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3 CHAPTER 2. 악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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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참 이상한 일이다. 시드니가 준 정보에 들떴던 마음은, 방에 가까워지면 갈수록 가라앉더라. 문을 열 때즈음에는 이미 피로에 잡아먹힌 뒤였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노도처럼 밀려와서 나를 삼켰다.
방에 들어서자 안에서 내 침구를 정돈하고 있던 킴이 나를 돌아보았다. 예쁜 얼굴이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가씨. 일찍 돌아오셨네요.”
노곤하게 시린 눈꺼풀은 느리게 움직였다. 나는 천천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갈아입을 옷이랑 세안수만 만들어주고 갈래?”
“괜찮으시겠어요? 피곤하지는 않으시고요?”
“괜찮아.”
괜찮고말고.
목구멍이 좁아진 것 같았다. 쉬운 말조차 거칠게 깎여 나왔다. 마지막에 괜찮다 하는 내 목소리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낮고 거칠어서, 킴이 흠칫 나를 본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미소를 보내주었다.
테라스 가까운 곳에 놓인 베르제르에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실크장갑을 벗어 옆 튀르쿠아즈에 던지고 나서는 온통 암흑이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바래지더니 그러고는 깜깜해지기를 반복했다. 끊임없는 혼란에 나는 몸을 기울여 이마를 짚었다.
팔걸이에 걸친 팔꿈치가 뾰족하게 아파왔다.
-오늘 일로 쥰경이 마음 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게서 무언가를 읽은 듯 우리 헤어지기 직전에 시드니는 말했다. 위로였을까? 그러나 마음이 상해도 괜찮은데. 각오 했는데. 나는. 각오를. 했는데.
시드니의 상냥함은 항상 무뚝뚝하고 덤덤하게 왔다. 나는 그를 잠시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이 주춤주춤 방 안을 돌아다니던 킴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마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촛불이 불 밝힌 방 안은 불안한 주홍빛이다. 멍하니 눈을 흐리다, 내가 생각해야 하는 사람은 쥰도 시드니도 아님을 애써 상기했다.
나 이 정도로 혼란스러운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필르 발리앙은 마법사입니다.
격조했던 시드니는 내 안부를 물으며 그 줄기 하나를 전해주었다. 그의 한숨 같던 목소리가 더듬더듬 그 말을 도로 만들어냈다. 필, 르, 발, 리, 앙, 은, 마, 법, 사, 다. 그러자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도, 아리엘의 회귀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머리 장식을 위해 달았던 다이아몬드 빗 핀을 빼서 손에 쥐었다. 날카롭게 손바닥이 지압되기 시작했다. 기도하듯 상체를 수그렸다.
생각을 해 보자. 수첩에는 아리엘이 마법사라는 말이 없었다. 기억을 쥐어짜도 그런 설정을 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수첩에 없으니 기억도 수첩을 따라 스스로 조작해버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정말이지 기억에 없다.
허면 시드니가 거짓을 말했나.
아니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말을 함부로 옮기는 사람도, 함부로 추측을 말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융통성이 있다가도 이런 부분에서는 없어 헤르조가 답답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니어야 했다.
내가 채택하지 않은 설정이 나온다 하더라도, 차라리 글 자체보다는 아리엘을 상대하는 게 나았다. 아리엘에 맞서는 악녀가 되어 미움 받는 것이 두려웠던 아침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글이 내게 맞서려 한다고 생각했을 때 심장이 얼마나 덜컥거리고 나를 숨 막히게 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일인걸.
아리엘이 마법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희망을 가질 정도로 나는 이 글이 두려웠다. 이 글에서 에본느는 철저하게 쓰레기가 되어 불탄다. 등장인물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내게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글의 흐름이라는 것은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라서.
상대하기 까다로워진 아리엘이 차라리 낫다.
응, 그래. 제발.
글이 내 적이라면, 나는 이대로 어딘가로 떠나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 되어버리지 않나. 글은 결국에는 나를 악녀로 완성시킬 테니까.
온몸을 타고 일순 완화된 두려움이 흘렀다. 가깝던 누군가에게 미움 받는 건 몹시도 피곤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게 한 명이 아니라면 더욱.
“…….”
어디에 있어도 미숙하기 짝이 없다. 지구에든. 이 세계에든.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지인의 미움에 이상하리만큼 취약했다.
가슴뼈가 팔뚝 위에 놓여 목이 졸린 음성이 나왔다. 물리적인 압박에 심리적인 압박감이 겹치니 못 견딜 답답함이 나를 덮쳤다. 뒤통수와 등에서부터 훅 끼얹어진 소름이 있었다. 나는 확 상체를 일으켜 등받이에 기댔다.
어디에 있든 미숙하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그렇고, 상황을 다루는 능력도 그렇다. 다시 자랐어도 자라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은 이럴 때 더 강하게 들었다.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이 미숙했다.
여기에 와서는, 힘이 있으니 구태여 더 크게 노력할 필요도 찾지 못했었다. 지금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보다 더 노력할 일도 그다지 없을 것이다. 감당치 못하겠다 싶으면 그대로 떠나겠지. 내게 절실한 사람도 목표도 없다.
공작위의 의무를 귀찮아하고 피곤해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
휴식에 대한 욕구가 가장 커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나 휴식조차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는 아무 것도 절실해하지 않고 있어. 그래야 한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차가웠다. 뜨뜻미지근해진 목걸이 줄을 풀어내며 일어났다. 이미 일어난 회귀를 막을 방법도 없고, 금시초문인 설정이 아리엘을 강하게 만들었어도 내가 이보다 더 흐트러질 일은 없다.
자존심이 꺾였다.
나는 대체로 겁 많은 겁쟁이였고, 나는 내가 쓴 글이 무섭다.
그 정도면 됐다.
나는 살아야 했다.
“왜 그랬어?”
따라서 너희를 쳐내는 것에 두려움은 없어.
노크도 알림도 없이 들어온 헤르조가 물었다. 목걸이는 없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그는 다시 물었다.
“왜 그랬어?”
연회가 끝날 시간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게 왔을 터. 그런 작태를 보면서도 욱 튀어나오려는 말조차 없었다.
“에브. 왜 그랬어?”
“아리엘?”
무엇을 묻는 건지 알 것 같아서 물었더니, 그는 고개 끄덕임도 없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도 그를 응시했다. 잃고 있는 중이다.
헤르조가 좀 더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나는 씩 웃었다.
“먼저 물을게.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해?”
“응.”
이 세계에 온 내가 가진 중 가장 헛된 우정이 될 거라 생각했고, 그 생각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내 손을 움직인 게 설령 아리엘의 마법이라고 해도 이야기는 나름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내 말보다는 아리엘의 말. 내 안위보다는 아리엘의 안위. 에본느의 친구가 된 헤르조의 속내는 이해 불가하고 짐작도 불가했다. 원래는 에본느의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알겠다. 이해해. 누군가에게는 친구보다 연모하는 사람의 안위가 더 중요할 수도 있는 거야. 사람의 면면은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 살기에 편했다.
“왜?”
“…….”
“왜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야? 쥰이 어찌 사과했는지도 전해 듣지 않았어?”
“들었어.”
“그런데 왜. 나를 믿지 않지?”
“나는 내가 이룬 것에 대해 맹목적이고, 너는 아프다고 손을 쳐내는 사람이 아니니까. 너는, 에브, 너는, 아파도 이 악물고 인내하다 조용히 쓰러질 사람이니까.”
“…….”
“너는 강해, 에브.”
어째서 아리엘을 해했냐고 묻는 그의 눈동자에는 한 점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런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이를 만들어냈다. 글 내에서는 이 사랑에 개연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당하고 마음에 분이 차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그의 사랑에는 적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해한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너는 그렇게 해. 나는 널 사귀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각오했었다. 나를 처참하게 쳐 내는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게. 너는 그런 사람일 뿐이다. 네 그 사랑 자체를 이해한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오른뺨을 감쌌다.
“나는 강하고, 아리엘은 약하고.”
엄지가 나긋하게 그의 눈가를 쓸었다. 헤르조는 일견 평소와 같이 뻔뻔해 보이지만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내 다문 입술이 양 옆으로 쭉 늘어났다. 거짓웃음이었다.
내가 정말 지구에서 죽은 게 확실했다면, 그랬다면 내 여기에서의 삶은 훨씬, 정말 훨씬 절박했을 것이다. 내가 정말 돌아가지 않는다고 확정되어 있었다면, 그랬다면 내 여기에서의 삶은 훨씬 정이 넘쳤을 것이다.
감정이 흘러 넘쳐 나 스스로를 잡아먹었을 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 좋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내가 감정어린 풍파에 흔들리지 않도록 거리를 두었다.
하여 글에 없던 이 수모에도 나는 침착했다. 아니, 실은 침착한 게 아니지만, 침착함을 가장할 수는 있었다. 헤르조의 포옹에 눈물 나려 했던 건 지금 떠올리고 아쉬워할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 말을 어찌 꺼내야하나 했는데 네가 쉽게 만들어 주는군.”
이게 우리 이십 년 우정의 말로라 여기겠다. 헤르조. 너는 이제 내게 가치가 없다. 아리엘에 미쳐 나를 몰아세울 사람은 필요가 없다. 널 가깝게 두어도 괜찮을 시간은 끝났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손을 거두었다.
주목나무처럼 마음이 붉게 물들었다. 헤르조가 아는 나의 말투 역시 달라졌다.
“헤르조. 나는 공작을 물려받지 않을 거다.”
“……응?”
“베르덴이 한 짓, 나도 하겠다는 뜻이다.”
‘짓’으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헤르조의 입장에서야 그 정도로 미운 선택일 것이다.
친구로 있기 위하여 말하지 않았던 내 계획을 마침내 말했다. 가지고 싶어도 가지지 못하는 자리. 그에 따른 질투다. 내가 그렇듯, 그는 편협하고 어렸다. 헤르조를 그렇게 나쁘게 매도해도 이제 내 양심에 거리낌은 없었다.
“네게는 아리엘과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말하지 않겠다. 말할 가치가 없어. 말해도 믿지 않을 사람에게 말하여 무엇 하지?”
나는 웃었다.
“너는 나를 믿지 않고 왔다. 나도 이제는 널 믿을 이유가 없지.”
헤르조와는 언제 틀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였다. 글에 없던 좋은 관계. 쓰지 않았던 너와 나의 우정. 끝이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쉽고, 원수를 사랑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믿는 건 비교적 쉽고, 믿지 않는 사람을 믿는 건 어렵다. 나는 굳이 어려운 길을 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런 모양일지는 몰랐기에 아프지만, 끝이다. 이런 식으로 끝장날 지도 모를 인연들을 세어보고는 비웃음을 지었다. 타의로 끊기는 것보다야 내가 먼저 움직이는 편이 좋을 거다.
“가. 헤르조. 다시는 나를 찾지 마라. 나도 너를 찾지 않을 거야.”
“에브.”
“이런 상황, 다 생각하고도 내게 와서 물었던 걸 텐데.”
설마 내가 이런 불신을 겪고도 제 옆에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되지. 나를 어지간한 호구로 보고 있던 게 아니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버리는 중이다.
내 얼굴을 잡아 뜯을 것처럼 집요한 시선은 한동안 느껴졌다. 마침내 그가 몸을 돌리고 문을 걸어가기 시작하자, 나는 그를 보았다. 봐라, 말했지. 그 뒷모습이 마지막으로 보는 친구의 뒷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지금 내가 보는 건 친구의 뒷모습이 아니었다.
사정도 모르는 등장인물 따위가 감히 나를 치죄할 수는 없다. 너는 글자다. 헤르조, 너는 단어의 조합이다. 네가 감히 나를 추궁할 수는 없어. 내가 너를 버렸다.
나는 그를 부르지 않았고,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헤르조가 어둡게 닫고나간 문의 바람으로 촛불 하나가 사멸했다. 나는 버렸지, 잃지 않았다. 목이 아팠다. 나는 아프지 않아.
“……아가씨.”
언제 문이 다시 열렸는지 모르겠다. 베르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볼 때, 내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알아? 나는 버렸지, 잃지 않았다. 전부터 각오해 오고 준비해왔던 대로 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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