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0화 (10/157)

00010 CHAPTER 1. 재시작 =========================

“누님, 쥰입니다.”

잠시 수첩을 보다 손에서 없앴다. 그대로 꼼짝 않고 서서 고개만 위로 들었다. 머리통 표면에 머리카락 이외의 무언가가 가시처럼 털을 세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소름이다.

빈손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들어와.”

“……누님?”

책장 앞에 서 있는 내가 의아한 듯, 쥰이 나를 불렀다.

뭐, 다음 가출은 간만에 계획을 짜서 알차게 움직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마침 잘 되었지. 나는 싱글거리며 그에게 손짓했다.

“혹시 괜찮으면 나 좀 도와줄래?”

책장을 가리키며 묻자마자, 쥰이 빠르게 다가와 물었다.

“무슨 책입니까?”

“저기, 저거, 지리서.”

내가 직접 맞아본 중 가장 묵직한 위력을 가졌던 지리서를 가리켰다.

두껍고 무겁기가 국어대사전 두 권을 합해도 모자라는 책이었다. 도대체 누구 머리를 박살내려고 그 끔찍한 무기를 맨 위에 올려놓느냐고 누군가가 거세게 항의한 바 있으나, 아랑곳 않은 내 손에 의해 올라간 책.

저것에 머리통을 맞고 눌렸다가 정말 사망할 뻔한 적이 있기야 있었다. ……잊고 싶은 비화다.

장난 아니게 무거운 데다, 칸이 빽빽하게 차 있어 빼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쥰은 아무렇지 않게 내게 책을 내려 주었다.

책을 내 손에 놓아주려다 다시 들고 가는 손은 흘끔 봐도 몹시 커서, 문득 놀라고 말았다. 청년 청년 말은 했는데 정말 청년이구나. 이성을 절절하게 사랑하기에 조금도 문제가 없는 성인이야.

가족에 앞선 더 소중한 사람이 생기고도 남을 나이. 나는 자라도 자란 게 아닌 것 같은데, 주위는 자라고 있다는 말이다.

“책상에서 보실 겁니까? 아니면 티 테이블?”

“어, 응? 왜?”

“무거우니까. 옮겨 드리겠습니다.”

엉거주춤했다. 실제로 읽으려던 것도 아니었고, 지금 따라 쥰이 꺼림칙했다. 내 마음이 이미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잠재적 배신자를 보는 눈이 반이요, 이미 배신한 자를 보는 것 같은 눈이 반이었다.

습관적으로 미소했지만 입이 바싹 말랐다. 하지만 나는 살해당하려던 헤르조도 입과 웃음과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살려낸 바 있었다. 웃음 지어 번 수 초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고마워라. 그럼 책상에 놓아 줄래?”

그러자 쥰은 나를 보며 옅게 웃고 책상으로 걸어갔다. 나는 조용히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눈이 점차 식어갔다. 혀가 날름 나와 입술을 적시고 들어갔다.

저게 날 경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이제 와서 쥰이 나를 이성으로 사랑하게 되는 상상을 하게 된다면 끔찍함 일색이지만, 그래도 기왕 이 세계에 와야 했다면 에본느보다야 아리엘의 몸을 입었다면 어땠을까. 모든 상황에서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세계는 나를 사랑하고 축복했을 터.

만족스럽던 내 역사, 인즉 내 에본느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아리엘의 몸의 가치에 버금가게 변했다. 내가 의도한 경멸조차도 가끔은 씁쓸한데, 내 글에 의해 받는 경멸의 무게는 미치도록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아직 쥰이 내게 웃고 있으니 억지력 같은 건 없을 거라 여기고 싶지만. 오늘 밤에 모든 것, 혹은 많은 것이 판단지어 질 테고, 그에 따라 나는 행동하면 된다.

“…….”

쥰이 날 사랑하는 한 나도 그를 좋아할 것이다. 내게서 등 돌린다면 쥰의 미래는 내게 가치 없는 것이 된다. 그때에 공작은 쥰의 미래를 볼모로 삼지 못할 테고, 그렇게 되면 나는 황태자만 피하면 된다. 황태자만.

알드리히, 그 남주인공만.

차근차근 정리해나갔다. 강요된 정돈이었다. 이렇게 정리하지 않으면 나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멀쩡하게 있지 못할 테니까. 어쩌면 초조함에 미쳐서 내 스스로 연회에 내려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일자로 갈무리되어 있던 양 입 꼬리는 쥰이 나를 보자마자 확 치솟았다. 눈에서도 힘을 풀고 웃자 시야가 아주 조금 좁아졌다. 그러나 쥰은 이번에는 웃지 않고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갸웃했다.

“왜?”

“……아까 미령하다 하셨지 않습니까. 지금은 좀 괜찮으십니까?”

“글쎄. 연회에는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차마 못하겠다. 쥰의 이번 생일을 ‘처음’ 겪는 것이라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나 그게 아닐 시 이 몸이 당할 지도 모르는 수모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내 의지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갈 수 없다.

쥰은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제까지 멀쩡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손이 차가워져 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제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시계를 보니 벌써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음. 아침을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자각을 하자마자 발뒤꿈치가 아렸다. 두 시간을 서 있었구나. 미쳤군. 얼마나 넋을 잃었던 건가. 구부린 검지로 입술을 눌렀다. 아버지를 어찌 효과적으로 거역할지 생각도 해 봐야 하는데.

“말씀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

“제발 화를 풀어 주십시오. 용서해 주세요.”

곰곰이 다른 생각을 하는 척, 묵살했다. 눈꺼풀을 내리고 가볍게 감은 눈은 몹시도 시려서, 쥰의 애원에 현실감을 부여했다.

연회에 가지 않겠다 하는 한 줄의 말에 쥰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쥰이 나를 외면하게 되면 나 역시 저렇게 참담한 애원을 하게 될까. 인간이 활자에게? 죽여 해부하면 피에마저 글자가 섞여 나올 것 같은 이에게 진심으로 매달리게 된다고?

참 비참하다, 비참해.

나는 내심 한숨을 삼켰다.

여태 이 정도로 이들에게 선을 그었던 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글이 시작되었다는 자각 하나에 인간과 활자로 거부감을 세운 걸까.

그러나 눈을 열고 태연하게 쥰을 보았다. 물었다.

“응? 뭐라고?”

“…….”

“정말 미안. 다른 생각 하느라 못 들었어.”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부디 말씀해 달라고 여쭈었습니다…….”

쥐어짜는 것처럼 들렸다. 그 언젠가의 베르덴이 겹쳤다. 다리 옆에 늘어진 손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내게 보이는 건 희미한 경련이었다. 쥰의 손이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지나친 두려움이다. 친애하는 누나에게 보이기에는 너무 지나쳐.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네가 잘못한 거라니?”

“…….”

“설마 네 생일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그래?”

“…….”

알면서도 묻는다. 나는 찡그린 눈에 웃음을 올렸다. 급하게 치덕치덕 붙인 애정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귀여운 말을 하는 어린 동생을 보는 것처럼.

“쥰. 너도 알고 있지? 아까 아리엘이 말했던 거미인지 그림자인지 하는 그거, 나인 거 말이야.”

“예…….”

“아까 아버지 표정은 보았어?”

“…….”

“살벌했지. 그렇지? 자발적인 근신이야. 안 그러면 내일부터 다시 몇 주 가둬지지 않을까 해서.”

“…….”

“내 성격 알잖아. 또 외출을 하지 못한다면 나는 심심해서 말라죽을 지도 몰라.”

싱글벙글 웃으며 활기차게 동생을 위로하고 다독였다.

나는 엉뚱해야 한다. 나는 천방지축이어야 한다. 주문처럼 외워왔다. 이제 와 못할 이유, 있을 리가. 탈출했다 돌아오며 가져온 선물을 쥰의 품에 안겨주며 축복하기까지 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내 동생.”

쥰은 찜찜함이 남은 모양이었지만 결국에는 웃으며 방을 나섰다. 하나는 물리쳤다. 내게는 연회 불참을 거머쥐기 위하여 넘어야 하는 산이 하나 있었다.

나는 점심을 방에서 홀로 들고 나서, 공작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킴은 내 얼굴을 다시 하얗게 미친 여자처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 꼴을 하고 갔음에도 공작은 내 불참을 허락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리도 못마땅해 하는 청년의 생일. 기묘하게 여길 건 없었다. 공작이 노리는 건 연회의 규모를 통한 정치와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는 나의 출현이리라. 하긴 요즘 사교활동을 전연 하지 않았었다.

간만에 대섰다. 가지 않겠다. 나 아프다. 딸이 아픈데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라.

그러니 대답하셨다. 무조건 내려가라. 너 안 아픈 거 안다. 필요하다면 여기서 그 징그럽게 떡칠한 화장 지우게 하겠다. 연회에서 깽판 치면 쥰을 가만두지 않겠다.

뒷목 잡을 뻔 했다. 그는 내 약점으로 보이는 걸 너무 알차게 써먹고 있었다! 실상 약점이든 약점이 아닌데 약점인 척 하고 있든.

그러나 아직 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정된 상황도 아닌데, 벌써부터 쥰을 내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실은, 포기하고 있기도 해서.

“…….”

음, 그렇다. 가지 않으려 하면서도 처음부터 이미 포기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연회장에 배송될 것이라고. 날 기절시켜서라도 잘 포장할 테고 어, 어, 하는 사이에 배달될 것이라며. 공작의 안광이 그 정도로 시퍼렇게 날카로웠다.

그래서 결국 나는 여기에 있다.

회장을 둘러보다 알 큰 보석이 달린 목걸이에 손을 올렸다.

내가 손대지 않은 연회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승작할 확률은 낮지만 어찌 되었든 장자로 알려진 청년의 생일이다. 참석하지 않아도 좋을 일은 아니었을 터. 수많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입을 움직이거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우아하게 흐르는 음악. 객들의 화려한 면면…….

초대 객들과 이야기하다 내게로 다가오는 쥰과 멀리서 눈이 마주쳤다. 아니, 내게로, 가 아니라 아리엘에게로, 가 옳을 지도 모른다. 나는 옆에 있던 아리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를 따라 쥰을 보고 있는가 싶던 아리엘이 내 시선을 느끼고 내게 눈길을 주었다.

나는 오늘의 아리엘을 경계하여 끊임없이 피하고자 했지만, 내 오랜 친구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오던 참이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보기에 떨떠름했다. 그러나 그 꺼림칙함은 내 마음 탓이리라 가볍게 수긍하고 넘어가고자 했다. 미소 짓는 걸 보면 아직은 아닌가 보다 하며. 그렇게 나도 버티고 아리엘도 버텨 연회가 끝나기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럼 나의 이 삶은 무척 평안해질 테니까.

그러나 아름답고 선한 아가씨는 내게 말했다.

“늠름하고 훌륭한 남동생이 있어서 행복하시겠어요, 에본느.”

상냥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내게 왔다. 베르덴, 헤르조와 같은 내 또 다른 소꿉친구는 눈치는 물 말아먹었어도 배려하는 마음은 깊었다. 항상. 그랬으나.

이건 아니다.

내가 그토록 경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수첩 안에 적어두었던 아리엘의 대사가 이와 비슷했다. 나는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돌려보았던 대로 대처했다. 웃음이었다. 싱글벙글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쥰을 보며 못내 다정하게 ‘그래요.’하고 말을 하려고 했다. 거기까지가 내 계획이었는데, 웃음은 성공했으나 입을 벌릴 시간도 없었다. 빠르게 다른 조치를 취할 새도, 생각할 새도 없었다.

손, 손. 내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리엘을 쳐내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꾹 힘을 주고 있던 손이 멋대로.

인즉, 글대로, 나는 그녀를 쳐냈다.

“꺗!”

“……아.”

내 손은 내게 살가운 척 팔짱기려 하는 아리엘의 손을 쳐냈고,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한 아리엘이 뒤로 넘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놀란 시선들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안다. 찌푸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두 손을 툭 내렸다. 제길. 잘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또 뭔가. 본디 아리엘은 에본느가 쥰을 지독하게 탐탁치 않아하는 성정을 이용하여 에본느 스스로 그녀에게 불쾌감을 표출하도록 했었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도 불쾌해하지 않고 웃었다.

거기까지는 잘 되었는데. 이건, 정말, 뭐야.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직 고개를 들지 않고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표정을 정돈해야 했다. 아-아, 큰일 났네. 당했다. 일이 일어나 버렸어. 이 글이 능동적으로 움직여 적극적으로 나를 엿 먹이려고 작정했나 보다.

이를 갈고 싶은 걸 참으며 눈을 좀 더 들었다. 나는 아직 비교적 침착했다.

그러나 아리엘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잊었구나.

정말이지 그 순간, 하얗게 색 바래는 머릿속에 딱 그 감상만 들었다. 잊었구나. 부디 잊지 말라고 불과 오늘 아침에 말했건만, 너는 잊었구나.

스치고 지나간 살의와 비웃음이 일순이나마 선명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리엘은 내게 그런 시선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이제야 새삼 깨달았다.

아리엘이 내게 쥰이 있어 행복하겠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했을 때부터 인지를 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이제야 깨달으니 충격 역시 뒤따라 고스란히 왔다. 너는 아마도 내가 알던 아리엘이 아니다.

글대로 그녀는 쥰의 생일인 오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다.

“필르 발리앙, 괜찮으세요?”

아리엘의 주위로 모여드는 영애 서넛, 그 가운데에 묻힌 아리엘. 옆에 있는 쥰. 몹시 피곤해졌다. 은연중에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 시간선이 내가 독주하는 시간선이 아니라, 이미 누구 한 명은 인생이 끝장난 이후였다는 그런…….

이제 오늘 아침의 아리엘은 없다. 내가 그녀를 도왔던 것은 잊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적의로 보았을 때, 원래의 이 몸의 영혼이 아리엘의 원래 시간에 있었던 모양이고.

시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쥰이더라. 나는 그를 보며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그를 향한 게 아니라 상황을 향한 허탈함이었다. 쥰의 눈이 조금 일그러졌다.

아, 이런.

손을 들어 뒷목을 매만졌다. 쥰. 내가 말했던가? 네 이 생일 연회, 누군가에게는 처음이 아니라 두 번 겪는 일이 될 지도 몰랐다는 것.

“괜찮아요.”

“괜찮다니요. 그렇게 세게 넘어지셨는데.”

내가 말했던가? 아리엘은 에본느의 계략에 몰려 죽는다는 것.

“필르 라이네. 갑자기 왜 그러셨습니까.”

내가 말했던가? 그 에본느, 나중에 아리엘의 계략에 몰려 죽는다는 것.

내가 말했던가?

내가 쓴 글, 에본느에게 죽은 아리엘이 오늘 회귀하는 글이었다는 것.

“…….”

우리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아리엘의 말을 들었을 터. 쥰을 칭찬하고 나서 내가 격하게 행동했다는 것만 기억해 둘 확률이 높았다. 내가 그 중간에 쥰이 예뻐 죽겠다는 식으로 웃었다는 사실은 고이 잊었겠지. 나와 쥰이 사이좋았던 것도 홀랑 까먹었을 거야. 저희들 보기에 유리한 가십으로 살이 붙어 떠돌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말없이 눈을 내리떴다.

그리하여 이 몸에 의해 죽은 여주인공이 내 앞에서 웃고 있는 것이다. 수년을 몰리며 마음이 죽어가다가 어느 정도의 독을 품게 된 여주인공이. 내 앞에서.

내, 앞에서.

그녀가 기억하는 에본느는 내가 아닐 텐데도 이 자리에서의 에본느는 나이기 때문에.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앞으로도 상황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는 망한 것과 다름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 없던 욕설 하나와, 그 욕에 대한 깨달음이 머리를 강타했다.

아, 이게 바로 잣 됐다는 거구나.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런 욕이었던 것 같다. 나는 부서질 듯 웃고 있는 아리엘을 물끄러미 보았다.

후에 침착하게 생각해보아도 내 손이 어찌 내 의지를 벗어나 움직였는지 설명할 논리를 조금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 순간 드는 여러 염려 중 가장 큰 것은 그것이었다.

내가 쓴 글이 혹여나 나를 물었나, 하는.

억지력의 유무에 대한 염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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