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CHAPTER 1. 재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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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당을 나오자마자, 나를 따르는 킴에게 베르덴을 불러오라 했다. 방까지는 혼자 알아서 갈 수 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렇게 홀로 돌아가는 도중에 방 근처에서 마주친 집사는 내 얼굴을 몹시 수상해 하는 눈초리로 보았다. 그래, 엄청 하얗지? 자비롭게 이해해주기로 했다. 해서 빙긋 웃었는데, 이번에는 진심으로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상처 받았다. 거기까지 이해해주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눈을 슬쩍 찌푸렸다.
“너무하네.”
“너무하신 건 아가씨이십니다. 얼굴이 허옇게 떴습니다. 혹시 어디 편찮으십니까?”
혹시 머리가 편찮은 거냐고 묻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인 것은 알까.
나는 재미있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게 맞아.”
“…….”
그러자 집사의 표정이 더욱 괴상해졌다. 지금 내가 들은 게 무엇이냐, 의아해 함과 동시에 팔딱팔딱 비명을 지르고 싶어 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그런 오묘한 괴상함이었다.
이 반응도 마찬가지로 재미있었기에 나는 웃었다.
“왜. 나는 아프다 하면 안 되나?”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아가씨는, 아가씨는, 대체로, 음, 씩씩하시니까…….”
씩씩하다는 막연한 말에 얼마만큼의 고뇌가 깃들었는지 느껴졌다. 아파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이 천방지축으로 군다는 걸 참 어렵게도 말한다. 나는 혀를 차며 손사래를 쳤다.
“됐어. 그렇게까지 애쓰지는 않아도 돼. 화장한 게 다 테가 날 텐데 뭘.”
“그건 그렇지만. 도대체 어째서.”
“이따 연회에 나가지 않기 위한 포석이지.”
“……도련님의 생일 연회에 나가질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삼분지 이가 장난이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노인은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모양이었다. 그의 새파란 눈이 휘둥그레 나를 담더라.
조금은 기묘하게 느껴지는 경악이었지만, 나는 이내 이해했다. 그럴 만도 하다, 며.
내가 쥰을 예뻐하는 건 이 저택뿐만 아니라 라이네 영주성인 블린성의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가출 중이다가도 돌아와 쥰의 생일 연회에는 반드시 참석한 후에 재차 튈 정도였으니까.
그런 내가 연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건, 어쩌면, 의미를 부여하기에 좋은 일일 지도 모른다. 후계자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나는 그걸 알면서도 되도록 참석치 않길 바라는 것이고.
“그래.”
“……알게, 알겠습니다. 각하께 제가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놀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당황할 정도인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내가 쥰을 예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집사 외에도 많기를 바란다. 심장이 조였다 풀리기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내가 후에 사람을 보낼 거니까. 그보다 그대, 내 얼굴을 좀 봐봐.”
집사의 주의를 돌리며, 두 손을 올려 얼굴 아래에 받침을 해 보였다. 노인이 얼떨떨해하며 눈을 깜박였다.
“예? 예.”
“좋아. 그대가 보기에는 내 얼굴 말이야. 아버지께서 보시고 ‘아, 얘 아프구나.’ 하셨을 것 같아? ‘아, 얘 정신이 아프구나.’ 도 좋네.”
“…….”
“저런, 울지 말고. 대답하기가 그리 어려워?”
표정이 썩 좋은 편이 아니기에 안쓰러워하며 말해주었더니, 우리 중후한 노인 집사가 즉각 반발했다.
“안 웁니다.”
“울고 싶은 건 맞잖아. 어쨌든. 영 아니야? 그냥 화장 떡칠한 것 같기만 해?”
“……예.”
좋아. 좋은 대답이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아버지는, 내가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연회에 안 내보시지 않을까?”
“그걸 노리셨습니까?”
“노렸어.”
눈치를 밥 말아먹은 아리엘이 아버지의 성질을 너무 돋구어놓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화장으로 미친 짓을 예고하는 것과, 근신 풀리자마자 돌연변이 거미가 되는 것은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집사와 이만 작별했다.
방에 들어오니 시녀와 하녀들이 내 방을 청소 중이었다. 오늘의 화장은 킴이 했고 킴만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흰 것이 둥둥 떠다니니 놀랍겠지. 대수롭지 않게 시녀 한 명에게 손짓했다.
시녀가 대답했다.
“예. 아가씨.”
“이것 좀 지워줄래?”
분가루가 눈에 들어가기 시작했는지 마침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똑똑히 보았다. 열린 문 앞에 나타난 베르덴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대로 후진해서 사라지는 걸.
이후 반시간에 걸쳐 시녀 둘이 붙어 깨끗하게 지우고 약초수로 세수했다. 노림수의 대가는 혹독했다. 반시간이라니. 내 손으로 지워야 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 방에는 다른 시녀들 없이 베르덴만이 돌아와 서 있었다.
나는 내 시중을 든 시녀들이 문을 닫고나가자마자 달려가서 그에게 옆차기를 날렸다. 그는 얌전히 맞아주었지만, 막상 끙끙거리기 시작한 사람은 나였다. 이 자식 엄심갑 입었어!
그러나 베르덴은 몸을 웅크리고 신음하고 있는 나를 친절하게 부축해 세웠다. 베르제르에 앉혀주기까지 했다. 나는 당연하게 치마를 걷어 올렸다.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내 다리를 살피던 그가 폭 한숨을 쉬었다.
“멍이 졌습니다.”
“들었겠지. 끄으…….”
“일단 맞아드리긴 했는데. 왜 때리셨습니까? 폭력은 좋지 않습니다.”
“경 아까 진심으로 피곤해했지요? 내 얼굴 보고.”
“그 모습을 보고 피곤해하지 않을 기사는 라이네 가문에 없습니다.”
야 인마.
심지어 이 자식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꽉 잡아당겼다. 그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해서 얌전하게 늘어난 그의 얼굴을 족하리만큼 빤히 보다가, 검지와 엄지를 풀었다.
그리고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왼 손을 풀자, 치마가 다리를 가리며 흘러내렸다. 베르덴도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쓰게 변한 내 상황을 생각하다 씩 웃었다.
“아리엘도 왔겠다, 누이동생하고 좀 회포도 풀고 하시라고요. 오늘내일은 휴가인 걸로 하고.”
“……그리고 어디로 도주하실 작정이십니까.”
“도주라니. 농담도. 오늘은 쥰의 생일이잖습니까. 가출했다가도 돌아와야 하는 날인데.”
천연덕스럽게 부정했지만, 아아, 하지만 도주라. 매력적인 단어다. 정말이지 알드리히만 아니면 이만 저택을 나가서 잠적했을 텐데.
좋은 생각처럼 느껴져서 했던 부탁이 그 즉시 내 발목을 잡을 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 날부터 알드리히는 내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개자식이었다. 원래부터 우리 사이는 진창이었지만 더더욱.
내가 미리 운을 띄워놓지만 않았어도, 평범한 가출처럼 가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라, 가출이 길어지네? 길어지네? 어라, 아직도 안 와? 어라? 어라? 어, 돌아왔네.' 정도로 유연하게 끝낼 수 있었을 거야.
쫓겨 다니는 느낌이 싫어서 아기자기한 술래잡기게임도 비명을 지르며 했던 내게, 실전 술래잡기라니. 어디에 숨어 있든 나는 하루하루 마음 졸이며 끔찍해할 것이다. 그런 불안한 잠적은 원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야.
한숨을 폭 쉬고 입을 열었다.
“할 말은 이걸로 끝. 이만 나가 보세요.”
“…….”
저 눈 봐. 나는 픽 웃었다.
“저기, 경. 쥰을 인질로 잡혔거든요, 나. 가출 못 한다니까.”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는데 베르덴은 더 차가워졌다. 그래도 곧 어찌어찌 인사하고 나가긴 했다. 달칵. 문이 닫히자 나는 즉시 일어나 책장에 다가갔다.
아까부터 책장으로 달려가고 싶어 다리가 동동 뜨는 것 같아서 참느라 고생했다.
“음.”
개인적으로 소장하기 위해 구입한 수많은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칸들을 찬찬히 살폈다. 오른 손을 올려 허공에 대고 쭈욱 훑어나가기도 했다. 어디, 어디 보자……. 비상시에는 대충 이 책으로 변명을 삼자. 두꺼운 책 한 권을 눈여겨 두고, 손 위에 있는 얇은 종이 수첩을 열었다.
종이 색이 노랗게 바랬다. 벌써 이십여 년 전인 걸, 이걸 쓴 건. 벌써 그렇게 되었다.
결국 흑역사의 힌트라 하는 이것을 펼쳐볼 때가 온 것이다.
과도한 수치스러움으로 콩콩 뛰고 있는 심장과 곤란한 호흡을 가라앉히고자 노력했다. 심호흡을 한 번. 두 번. 세에, 버어언. 그리도 즐겁게 쓴 자랑스러운 내 글이었는데, 이 세계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흑역사로 지정했다. 내가 창작자에 불과할 때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계에 온 시점부터 창작자가 아니라 직접 겪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나는 길게 한숨을 풀어내며 속삭였다.
“그래도 좋아해.”
고백하건대, 흑역사라 생각하면서도 아직 사랑스럽게 여기고 있긴 했다. 이 글에는 참 많은 걸 쏟아 부었으니까. 나를, 쏟아 부었으니까. 예를 들어 나의 부모님. 그리고 에본느 라이네의 부모님. 나의 가족. 그리고 아리엘 발리앙의 가족. 나의 친구. 아리엘 발리앙을 사랑하는 그들.
혹은 나의 가치.
손끝으로 표지를 더듬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번째 장을 열었다.
나는 이것을 읽어야 했다. 되도록 미움 받고 싶지 않기에. 되도록 나를 흔들고 싶지 않기에. 내가 이 세계에서 다시 쌓은 인생은, 내게 있어 몹시도 아름다운 것이기에. 그 자리에 서서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한글로 또박또박 쓰인 설정, 사건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기억나는 것만 적어둔 것이라 빠진 것도 있을 테고, 부정확한 것도 있을 테지만 이건 어쩌면 내 보루가 될 지도 모른다.
잊고 있던 이야기가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에본느 라이네고, 글의 여주인공은 아리엘 발리앙. 내가 저질러야 했던, 혹은 이미 저질렀을 지도 모르는 악독한 일들을 읽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에본느 라이네라는 점. 소위 말하는 억지력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 세계가 내게 맵게 대할 수 있다는 것과 이 세계는 아리엘을 위해 꾸려졌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억지력의 유무는 후에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조금도 낙관해서는 안 되었다.
침을 삼켰다. 속이 답답했다. 긴장이다. 아리엘에게 호의적이던 쥰을 보고 일어난 초조감.
나는 악한 조연이다.
나는 오늘을 기점으로 쥰에게 미움 받을 지도 모른다.
내 환상을 부어 만든 아리엘의 손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길 지도 모른다. 내가 무너질 지도 몰라. 가장해 왔던 여유는 아침 식사의 끝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다지 막연하지 않은 두려움에 내내 사로잡혀 있었다.
악녀의 비참한 말로를 모두 읽고 나서 나는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모든 방어기제를 잠간 거두고 잠잠히 가슴에 박았다.
나는, 에본느다.
그러나 글로 만들어진 인물들에 의해 마음이 상처받기를 순순히 용납할 수는 없다. 나는 에본느다. 동시에 나는.
그때부터는 방어기제가 다시 떠올랐다.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
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인간이다. 나는 혼자일 수 있어. 상처받지 않아. 반드시 살 것이다.
떨리는 숨을 코를 통해 흘려보냈다. 그리고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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