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4화 (14/157)

00014 CHAPTER 2. 악을 위하여 =========================

베르덴이 나를 재차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는 묵묵히 내게 다가와, 나를 다시 앉혔다. 그리고 내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끊임없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짓무르리라 하는 걱정도 건네지 않고, 왜 우느냐 묻지 않았다. 울지 말라 제지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들어 그의 손을 각각 움켜잡았다. 그의 양 손은 내 얼굴을 거의 감싸듯 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베르덴이 멈추었다.

물기로 흐린 그의 테두리가 번졌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 입을 열었다.

“슬프지 않아.”

“…….”

“알아? 어차피 버릴 거였어.”

“…….”

“어차피 우린 함께 못할 거였어. 처음부터 알았어.”

“…….”

“수치스러워 미칠 것 같아.”

흔들려야 하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슬프지 않다. 슬프지 않다. 난 슬프지 않아. 부끄러울 뿐이다. 끝내 울 만큼 흔들렸다는 게. 나는 상처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뜨겁고 간지러운 게 다시 눈가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내렸다. 몸을 굽혀 이마를 그의 어깨에 대자, 베르덴의 단단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눈물기는 조금씩 가시고 지고 있었다. 한바탕 쏟아내고 싶었던 건 연회장에서부터다.

잠들 수 없는 밤에 홀로 쏟느니 차라리 누군가 내 슬픔을 보아주길 바랐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 사람이 베르덴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쥰이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시드니도 아니다. 아리엘도 아니야. 역설적이게도 나는 헤르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바람은 헤르조를 버리기 전의 이야기였다.

나는 베르덴의 머리 아래에서 물었다.

“너도 그래?”

“…….”

“베르덴. 너도 따지러 왔어? 왜 아리엘을 쳐냈냐고?”

시드니는 내게 당부를 하고 갔다. 필르 발리앙이 마법사인 것은 아마 발리앙가도 모를 거라고.

나는 묻자마자 스스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 세계에서 그나마 절친한 친구들이라고 사귄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가 회장에서 나올 때, 베르덴은 나를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휴가와는 상관이 없다.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이다. 내 마음에 담아야 할 현실.

이제 그만 베르덴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고자 했다. 깨어날 시간이다. 그러나 그 움직임을 보이자마자 내 뒤통수가 부드럽게 내리눌렸다. 베르덴의 손이 나를 덮었다.

“아가씨. 제가 어째서 당신의 기사가 되기를 소원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자장가를 부르듯 나지막하게 물었다. 내 어깨는 무력하게 축 늘어졌다. 치마 위에서 달랑거리던 팔의 끝을 잠시 보다가 모았다. 두 손이 서로를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헤르조와의 우정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당신의 기사를 선택했는지, 아십니까?”

“……그땐 너도 내가 공작이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말 도중에 갑작스런 울먹임으로 떨렸다.

내 대답을 듣고 잠간 말이 없던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다시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나는 재차 묻는 것에 실로 약하다. 거짓을 고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탓이었다. 이번에도 내 성채는 와르르 무너졌다. 거짓부렁을 밀고 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뜸을 들이며 망설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글에 어스름이 졌다. 글에 있는 에본느의 모든 앞길에 늦은 오후 어스름이.

“아니야.”

“네. 아닙니다. 아가씨, 그렇다면, 그때 얼마나 자주 당신을 향한 암살 시도가 있었는지는 아십니까?”

“…….”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안다. 아주 지독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베르덴이 알 줄은 몰랐다.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마를 어깨에 기대고 있는 덕분에 그는 내 표정을 보지 못한다. 나는 슬픔일랑 일순 잊을 정도로, 또 다른 충격을 크게 받았다. 그는 몰라야 할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내 속내를 모를 베르덴은 말을 이었다.

“저 말고도 당신의 호위를 할 기사는 물론 수두룩했지요. 그러나 그들의 눈이 제 눈이 될 수는 없고, 그들이 보는 것을 동시에 제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제가 보는 제 앞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나를 보듬던 그의 손이 내 어깨로 내려왔다. 내 상체를 세운 베르덴은 가만히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야망이 없다고 탓하셔도 좋습니다. 후작 작위보다는 아가씨가 중요했습니다. 헤르조와의 우정보다도 당신의 일이 중요했습니다.”

마치 나와의 우정보다도 아리엘이 중요한 헤르조와도 같이.

뇌리에 헤르조가 스쳐지나갔지만, 그보다 앞서 이것이 하나의 기회임을 빠르게 인지했다. 나는 이제 하나하나 경계해야 할 몸이었다.

“헤르조와의 우정보다, 나와의 우정이, 중요했겠지.”

나는 이를 악물고 빙긋 웃으며 분명히 짚었다. 그러자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손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 내 눈에 힘이 들어가 찌푸려졌다. 내가 너를 경멸하게는 마라. 우정, 너, 우리, 우정이라는 것, 진실된 게 있었나. 네가 몰라야 할 일마저 알고 있는 것이 하 수상하여 내 마음이 아프다. 그러니 제발.

진심을 말해줘.

정적은 잠시였다. 베르덴은 희미한 웃음과 함께 긍정했다.

“예. 우정이.”

“…….”

그의 어조에서 기묘한 무언가를 느꼈다. 더 깊은 마음 따위를 느낀 게 아니라, 좀 더 흔들리는……. 내 미간이 반사적으로 움찔했으나, 더 보이지는 않았다. 만약 무언가 내가 모르는 내막이 있다면, 나는 알아차리지 않은 것처럼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편이 내막을 알아내기가 쉽다.

나의 믿음이 서서히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우리 두 사람의 고리는 약했다. 헤르조를 시발점으로 나는 이제 많은 것들을 의심하고 거부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헤르조도 그랬는데, 베르덴이라고 갑작스레 내 곁에서 떠……, 아니, 아니다, 내가 그들을 버리는 것이지.

자꾸 잊는다.

나는 스스로 한심해하며 웃음 지었다. 베르덴은 그런 내 웃음을 보고 한결 안도한 것 같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는 발리앙의 자식이기 이전에 당신의 기사입니다. 그래서 아가씨, 당신의 말씀대로 당신께 따지러 왔습니다. 아리엘을 뿌리치신 이유를 들어야겠습니다.”

그의 손이 내 눈을 또 톡톡 두드렸다.

“당신은 숨기는 것에 능하여 저는 당신의 의중을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도련님의 말씀처럼 아가씨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압니다. 까닭 없이 뿌리칠 분도 아니라는 걸 알고.”

“…….”

“부디 제가 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베르덴의 말도, 목소리도, 손도, 눈빛도, 그의 모든 것이 몹시도 다정하여 외려 마음이 흩어져 날아갔다.

나의 기사이기 때문에 따진다고.

고맙다. 베르덴. 고맙다. 나는 울던 낯으로 빙긋 웃었다. 울음이 완전히 가셨다. 명치부터 쑥 빠져 내려가는 신뢰. 허탈감만이 남았다.

고마워.

“고마워요.”

그러나 너는 나의 기사이기 이전에 아리엘을 아끼는 아리엘의 오라비다.

힐끔 본 그의 장갑에는 검은 것이 묻어 있었다. 화장이 번져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 무거운 베르제르를 뒤로 밀었다. 나는 앉은 채로 그와 멀어졌다. 헤르조는 내가 썼다. 그가 한 질문에서 굳이 나를 향한 염려나 배려의 여부를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건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내가 알기 때문이었다.

……글대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최종적으로는 글에 의지하고 있는 내 꼴. 우리는 화음이지만 불협화음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씩 말라붙어가는 얼굴이 간지러워 참기 어려웠다. 나는 손등으로 눈을 북북 문지르며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는 새 그랬어요. 그렇게 알아두시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

베르덴은 고개를 조금 떨어트리고는, 굽혔던 무릎을 펴며 일어났다. 곧바로 나가지는 않았다. 그림자에 감춘 질문이 먼저 내게 왔다.

“포르타 영식을. 사랑하십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바깥을 보았다.

어째서 그리 느꼈는지는 묻지 못하겠다. 부끄럽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휘어 잡혔던 일이. 그리고 그런 일은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식었다. 이토록 오래 누군가를 좋아했던 건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곤 하던 그 샛노란 감정, 분홍색으로 피어난 감정. 기분 좋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하더라. 아, 그러나, 종국에 귀결되기로는, 그 감정들 참 설렌다고.

그 설렘이 끝났다.

끝나야지. 끝내야 한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는 항상 부지런히 운동했다.

진정 인간이 아니라 하면서 은연중에 인간처럼 대하고, 활자라 하면서 그래도 너희는 살아 있지 않느냐고 변덕을 부리기를 수천, 수만, 수억 번.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했어요.”

헤르조를 떠올리자 다시 콩콩 명치로 심장이 내려가는 느낌이었지만, 한순간에 끝난 인정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했다.

……이런. 돌겠군. 나는 필시 엉망으로 번졌을 눈화장을 더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베르덴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배를 잡고 웅크렸다. 얼굴 아래의 바닥이 뚝뚝 젖었다. 소리는 없었다.

새벽에 나는 평소처럼 웃음지은 얼굴을 거울에 대어보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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