기분 좋았다.
대화해라. 계속 해라. 첫사랑의 떨림을 증폭시켜라.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하게 두고 나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예를 들면, 어제 회장에서 나온 뒤에 만나지 못한 쥰이라든지.
울어 부은 얼굴은 아침 식사 때까지 수습 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 데다, 쥰과 아리엘이 할 이야기도 있겠지 싶어 방에서 식사했다. 출근도 배웅하지 않았다. 그 아이도 내게 오지 않았고. 흐름대로 되고 있는 것이겠지. 모로 가도 서울에 간다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이제 오드리나에 계속 머물게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보다 필르 라이네.”
“…….”
“필르 라이네.”
“에본느.”
나는 아리엘이 내 팔을 잡아 가볍게 흔들자 그들에게 눈을 돌렸다. 방긋 웃었다.
“네. 듣고 있었습니다.”
“아니요, 안 듣고 있었습니다. 대화에 참여 좀 하시지요.”
진짜 듣고 있었다. 말들이 내내 귀에 들어오자마자 흘러나갔지만.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저야 두 분이 대화하시면 좋겠다 생각해서 온 거라. 보기에 좋습니다, 두 분.”
음흉하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렸다 다시 올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 물론, 솔직히 말하면 좋고 나쁘고 감흥이 없다.
단지, 이것저것 생각하며 홀로 사색에 잠기는 시간은 언제 주어져도 좋아서, 이 계제를 눈앞의 사람들을 감상하며 보내기는 아깝다는 것이다. 나는 알드리히에게 유연하게 대답한 뒤에 작은 쿠키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다.
“……그래요?”
느린 반문이 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보았다가, 쿠키 덩어리를 꿀꺽 삼켜야 했다. 음?
뭔가를 막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본 바로 다음 날 한 가출은 잘 들었습니다. 잡으러 가지 않아 줘서 고맙지요?”
“…….”
그 뭔가가 입이었군.
내 입 꼬리가 축 내려갔다. 이런 제길.
그런 가벼운 가출도 따라올지 시험해 보기 위해 널 떠본 거라고는 도저히 말 못한다. 여차하면 가벼운 가출로 위장할 각오를 하게 되었다는 것도 말 못해. 그런 말을 농담처럼 흘리기에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필르 발리앙에게는 미안하지만, 먼저 귀가하시거나 궁을 돌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후자를 선택하시면 제 기사를 붙여드리지요.”
“예?”
“필르 라이네에게 사전에 말을 해 두지 않아서 이 사달이 난 것 같으니 제 잘못입니다만. 쥰경에 대한 일로 필르 라이네를 부른 거라서 말입니다.”
예상외의 발언이었다. 날 쫓아내는 게 아니라 아리엘을 쫓아내?
나는 천사 같이 웃으며 인사를 남기고 나가는 아리엘의 뒷모습을 보다 입을 떡 벌렸다. 진짜 쫓아냈어. 그리고 쟤는 진짜 나갔어.
내 표정을 본 알드리히가 빙글빙글 웃었다.
“왜요? 실제로 난 누이만 불렀는데요.”
“전하.”
“누이 체면은 살려주었잖습니까? 누이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지 않게, 잘 말한 것 같은데요.”
잘 말한 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알드리히가 아리엘의 작금의 상태를 모르기 때문이다. 어제 에본느에게 죽어 돌아온 아리엘은 나를 향한 인식이 최악이다. 그녀 생각하기에, 이건 내가 아리엘 앞에서 나와 알드리히의 관계를 어필하고 싶었던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가까스로 삼키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 성격 나쁜 미친놈아.
그런데 알드리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최고의 질문을 터트렸다.
“누이, 필르 발리앙 싫어합니까?”
“……그걸 또 그렇게 대놓고 여쭈십니까?”
나는 숨을 들이키며 손을 내렸다.
역시 네 간덩이는 붓다 못해 살찐 모양이다.
어제 베르덴은 질문을 아주 정중하게 포장했기에 도저히 묻지 못했을 그 질문을 이 자식은 대놓고 하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권력 만세, 신분 만세, 미친 놈 만세다. 평소에 미친 척 살면 이런 질문도 할 수 있구나. 그래서 좀 더 사고뭉치인 척 하지 못한 내 미진함을 진지하게 안타까워했다.
더 막나가는 시도를 하며 이미지를 새로 쌓기에는 내 나이가 이미 스물다섯이다.
내 얼굴을 살피던 알드리히는 결론을 내렸다는 듯 푸핫 웃음을 터트리며 등을 기댔다.
“싫어하네.”
“예? 좋아합니다.”
“응. 싫어해.”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세요.”
물론 엿 먹었으니 좋아하지는 않는다. 장차 아리엘과 알콩달콩할 남자한테 부정적인 속내를 털어놓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 자식이 안 듣는다.
나는 포기했다.
반면에 알드리히는 생기 만만했다. 꽃 만발한 화원에 파묻혀도 저렇게 행복한 표정은 짓지 않을 거다. 그가 어느 정도로 행복해 보였느냐면, 내 비위가 좋지 않아질 정도였다. 직전의 질문이 최고의 질문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최고의 최고인 주제를 꺼냈다.
“이제 용건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포르타 영식이랑 끝났다면서요.”
“…….”
그의 정보력은 무섭다. 나는 어깨를 올리며 숨을 들이켰다. 아, 진짜 이 자리에서 꺼지고 싶었다. 나는 내심 흐느낄 듯 웃으며 반문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션경 안색이 오늘 엄청 좋지 않아서 물어봤더니, 어제 잔뜩 시달렸다더군요. 오라비 엄청 비웃던데.”
나는 션이 비웃는 걸 떠올려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 남매에서는 헤르조가 돌연변이 같은 존재다. 시드니와 션은 쿨하고 시크하기가 엄청난 사람들이라, 션이 누굴 비웃었다는 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션은 헤르조와 사이가 좋다. 어린 막내 여동생을 헤르조는 나름대로 다정하게 챙기는 편이었다.
“비웃었을 리가요.”
“내가 보기엔 비웃는 것 같던데요. 어쨌든 그 나이 먹어서 여동생한테 징징대는 게 한심한 거지. 안 그렇습니까?”
“음.”
“그리고 누이는 눈이 부어있고.”
내 눈이 왼쪽 아래 모서리로 굴러 떨어졌다.
언제부터인지 알드리히는 웃고 있지 않았다. 내게서 대답이 없어서인지, 그가 말을 이었다.
“이십 년 친구를 그렇게 잘라낼 줄은 몰랐습니다.”
“…….”
“과연, 그리 할 수 있으니 내가 부르면 사라지겠다 한 거지. 좋아하는 사람도 잘라내는데 나라고 뭐 별거 있었겠습니까. 그렇지요?”
“……네?”
방금 뭔가. 잘못 들은. 내 표정을 본 그가 재미있다는 듯 설명했다.
“그 왜, 포르타 영식 이야기를 하면 누이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던 것, 알아요? 표정도 묘하게 예뻐지고. 난 눈치 챈 지 오래 됐는데. 그래서 참아왔고.”
“…….”
“걱정은 말아요. 원래 사랑이라는 게 당사자들은 모른다고 흔히들 말하잖습니까? 포르타 영식은 몰랐을 걸. 다행이지. 어디 보자. 나는 눈치 챘고. 그럼 쥰경도 아마 알고 있을 테고. 베르덴경도 알겠지. 어쩌면 시드니경도 알고 있지 않을까?”
나는 테이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이마를 쓸었다.
미친.
수치 플레이냐. 저 입 좀 틀어막고 싶다. 흑역사가 라이브로 쏟아져 나오고 있어……!
“그래서 누이를 부른 거지요.”
급격하게 피곤해진 눈을 깜박이자 쌍꺼풀에 진한 힘이 들어갔다. 날 왜 불러. 비웃으려고?
“솔직히 말해서 기쁩니다.”
……진짜 비웃으려고 불렀나.
이 놈 사악한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게 더 슬프다. 나는 포기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남의 불행이 전하의 행복이지요.”
“마음이 아물었을 리도 없는데 그 다음날 냉큼 불러 누이를 배려하지 않아 미안합니다.”
“배려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잘라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으로 정말 모든 게 매듭지어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사실 아닌 것, 다짐에 불과한 것을 덤덤한 척 말하자 알드리히는 나를 빤히 보다가 빙긋 웃었다.
“그럴 것 같기도 했고. 뭐, 누이 말대로 나는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라서요.”
“……제가 그걸 입 밖으로 낸 적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냥 떠본 건데 방금 했네. 나도 상처 받아요.”
정말 놀라서 목소리를 높이자 그가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리고는 낮게 웃으며 일어났다.
미니홀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잠시 후 나온 그의 손에는 긴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는 다가와 내게 그것을 건넸다. 그것을 받았다. 무게와 크기. 모양. 무기일까. 알드리히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물. 무엇으로 할까 하다가 지난번에 내가 준 걸 그대로 부리나케 팔아먹은 게 떠올라서.”
“너 닮았다면서 새끼 돼지를 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겁니다.”
그때는 우리 서로 심심하니 싸우자는 줄 알았다.
열어도 되겠느냐고 눈짓으로 물으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뚜껑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었다. 세공도 아름답고, 검신의 모양과 날카로운 기운도 훌륭하다.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욕심이 날 만한 무기였다. 굉장해. 잠시 요모조모 살펴보다 물었다.
“쥰에게 전해주면 됩니까?”
“아니, 누이 선물. 누이가 가지면 됩니다.”
“아까 쥰 일이라면서요.”
“필르 발리앙 쫓아내려고.”
“…….”
가질 수 있다니 기쁘지만, 쫓아냈다는 단어를 채택한 건 충격적이다. 나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검만 노려보았다.
내 머리 위에서 들리는 작은 웃음소리는 객관적으로 근사하게 들렸지만, 또한 한숨 같은 것도 섞여있었다. 그는 웃음을 멈추었을 때 실제로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가 내 앞에 다시 앉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열려 있지 않은 창으로도 바람이 들어오고, 참새 짹짹거리며 우는 소리도 들어오는 듯했다. 우리의 침묵은 의외로 드물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검을 살피고, 아마도 그는,
“왜요.”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이 마주쳤다. 짙다. 물어도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고 무감정했다. 나는 눈을 찌푸리고 다시 물었다. “뭔가 묻었습니까?” 알드리히의 눈에 행복해 보이는 빛이 돌아왔다.
그는 양 입 꼬리를 예쁘게 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앞으로 누이에게 끊임없이 내 매력을 말할 예정입니다.”
“해서 뭐하시게요.”
진심으로 질색하며 묻자, 그가 싱글싱글 웃었다.
“친구가 아니라 이성으로 접근하겠다는 말입니다.”
……고백하며 칼 주는 사람은 듣도 보도 못했다. 나는 침착하게 뚜껑을 닫았다. 선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침착했다. 심장 떨어지는 느낌은 들었을지언정 머릿속은 명정했다. 오히려 시드니가 고백을 했다면 정말 당황했을 것이다.
짙은 한숨을 쉬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알드리히는 아리엘의 연인이 될 테고, 되어야 한다. 그렇잖아도 하루하루 살 떨리게 생겼는데, 내가 아는 부분, 그것도 가장 중요한 스토리 라인을 흐트러뜨릴 수는 없다.
나는 상자를 그에게 밀고난 뒤 선서하듯 오른 손을 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거절합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난 더 말해보려고 하거든요.”
“이번엔 또 뭘요.”
심드렁하게 물으며 일어나자, 알드리히도 따라 일어서곤 빙그레 미소했다. 그는 망설이지도 않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도록 당신을 사랑해왔다고요.”
그에 나는 심각하게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리고 전에 말씀드렸듯이, 다시는 저를 부르지 마십시오. 죄송합니다. 이건 아닙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누이.”
이 이상 상대할 가치를 지금은 느끼지 못했다. 아, 이런, 내 머릿속은 분명 깨끗하게 닦여 있긴 한데, 이 상황을 내가 정말 정확하게, 진실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이건 참 무겁고 심각한 일이다.
그런데 그 무게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바닥을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알드리히는 이제 차가운 무표정이었지만, 나를 더 부르지도, 잡지도 않았다. 여유롭게 인사한 후에 그에게서 몸을 돌리고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베르덴이 있었다. 그는 아리엘을 따라가지 않은 듯했다. 그대로 그를 지나쳤다. 그러나 내가 거친 걸음을 조절치 못하여 결국 삐끗해 휘청거리자, 그가 팔을 뻗어 나를 잡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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