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CHAPTER 2. 악을 위하여 =========================
일단 헤르조를 천천히 밀어냈다. 내가 보는 곳을 그도 뒤 돌아 보았다. 할 수 있으면 헤르조의 눈을 가려버리고 싶었으나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나는 힐끔 헤르조를 보았다가, 다시 시드니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헤르조의 친형. 헤르조가 날 때부터 거머쥘 수 없었던 것을 쥔 사람이다.
헤르조가 베르덴을 증오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는 의식적으로 헤르조의 팔을 잡았다. 한 손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는 팔뚝에는 이미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먼저 말해야 했다.
“경. 꽤 간만에 뵙네요.”
“…….”
그나마 남들한테는 짧게나마 인사말을 던지지만, 언제부턴가 내게는 전혀 아니었다. 무뚝뚝하게 고개만 한 번 까닥하고 마는 그에게 조금의 섭섭함도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나름의 친근함을 표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게 서로 편하리.
멈춰서 있던 그가 다가왔다. 분위기는 더 차가워졌다. 헤르조를 올려다보자, 내 주먹을 받아주던 너그러운 웃음일랑 찾아볼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림자가 진 그 얼굴은 더는 나를 보지 않았다.
“헤르조. 잠시 자리를 비켜라.”
시드니가 무뚝뚝하게 요구했다. 덜컥 떨어지는 심장을 느꼈다. 시드니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시드니를 본 나는 움찔 헤르조를 다시 돌아보았다. 역시나 그의 표정은 알아볼 만하게 뒤틀려 있어서 내 얼굴도 덩달아 굳었다.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헤르조.”
“형님은 오랜 만에 본 동생한테 인사도 안 해 주십니까?”
아. 헤르조 이 자식.
나는 곤란해 하며 뒷목을 매만졌다. 지금은 자격지심을 내 앞에서 표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광경을 보고 마냥 헤르조를 안타깝게 여기고 동감하기에는 내 머리가 몹시 어지러웠다. 이것은 여유가 없는 것이다. 간단히 호흡하는 것마저 어렵게 느껴지는데.
뱃속 깊은 곳에서 시작된 공허한 한숨이 텅 빈 명치를 지나서 훅 올라왔다. 막을 새가 없었다. 그리고 빈 명치의 느낌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 사람 없이 이만 쉬고 싶었다.
내 피로를 들었는지 헤르조는 대답 없는 형제에게서 눈을 돌려 나를 보았다. 의아하게도 그는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화내다 웃긴 왜 웃어. 내 얼굴이 그리도 웃기게 생겼나. ……그런 이유가 나와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놈이다. 저 웃음은 필시 재미있어 하는 웃음. 내 눈이 가늘어지는 걸 보았을 텐데도 헤르조가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회장으로 올 거지?”
“아, 나는 이만 방에 돌아가려고.”
“그럼 연회 끝나면 네 방으로 갈게.”
“…….”
미쳤냐고 눈빛으로 물었으나, 헤르조는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이다. 반드시 눈치 챘을 터. 그렇지 않으면 저런 짓궂은 웃음은 못 짓는다. 둘만 있을 때도 아니고 시드니가 있는데 굳이 말해야 하나.
저리 선언하지 않아도 나는 방에서 헤르조를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그도 그것을 알 텐데 굳이…….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아니.”
그러나 시드니는 이 대화를 잘랐다.
“헤르조는 연회가 끝나면 바로 귀가할 것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아. ……음.
상황은 그제야 파악되었다. 형제 기 싸움의 일종인가. 아니, 헤르조 멋대로 싸우고 있다는 말이 차라리 옳겠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헤르조는 내 손 위를 그의 손으로 덮더니 토닥였다. 그렇게 마음 넓고 생각 넓은 척 해봤자 이미 늦었다.
“그럼 이따 보자.”
“어, 응.”
얼결에 대답하며 손을 풀어내니 우리 아리엘양 보고 싶다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떠나갔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았다. 한결 같이 변하지를 않지. 친구의 뒷모습을 보는 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나는 회장으로 가는 그를 잡지 않았고, 외려 아리엘이 거기에 있다고 챙겨주기까지 했다. 답은 반 이상 나와 있는 도박이었다.
어쩌면 희망, 혹은, 어쩌면 포기.
사람은 입으로는 슬프다 말하면서도, 그 마음에는 슬픔 이외의 미묘한 감정들도 항상 있다. 기쁘다 말해도 마음에는 미묘한 슬픔, 안타까움, 누가 나를 칭찬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등 참 많은 마음이 있고. 그러나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슬프다는 단편적인 말만으로 나를 재단하고 나를 오해하기에. 말은 적은 게 차라리 낫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웃는 게 차라리 나아.
우리가 오늘 끝나도 웃으며 보내주는 게 나아.
헤르조가 사라졌다. 나는 마침내 시드니를 보았다. 그는 헤르조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웃음을 잠시 멈추었다가 새로 고쳤다.
씩 경쾌하게 웃었다.
나이차가 있고 성격차가 있는 탓인지, 나는 시드니와 둘만 있는 걸 의식적으로 꺼려왔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는 그가 허락한다면 깊은 우정을 나누기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나와 맞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헤르조가 함께 여행을 다닐 정도로 친해진 반면, 친형제인 시드니와의 교류는 대부분 표면적이고 가식적이었던 이유다.
그리고 아무래도 시드니와 나는 비슷한 입장이기에 헤르조의 앞에서 그를 만나는 건 꺼려지기도 했었다. 헤르조가 가질 수 없는 걸 쥔 사람은 시드니고, 베르덴과 나 역시 시드니와 거의 같은 입장이었다. 헤르조가 베르덴을 증오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베르덴이 그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시드니와 베르덴이 받는 미움의 크기를 생각해보다 무언가 막막한 기미가 있어 그만두었다.
가장 우스운 것은, 그렇게 꺼려하면서도 내가 시드니를 친근하게 여긴다는 점일까.
그러나 이 순간 내가 하고 싶은 건 생각의 정리다. 용건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슨 대화든 어서 해치우고 돌아가고자 하여, 시드니를 독촉하듯 불렀다.
“경?”
“…….”
“혹시 아리엘 일로 화나신 거예요?”
베르덴이 느닷없이 내 기사가 된다든지, 나와 쥰과의 사이가 여태 좋았다든지, 에본느에게 있지 않던 인연을 만든다든지. 본디 없던 일이 생겼다는 건, 없던 사랑도 생길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내 주위의 청년들 중에서도 주연이 아니었던 이들이 아리엘을 사랑하게 되는 가능성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시드니가 일부러 나를 만나러 올 일이, 헤르조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할 일이 지금으로써는 아리엘의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아리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목하 내 머릿속 지분의 대부분을 아리엘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만히 나를 보던 시드니가 입을 열었다.
“아까.”
나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 아리엘의 일이 맞구나. 한 단어를 끝으로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보던 시드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놀라지는 않으셨습니까.”
“……음? 왜요?”
놀랐다. 부정할 생각 없다. 그의 질문에 놀랐다. 그러나 그걸 왜 묻나. 짚이는 데가 없었다. 경계도만 높아질 따름이라 난 반문만 했다.
어둔 숲, 별 뜬 밤하늘 같은 시선은 나를 보다 가만히 짧아졌다. 망설임이다. 정보를 마다하는 성격도 아니고, 누구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지만, 시드니가 망설인다는 건 의외의 일이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안으로 말아 침으로 적셨다. 장미 맛이 났다.
그리고 훨씬 매끄러워진 걱정을 덧씌워 말했다.
“망설일 말씀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곤란할까 하여 망설이는 게 아닙니다.”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렸다.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그를 믿게 하는 기묘한 힘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면?
나를 좀 더 눈에 담던 그가 신중하게 입을 움직였다.
“혹시 조금 전 손이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예?”
반문이 늦었다. 웃음이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시간도 늦었다. 인식도, 이해도 늦었다. 모든 게 늦었다. 나는 경련을 일으키듯 눈꺼풀을 파다다닥 움직였다. 기실 눈꺼풀이 스스로 움직였다. 방금, 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려다보다 깜짝 놀라 다시 그를 보았다.
어?
어떻게?
어?
“그때 당신의 표정이.”
숨을 멈췄던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입을 더듬었다. 훅, 끼쳐왔다. 내 표정? 그때? 혼란스러웠겠지만 잘 가장했다고 생각했다. 설령 찌푸린 얼굴을 보았다 하더라도 보통은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나 짐작을 하지, 의지 운운하며 짐작하지는 않는다.
……어?
어찌 말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하릴 없이 그를 응시했다. 눈 밑의 살이 흔들리며 피로를 호소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잠잠히 보고 있던 시드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필르 발리앙은 마법사입니다.”
어……, 음?
나는 눈을 깜박였다. 엉켰다. 오른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멍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눈은 바닥만 비추었다. 말을 다시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손이 추락했다. 나는 물었다.
“네?”
“필르 발리앙은 마법사입니다.”
“……그러니까, 아리엘. 아리엘이요?”
“예.”
망연하게 그의 가슴께를 주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복도의 바깥이었다. 기둥과 기둥 그림자 사이로 넓게 펼쳐진 검푸른 나무. 수풀. 꽃. 하얗고 푸르스름한 달빛. 정리코자 돌렸던 시선인데 외려 나를 더 몽롱하게 했다.
내 손.
손을.
“……저는 지금 그녀를 고발하는 게 아닙니다. 참고만 하십시오.”
확신은 아무도 할 수 없다. 마법사인 걸 알려주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다. 하여 이 말이 그의 고백에서 발을 빼고자 한 말이 아닐 거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항상 사려 깊었다.
나는 멍한 이 상태에서도 그에게 감사를 표해야 함을 알았다.
하여 내 팔이 아닌 것처럼 저리게 텅 빈 팔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몸이 약간 딱딱해졌다. 아가씨를 희롱하는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압니다.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시기 곤란하셨겠네요. 감사합니다.”
이제 그는 정말로 굳었다. 나는 손을 놓으며 희게 웃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성격상, 남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차라리 베르덴을 통해 아리엘을 제지하거나, 그 혼자 알고 있으면서 조용히 경계하는 게 시드니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베르덴을 통하자니 아리엘은 베르덴의 누이다.
그 혼자 알고 있어주지 않아 고마웠다. 고뇌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의 입이 가볍고 무겁고를 따질 일은 아니었다.
나를 움직인 게 글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는 희망 하나로 세상은 잠시 아름다워졌다. 시드니는 지금의 내게 있어 최고였다. 희망이 산산조각날 수도 있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으나,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애써 싱글싱글 웃으며 재차 감사를 전했고, 그에 정신을 차린 시드니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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