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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꽃 작가님-11화 (11/157)

00011 CHAPTER 2. 악을 위하여 =========================

CHAPTER 2. 악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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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리번거리며 공작을 찾았다. 길 잃고 겁먹은 아이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내 표정은 내가 생각하기에 무척 덤덤했고, 태연했다.

‘옆집 영애의 뺨이라도 올려붙여 드릴게요.’라고 했었나. 음, 아니, 아니다.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올려붙여 드리겠다는 건 너무 심한 배려였다. 그렇게 말했다면 공작은 혈압으로 쓰러지거나 내 뺨에 몇 대 더 매타작을 했을 것이다. 하여튼 내 그 말을 공작은 기억하려나.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무엇 하나라도 건지고자 했다.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두기는 했었다. 그 대비책으로 이 상황을 수습하는 게 상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객관적으로 판단하자면 그랬다. 그러나 혹시나 글 자체가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내 노력에 이번에는 얼음물이 부어질지도 몰랐다.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중책을 선택했다.

내가 내 의지에 선택권도 없이 일방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해야 한다는 건 실은 참기가 힘든 일이었다. 실은 노여웠다. 아끼며 나를 쏟아 부었더니 돌아오는 건 나를 향한 골탕. 확실한 판단이 내려지기 전까지 벌써 재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미 노여운 걸 어찌하나. 열이 화닥닥 뻗쳐올라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차올랐으나, 참을 수 있다.

나는 공작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내가 일부러 했다는 것처럼. 그렇게 표면적으로라도 내 주도권을 주장하지 않으면 이 상황이 죽도록 아쉬워져 잠 못 이루게 될지도 몰랐다.

나를 가두는 게 글이라니. 사람도 아니고 글이라니. 그것도 내가 쓴 글. 글자 따위가.

설령 내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세상 가장 꼬리 같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할지라도, 그건 인간들 사이의 일이지, 글자에게 그런 취급당해서는 안 된다.

공작의 눈빛은 싸늘했으나 주변을 의식하였는지 차라리 몸을 돌려버렸다. 그는 문 앞에 서 있었고, 그의 옆에는 다른 가주가 셋. 어차피 나가려던 길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이곳은 젊은이들과 그네들 어머니들의 연회지. 나는 아리엘을 대신하여 따진 영애를 무시하고 아리엘에게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아리엘.”

사실은 미안하지 않았다. 비단 이 상황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에본느에게 죽게 한 것도 미안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가 ‘돌아온’ 뒤 선인과 악인의 사이를 오가도록 썼다는 것도 미안하지 않았다. 내가 이 세계에 대해 끔찍해하며 죄책감을 가진 건 내 설정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고통 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이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 것도 미안하지 않다.

“미안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과하는 건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보다 어렵지 않고.

주위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아리엘을 향해 손을 내밀어 호소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이야기대로 쥰이 이 상황을 흐지부지 무마하는 것마저 당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흐지부지 만드는 건 정리하는 게 아니었다.

하여 나는 이만 자리를 뜨려 했다. 쥰이 내 옆으로 좀 더 다가와 아리엘을 마주보지 않았다면.

“누님이 아니라 제가 사과드려야 합니다, 필르 발리앙.”

……뭐요?

“아침부터 누님께서 몸이 편치 않으신 걸 제 욕심으로 참석을 부탁드렸습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신 모양이니, 이는 모두 욕심만을 차린 제 탓입니다. 누님께도 필르 발리앙께도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수분을 충분히 머금었던 입술은 어느새 바짝 말라 있었다. 그리고는 딱 붙어 열리지 않았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쥰을 바라보았다.

왜.

네가 여기서 왜 나서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일, 나는 모른다. 내 수첩에도 적혀 있지 않았고, 내 어렴풋한 기억에도 없었다. 나는 몰라. 아리엘이 글대로 가는 이상 이제부터는 너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니었나. 쥰. 내가 세운 다음 라이네 공작. 너는 나를 버려야 했다.

버려. 아, 맞아.

기대감으로 휘둥그레 뜬 눈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그래, 너는, 나를 버린다. 나는 손을 뻗어 쥰의 팔뚝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리엘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아리엘.”

너 나설 자리 아니다.

나는 쥰에게서 손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상황을 무마하고 나를 더 잘 포장할 방법은 많다. 그 방법의 이행이 내키지 않는 게 유감이다. 나를 바라보다 인사하는 영애 영식들에게 ‘아파보이고 연약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회장을 뒤로 했다.

회장 건물 바깥은 차가웠다. 공간 자체가 차게 느껴졌다. 몸이 추워 어깨가 바르르 떨릴 정도였다. 화장 때문에 차마 벅벅 문대지 못하는 얼굴이라 이마 가장자리를 열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누르며 더듬었다. 돌아버릴 것 같다.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 같아.

아예 난장을 만들어야 했었나. 뒤늦은 잠시의 후회 후 모든 것을 지웠다.

날 비추는 건 흰 달빛이었다. 본채로 이어지는 긴 외부 복도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지운 후회는 조금 전을 위한 후회, 이어 떠오른 후회는 이번에야말로 테두리가 선명했다.

이 이야기를 짠 창작자라 하여 대사 하나하나, 묘사 하나하나가 지구에서는 사랑스럽더니 작금에 와서는 아리엘의 뺨따귀부터 시작하여 과거의 내 뺨따귀까지 올려붙이고 싶어졌다.

그러나 진실로 죄인을 꼽으라 하면 역시 나나 아리엘이 아니라, 날 찌른 그 강도 자식……. 손을 배 위에 올렸다. 가장 먼저 당한 곳이었다. 금발벽안의 외국인은 나를 공격함에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었다. 아직도 기억해.

내가 이 세월이 흐르도록 잊지 못하고 있는 건 공격당할 때의 끔찍한 절망과 외로움과 의아함. 그리고 가족. 선연한 그것들은 각각 알맹이 지어 내게 매달려 있었다. 상처라 하는 것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으나 대부분 숨겨두었으니 선연하다 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나는 정말 살해당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 살아 있어 언젠가는 돌아갈 것인가. 내 정 떼기는 언제까지 계속 되어 나 스스로를 이토록 무너지게 해야 하나.

쥰이 나를 감싸고 위로했음에도 그게 너무 차게 느껴졌다. 그들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야. 햇빛 따스하게 아름다운 어느 날에 나는 다시 돌아갈 지도 모른다. 또 상처 받을 수는 없다. 나를 보호해야 했다.

그들은 그저 글이야. 내가 만든 글자야. 내가 한 묘사대로 생겨나 성장한 것뿐이야. 엄격히 따지면 나만이 진정 인간이야.

나만.

추운 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때, 웬 목소리가 들렸다. 내 위로 달그림자, 기둥 그림자 이외의 다른 그림자가 졌다. 사람의 것이다.

“웬 한숨이 들려서 와봤더니, 맞네. 우리 에브.”

나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뜬금없는 출현이다. 뭐냐, 이 자식은. 지나치게 뜬금없잖아.

그러나 헤르조는 실실 웃으면서 턱 아래에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해보였다.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많이 봤던, 혹은 많이 했던……. 내 수많은 종류의 타락의 원인 중 하나. 꽃받침, 꽃받침이라니. 저렇게 보기 싫었나. 미안, 집사.

나는 뒤늦게 집사에게 사과했다.

그런데 그는 나보다 한술 더 떴다.

“멋진 얼굴이 나타나니 놀랐쪄?”

나에 앞선 원조 변태다. 판단한 나는 지체 없이 옆구리에 손날을 날렸다.

양심 없는 자의 최후를 엄숙하게 봐 주었다. 베르덴과 쥰 앞에서 헤르조를 죽은 사람이라고 말한 건 장난이긴 했지만 나머지 반은 진심이었다. 함께 한 마지막 가출에서 돌아온 이후로 이 자식은 내가 죽일 거라고 벼르고 있었거든.

“왔었니? 어디에 있었니? 왜 왔니? 생각이 있니? 겁이 없는 거니?”

‘니’마다 한 대씩 날렸다. 옆구리, 명치, 등짝, 골고루 때려주니 헤르조가 끙끙 앓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쳐 맞을까봐 숨어있었지이…….”

“……네가 지은 죄는 생각나지도 않던.”

“재미있었잖아.”

나갈 뻔 했다. 정신이. 가출을. 안드로메다로.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아 벽에 몰아붙였다. 신장의 차이가 있는 데도 그는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그러나 그가 그러지 않았어도 나는 쉽게 그를 누를 수 있다. 내 악문 잇새 사이로 뜨문뜨문 으르렁거리는 탄식 같은 것이 터치고 나왔다.

“재미? 너 때문에 난, 난 그때……. 그때…….”

거기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 스르르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돌아버리겠다. 이 양심 없는 놈 같으니.

헤르조와 함께 한 이번 가출에서 홀로 돌아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질려서. 이 자식한테 질려서. 그리고 이 자식이 도주해서.

잡으러 가자면 잡으러 갈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고 돌아왔었다. 어느 축제 중에 이 망나니가 남편 있는 부녀자 셋을 한꺼번에 바람나게 했다는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오해였다. 그러나 그 억울함은 차치하고서라도 눈길을 더 끌었다가는 무슨 사달이 더 날지 몰랐기에, 급해진 내가 그 싸움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무대에! 무대에 뛰어 올라가서! 애교를!

회상하자 급격히 피곤해졌다.

“내 역사상 최고의 수치였다…….”

탄식하자마자 헤르조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배를 부여잡고 허리를 숙인 그의 등짝을 짝 내리쳤다. 그가 꺅 비명을 질렀다. 하여간 얄미운 놈. 찌푸린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됐고. 아리엘은 회장에 있다. 가 봐.”

“아, 아리엘양 왔어?”

“몰랐던 척 하기는. 네가 쥰의 생일 연회에 올 다른 이유가 있나.”

“우리 에브 보러 왔을 지도 모르지.”

“아하. 죽으려고?”

베르덴이 있을 지도 모르는 곳에, 불쾌감을 감수하고 출몰한 까닭이 아리엘 말고 있을 리가 없다. 대충 받아쳐주고는 있지만 그 속내 빤히 보였다.

“아니, 내 불쌍한 친구 보고 싶어서!”

“불쌍하긴 누가.”

“날 위해 생판 모르는 남자한테 사랑 고백했던 누군가가.”

“야, 인,”

마.

목소리가 꺾였다. 헤르조가 나를 와락 껴안은 탓이었다.

나는 그 품속에서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소리 없이 웃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올 것 같다. 온기 하나에 이토록 흔들릴 마음을 부여잡고 나는 이제부터 걸어 나가야 한다. 버텨야 해.

나는 일부러 머릴 짜 생각했다.

음. 아리엘을 사랑하는 이 청년이 에본느를 어떻게 취급했더라…….

이 세상에서 가장 죽이 잘 맞았던 내 친구야, 네가 앞으로 날 어떻게 대하더라…….

쥰이 날 위해 나섰다는 희망 하나로 모든 걸 낙관하기에는 내가 너무 비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헤르조는 나와 친분을 유지하는 내내 우리 아리엘양, 우리 아리엘양 하면서 아리엘을 사랑스러워 못견뎌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그를 예상했으면서도 사귀었고, 그런 그를 보면서도 친분을 유지했다. 마음의 준비는 그를 본 어릴 때부터 해 왔었다.

썼던 글과 달라진 구석이 많음에도 마음을 놓지 않고 지낼 수 있던 건 끊임없이 아리엘을 향한 사랑을 일깨웠던 헤르조의 덕분이다.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의 어깨 너머, 미소 한 조각도 물지 않고 있는 다른 청년이 보였다. 등불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가 시드니인 것을 인식했을 때,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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