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CHAPTER 1. 재시작 =========================
“누님, 왜…….”
자세한 사정을 말할 사람은 이 저택에 아무도 없다. 집사는 그저 간단한 명령만 들었을 테고, 사정을 아는 나와 베르덴과 공작은 입을 다물 것이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너는 모르는 채 있으면 된다.
“또 여행을 가려 했는데, 역시 아버지 입장에서는 화가 나시겠지? 근신은 약한 징계 아닐까?”
일어나 손짓했다. 주춤주춤 다가온 그의 팔을 잡고 티 테이블로 인도했다. 더운 열기가 훅 끼쳐오는 걸로 봐서는, 퇴근해서 집사에게 듣자마자 달려온 모양이었다.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쥰을 먼저 의자에 앉히고 나서 나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얼굴이 그렇게 엉망인가.
킴이 들어오자, 들고 있는 얼음주머니를 내게 주고 이만 나가게 했다. 시녀는 두 말 않고 군더더기 없는 고운 자태로 명령을 이행했다. 새 얼음, 새 주머니로 채웠는지 주머니가 그리 축축하지 않았다. 공작에게 세게 맞은 뺨에 대자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움찔 눈을 찌푸렸다가, 지금 내가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멋쩍게 웃었다.
쥰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저런.
“괜찮아. 정말로.”
“하지만.”
“걱정해 주는 거지? 고맙다. 하지만,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 괜찮아. 자초했으니까.”
괜찮지 않다. 분한 마음을 그새 잊어버린 것뿐이지, 다시 꺼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꺼내 씨근덕거릴 수 있는 노여움이었다.
감히 뺨을 때려. 활자 주제에.
아버지이면서 어떻게 자식에게 손찌검하는 데에 한 치 망설임도 없어.
하여간 부모란. 이곳에 아예 정착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도, 이럴 때면 이곳이나 지구나 다르지 않다고 회의감이 든다.
차라리 이 환상이 내게 다시 주어진 ‘현실’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나는 저 공작을 진정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이 따귀에도 이런 식으로 분노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 실로 모르겠다. 나는 내심 혀를 차면서도 싱글싱글 웃었다.
“정숙하고 음전한 딸자식처럼 예쁜 짓도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간만에.”
“…….”
쥰은 말이 없었다. 이런 종류의 무거운 침묵은 내가 굳이 견디기 싫어하는 것이다. 나는 이야기가 끊길 새라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곧 네 생일이지. 어디 보자. 한 달?”
고개를 돌려 달력을 확인했다. 벽에 걸린 종잇장의 내용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노을도 다 저물어간다. 초를 켤 시간이었다. 곧 불이 올 터. 그래도 날짜는 확인했다.
“삼 주도 안 남았구나. 스무 날 남았어.”
말을 하면서도 잠시간 달력을 좀 더 보았다. 근신에서 풀려날 법한 날짜를 대충 짐작해 보기 위해서였다. 선물을 직접 준비할 시간이 있으려나. ……아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움찔했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올해는 내가 스물다섯 살인 해.
올해 쥰의 생일에 무언가 이벤트가 있었던 것 같다. 아니지. 있을 것이다. 생일 같이 기막힌 기회의 날을 내가 그저 날려버렸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글 자체도, 로맨스도 처음 써보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벤트를 자연스럽게 발생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쥰이나 황태자와 관련된 이벤트 중에 이 몸의 멘탈이 상당히 부서지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악녀는 황태자를 사랑했고, 악녀의 ‘이복’ 남동생은 쥰. 쫓아낼 악녀였으니 당연한 흐름이었다.
“음…….”
이래서야 차라리 쥰의 생일에는 방에 꼼짝 않고 틀어박혀 있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인 건 자명하다. 모든 건 내 멘탈과 내 평온한 삶과 내 생명을 위하여.
막연하고 흐릿한 미래를 상상하며 달력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주위가 다시 돋아났다. 나는 그제야 쥰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시선을 끊지 않고 있었다. 알 수가 없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응? 왜?”
“아닙니다. 아무 것도.”
쥰은 다시 순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마주 웃었다. 이렇게 동화처럼 살랑거리는 분위기, 얼마나 좋은가. 언젠가 꿈꾼 적 있던 남매의 모습이었다. 동생의 말간 웃음이 나를 향한다는 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포근한 행복감을 주곤 해서, 나는 쥰을 어여뻐할 수밖에 없었다.
또, 이런 포근함을 느끼면, 난 다시 마음을 뒤집어 이곳이 내 현실이기를 바라고. 일 하나하나에 마음은 계속 뒤집히고 바뀐다. 이래서 맥락 없는 변덕이라 하는 것이다.
약간 뜨뜻해진 주머니를 떼어 한 번 흔들고 나서 다시 뺨에 댔다.
“이번 연회를 내가 준비해줄 수 있으려나. 성대하게 해 주고 싶은데.”
“예? 설마 계속 방에 계시려고 하십니까?”
그렇게 진심으로 놀라면 더 짓궂게 굴고 싶어진다. 나는 빈손을 뻗어 검지로 콕콕 쥰의 볼을 토닥였다.
“그건 무슨 뜻일까? 응? 근신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나올 줄 안 거야?”
“아, 아, 아니. 그게.”
“뭐, 여태 그러긴 했지만.”
“누님.”
짤막한 부름이었으나 어리광처럼 들렸다. 나지막하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의 모든 행보는 결국 나를 위해서다. 그러나 그 와중에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어쩌면 기가 막힌 일이고, 어쩌면 기쁜 일이었다.
내가 공작의 앞에서 더 자주, 더 멋지게 깽판을 부릴 예정인 건 결국에는 나를 위한 것이고. 쥰을 원래대로 공작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도 나를 위한 것이다.
그저, 그걸로 되었다. 쥰이 공작이 되고 싶어 하든 아니든, 이 청년이 공작이 되는 편이 그의 미래를 위해 좋든 아니든.
“자, 이제 가서 식사해야지? 시장하겠다.”
“아, 그럼 누님은…….”
이번에도 내가 먼저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야 근신이니까 방에 차려지겠지.”
쥰은 이상할 정도로 내 손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좀 더 들어 내 얼굴을 보았다. 오늘의 그는 정말이지 곧잘 짐작할 수가 없다. 왜 그러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 지었더니, 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살짝 웃고 내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일어서는 과정에서 내 팔에 그다지 힘이 들어갈 일은 없었다. 참 배려심이 깊다. 나는 한숨 쉬듯 웃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그렇지. 우리 마주 선 김에, 쥰, 내가 사과해야 할 게 있는데.”
“사과, 말씀이십니까?”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멋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네게 살림을 꾸리게 한 걸 내 입으로 말씀드려버렸어. 미안하다. 혹시 아버지가 뭐라 하시면 다 내 탓으로 돌려. 알았지? 실제로도 내가 조장한 거고.”
도무지 내켜 하지 않는 걸 억지로 떠넘겼었다. 쥰 스스로도 내 탓이라 생각하고 있으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렇게 변명해주길 바란다. 점점 나 설 곳을 잃어가는 것이 내 목표다. 물론 내 있을 자리를 아예 없애는 건 어불성설이니 어느 선에서 멈추긴 해야겠으나.
쥰은 족히 유능한 청년이다. 내가 온전히 이 세계 사람이지는 않기에 이해를 못하고 있는 바, 공작이 이만 쥰의 꽉 찬 실체를 돌아보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꼭 쥰을 공작으로 만들고 말겠다. 반드시. 알드리히가 날 잡으러 온다 했으니 합법적으로 도망칠 근거가 필요해졌다.
쥰이 나를 제치고 공작위를 받을 수 있는 가장 깔끔한 방법은, 내가 죽는 것이지만.
나는 그 모든 속내를 아무렇지 않게 포장하여 재차 사과했다.
“미안해. 정말.”
언젠가는 필히 알려질 일이었으나, 내가 터트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여러모로 손을 써둘 것을 다짐하면서도 그에게 몹시 미안했다. 그리고 여러 이유에서 파생된 이 죄책감은 말도 못하게 혼잡했다.
그래서 고개가 점점 내려가고 있는데, 내 손 위에 있던 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어?”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보았다. 쥰은 미소 없이 약간 눈을 찌푸린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게 살림을 맡기신 것? 아버지께 말씀드린 것?”
“……둘 다?”
“누님께서 미안해하실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기묘하게도 약간 멍해졌다.
“누님께선 그 어떠한 것도, 제게 사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쥰이 몸을 굽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하셔도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누님이라며 웃었다.
“응…….”
나는 얼결에 웃었다. 갑작스러운 경험이었다. 새삼스러운 감정이기도 했다. 불현듯, 이 청년이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묘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러나 나 역시 말할 수 있었다. 너를 좋아한다. 쥰. 내 동생. 어린 온기야.
그가 나를 좋아하는 한 나는 그를 좋아할 것이다.
하여 나는 다시 이 세계를 사랑스럽게 느끼고. 한층 더 이곳이 내 현실이기를 바라게 되고. 지구에 돌아갈 일이 없기를 바라게 되고.
그러나 쥰은 과연 언제까지 나를 좋아할까.
점점 원작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망신당해야 하는 날까지 스무 날이 남았다는 사실에 아까부터 긴장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실은 이 청년에게 수모를 당하고 버림을 당하게 되어야 했던 몸이다. 시기상으로도 현재 이미 반 이상 버림을 당한 상태여야 했을 뿐더러.
……그리고 그런 원작을 떠올리면, 나는 또 지구에 내 몸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나도 나를 알 수가 없다.
나는 은연중에 웃었다. 앞으로 어찌 될 지는 겪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쥰을 내보낸 문 앞에 서서 망연하게 문에 음각된 문양을 응시했다. 이내 왼뺨에 대고 있던 주머니에서 손을 풀었다. 그것이 치마를 타고 흘러내리다 풀썩 바닥에 떨어졌다. 피곤해졌다. 오늘은 이만 자고 싶었다.
*
근신은 일주일이 넘고, 이주일이 넘더니, 거의 삼 주에 달해갔다.
그 사이에 첫째 장부부터 시작하여 빠르게 내게 돌아왔다. 겉모양만 안주인인척 하지 말고 제대로 안주인 역할을 하라는 뜻이었으리라. 나는 눈웃음을 치며 집사의 앞에서 벽난로불로 예쁘게 불태워주었다.
숨이 넘어가려 하던 집사의 뒤로 공작이 나타나더니, 또 쥰을 들먹였다. 그래서 이미 불태운 장부를 어찌하느냐고 빈정거려 드렸다. 그러자 공작은 짠하고 원본을 내미셨다.
-…….
그 순간 내가 숨넘어갈 뻔 했다. 열 받아서. 아, 내가 진짜!
어쩐지 태운 장부의 표지 촉감이 지나치게 새것 같더라. 나는 어디 한 번 해 보자는 마음은 여전히 만반이었으나, 순순히 받고 지나갔다. 설마 쥰이 몇 달 손을 놓았다고 이것들을 잊어버리겠는가. 반 년 안에는 살림을 그에게 다시 돌려줄 속셈이었다.
근신에서만 풀려보라. 뒷목 잡고 넘어갈 사람은 내가 아니라 공작이 될 터. 싱글벙글 웃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 근신이 풀린 날은 쥰의 생일날이었다. 자정을 기해 근신이 풀리자마자 나는 벽을 타고 홀로 외출했다. 테라스 아래의 병사들은 그대로였지만 그 사람들조차 피하지 못해서야 전문 가출꾼이라 하지 못한다, 는 농담이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탈출하는 능력이 좀 대단하다, 내가.
삼 주 만의 자유를 만끽한 나는 용건을 마치고 아침놀을 맞으며 돌아왔다.
그리하여 지금은 어제 저택에 도착한 손님과 함께 하는 아침 식사 시간.
“오늘 새벽에 산책을 하는데 엄청나게 큰 검은 거미 같은 게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것 같아서 놀랐어요. 줄 같은 것에 매달려 있던데. 혹시 무슨 애완동물이라도 키우시나요? 그림자였을까요?”
“…….”
“…….”
상석에 앉아있는 공작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접시에 박고 절대 들지 않았다.
아리엘이 눈치를 말아먹은 것처럼 순진한 걸 깜박했다. 아니, 그보다, 누가 보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아니, 아니다. 그보다는, 쥰의 생일연회를 위해 아리엘이 어제부터 미리 라이네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걸 깜빡했다.
아, 살 떨린다.
집요한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척 하고 있자니 내 옆에 앉아있던 쥰에게서 코를 울리는 작고 짧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마 나만 들었을 것이다. 쥰은 듣기에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아리엘에게 대답했다.
“그림자였을 겁니다.”
“음. 역시 그렇겠지요?”
아니요. 나였어요.
왼 손을 올려 뒷목을 슥 쓸고 내려왔다. 최소한의 양심 같은 게 아니라, 어쩐지 떨떠름해서. 공작에게서 따사로운 분노가 느껴지는 것 같은 건 착각일 것이다.
“나는 이만 일어나지.”
이번은 넘어가겠다는 뜻이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일어난 공작과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부딪혔다. 나는 웃었다. 그는 차갑게 나를 보다, 일어난 쥰과 아리엘을 둘러보고는 식당에서 나갔다.
조금은 공작의 내심이 이해가 가는 것도 같다.
참 기가 막히겠지. 나도 내 작태가 이렇게나 기가 막히는데.
그가 식당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의 등을 쫓고 있던 시선을 눈꺼풀로 차단했다. 쥰을 약점으로 잡히지만 않았어도, 내가 새벽에 나갔다 들어오는 걸로 공작의 눈치를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점이 기가 막히는 거고, 공작은 내가 한낱 천것을 약점으로 잡힌 것이 기가 막히는 것이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도로 자리에 앉는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도 이만 일어날게요. 몸이 영 좋지 않네요.”
그러자 아리엘이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예? 에본느, 아직도 회복이 덜 된 거였어요?”
“네. 안타깝게도.”
아픈 적도 없으니 회복이 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나는 빙그레 미소했다.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아리엘의 선한 모양의 눈이 축 처졌다.
“그런 거예요? 저는 에본느랑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미안해요.”
내가 괜히 흰 분으로 떡칠을 하고 내려온 게 아니었다. 봐라. ‘나 아픔. 아픔. 몹시 아픔.’ 하고 미칠 듯이 어필하는 이 안색을.
나는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몸이 아프고, 그래서 동생의 생일 연회에도 참석할 수 없어 마음이 아픈, 우아한 소공녀다. 오늘을 위해 내가 잡은 컨셉이 그랬다. 설정이 참 자세하다고 떨며 중얼거린 킴은 날 화장시키다 눈에 눈물을 맺고 말았지만.
물론 이따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
하여, 혹 참석해야 한다면 참석할 각오 역시 되어 있었다.
악녀로 치닫는 길에서는 되도록 발을 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만……. 뭐. 변수만 없다면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 내심 한숨을 쉰 나는 아리엘과 쥰을 일부러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친절하게 미소했다.
“괜찮다면 두 분이서 대화를 나누셔도 되겠네요.”
쥰은 생일이라는 사정을 참작 받아 출근치 않아도 된다. 그리고 서브남이고. 그리고 물고기고. 아리엘의 딸랑딸랑이고. 어차피 어느 정도 아리엘에게 호감이 있을 터, 호감의 쐐기를 박는 오늘, 내가 도움을 주어 나쁠 건 없었다.
“미안해요, 아리엘.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날게요.”
“아, 네. 쉬세요. 어서 완쾌하길 기도할게요.”
그러니 부디 저 두 사람이 기억하길 바란다. 내가 저희를 이모저모 도와주려 했다는 걸.
후에 내 평온하고 순조로운 삶을 위해서라면 난장판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어쩌면 내가 쓴 악녀에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나도 수용이 가능하다. 내가 스트레스 받지 않는 선 안에서 그냥 악녀 정도라면 괜찮아. ‘미친 악녀’취급만 안 당하면 돼.
부디 이 순간을 기억해. 너희.
내 평온이 완전히 깨질지 아닐지 결정되는 날은 오늘. 나는 바라고, 다시 바랐다. 기억해. 부디 기억해. 마지막으로 그들을 뒤돌아보고 식당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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