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7 CHAPTER 1. 재시작 =========================
대놓고 이렇게 말하니 애교를 부리는 건 위험하게 되었다. 서로 더 피폐해질 거야. 정신도, 눈도, 양심도, 여러모로.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내렸다. 위에서는 중후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마 한가운데가 뚫릴 것 같이 따가웠다. 공작은 싸늘함으로 무장한 채였다.
그가 말했다.
“돌아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지. 그런데 또 나가겠다니, 네가 제정신이더냐.”
“제정신입니다.”
“내가 누누이 말했다. 후계는 너라고.”
“…….”
촘촘하게 조이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아닌 내용에. 차곡차곡 쌓아온 지난 역사를 말하는 것일 뿐인데도 박력이 대단했다. 이 순간 나를 버티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오기다. 환상 세계에서조차, 내가 쓴 조연, 활자에서부터 태어난 인물에게 밀릴 수 없다, 하는.
나는 심드렁한 척 대답했다.
“저는 거듭 거부했습니다.”
“천것에게 후계를 어찌 넘기겠느냐.”
“쥰은 제 동생입니다.”
“천것의 피에 너를 비하지 마라.”
……내가 쓴 글이지만, 또 생각해도 참 설정 한 번 막장으로 잡아 놨다.
그러나 쥰의 취급이 이렇게까지 치달은 건 내 책임이었다. 작가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정말 내 책임.
글에서의 이 몸, 에본느는 날이 갈수록 천방지축으로 악독해져갔다. 이 몸은 어렸을 때부터 놀라울 정도로 영리했고, 쥰을 탐탁치 않아하는 공작은 이 몸의 앞에서 자주 쥰과 이 몸을 비교했다. 그러니 저도 모르는 새 이기적으로 변해가기도 했을 뿐더러 여주인공의 단짝 친구라는 상황은 이 몸의 인격 형성에 상당히 나쁜 영향을 주었다.
결국 현 공작이 후계자로 내심 생각하게 되었던 사람은 이 몸이 아니라 쥰. 당연히 청소년기 후반부터는 쥰도 공작에게 나름의 어여쁨과 기대를 받으며 자라오게 되었었다.
그리고 글의 원래 이야기와 다르게 이 시간, 그 모든 어여쁨을 박탈당하게 된 건, 글에서처럼 나를 향한 공작의 기대가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차기 공작으로 기대 받을 만한 사람으로 남아있었다. 능력, 성격, 적통의 명분 등을 포함한 역량이 여전하게.
쥰이 대우 받을 이유가 없다. 이는 내 책임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좋습니다만, 그 말씀 하시려고 절 묶으셨어요?”
한숨을 쉬며 묻자, 공작이 뒷목을 곧 잡을 것 같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돌아온 날 또 가출하겠다고 하니 묶은 것이다. 또 언제 사라질 줄 알고.”
“어휴. 어차피 나이가 나이라 곧 결혼 할 테고, 결혼하면 출가해야 하는데요. 연습이지요, 연습. 아버지도 연습하세요.”
“출가는 무슨 출가. 너는 가문에 남아 라이네를 잇는 게 당연하다.”
공작은 정신이 혼미해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잡아챈 것 같았다. 연습 중인 거니까 너도 연습하래. 내가 공작 입장에서 들어도 열 받겠다.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여식에게 할 수 있는 체벌이라곤 근신이나 머리채 자르는 것 정도인데, 나는 어떻게든 탈출할 작자이고 머리를 아예 밀어버려도 모자 쓰고 잘만 나다닐 인간이라서.
어찌 되었든, 나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스팀 받고 있는 이 대화중에도 손은 착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두 팔에 힘을 주자 투둑. 툭.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너, 너.”
“후와…….”
의자에서 일어나 툭툭 드레스를 쳤다. 정돈하는 시늉이었다. 공작이 이번에야말로 혈압으로 쓰러지실 것 같았기에, 나는 이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기로 했다.
해서 오른 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드렸다. 이런 날을 위해 주문제작한 물건. 나는 해맑게 설명했다.
“반지 바깥날로 잘랐습니다.”
“……미치겠군. 하다하다 이제 반지에 칼을 박아 다니느냐.”
“사람한테 쓸 때는 사람을 잘 고르겠습니다.”
“그 말이,”
내게는 안타깝게도 연륜이라는 게 발동했다. 공작은 훅 화를 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깊이 호흡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공작은 내 앞에서나 이런 식으로 종종 다혈질처럼 언성을 높이지, 바깥에서는 결코 이러지 않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음흉하게 히죽 웃었다.
공작의 뒤편 모서리에 서 있는 베르덴의 시선이 내내 내게 향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태여 그 시선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 나는 베르덴이 있는 곳에서 펼쳐지는 쥰의 이야기가 이미 민망했다.
음. 아니군. 재사해보면, 나는 어쩌면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끔찍하게 꿈틀거리는 답답함이 화라면.
“도대체 얼마나 제가 엇나가야 쥰에게 희망을 품으시겠습니까? 거듭된 가출로는 부족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는 공작의 얼굴을 이 방에서 보았을 때부터 화가 나있었다.
웃으며 묻자 공작의 차가운 눈에 노기가 들었다. 그의 진정이다.
“저는 깽판을 놓는 것에 그리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데요, 아버지. 옆집 영애 뺨이라도 올려붙이면 좀 생각을 달리 하시겠습니까?”
내가 그대로 나이 들었다면 공작보다 나이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어린 아이부터 시작하였다. 아이가 겪을 수 있는 세상과 어른이 겪을 수 있는 세상은 많이 달라서, 나는 내 영혼이 살아온 세월만큼 어른의 연륜, 노인의 연륜 같은 것을 쌓지는 못했다. 스물다섯 살의 나는, 그래서 아직도 지구에서 죽은 대로 삼십 대였다.
마흔 살의 사람이 갓난아기로 돌아가 다시 마흔 해를 산다고 해도, 그에게 여든 살의 연륜이 쌓이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철 덜 든 어른’ 같은 단어가 있지도 않았겠지.
나의 현재 역시, 첫 삶보다야 좀 더 능숙한, 그런 청년이다.
내게는 젊은 혈기가 있고, 자신감도 있고, 젊은 반발심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세하게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상처도. 적당히 얼버무리고 적당히 없는 척 할 수 있을 정도일 뿐이었다.
나는 에본느의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사랑하지 않는다. 그를 대체로 좋아하지만 아버지로서는 아니었다. 아버지로 군림하고자 한다면 죄책감 없이 대들어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니 나를 후비지 않으면 좋겠다.
쥰을 향한 그의 경멸은 나를 캐는 못정이기도 한데, 공작은 그걸 모른다. 나도 말할 생각이 없으니 이것 역시 악순환이었다.
나는 계속 헤실헤실 웃으며 공작의 혈압을 높였다.
“안살림이 참 잘 꾸려지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 전부 쥰이 꾸려나간 지 퍽 오래 되었는데요. 가출이 일상인 제가 어떻게 살림을 챙기겠습니까?”
“에본느.”
“후계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마음이 상하실텐데 왜 자꾸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대서지 마라.”
“쥰은, 제 동생입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인정치 않으셔도 제 동생입니다. 아버지 아들입니다.”
진실이 어떻든지 간에 아들로 받아들였으면 아들 대우를 하라는 말이다.
그에 싱글벙글 웃는 내 얼굴 한 쪽은 기어이 붉게 물들었다. 짝. 주먹으로 때리는 소리에 가까운 소리가 귀를 울렸다. 나는 엄청난 힘으로 후려쳐진 왼 뺨을 감쌌다. 아, 정말 아프네. 내심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얼굴로는 웃었다. 간만에 맞았다. 아주 간만에.
머리 염색한 직후에 처음으로 맞고, 이번이 두 번째.
공작이 싸늘하게 명령했다.
“근신해라. 네 방의 아래, 방 앞, 모두 병사를 세우겠다. 나갈 생각은 마라.”
“며칠 내로 탈출할지 내기하시겠습니까?”
맞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처럼 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단지 이번에는 공작이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내용의 협박을 하셨다는 게 문제가 되겠다.
“내가 허락하기 전에 방을 나서는 일이 있다면, 네가 그리 아끼는 동생, 어찌 되는지 보고 싶다는 뜻으로 알겠다.”
“…….”
내 숨이 잠시 멈추었다. 그건 본능적인 반응이었기 때문에, 직후 나는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공작을 보는 눈에는 건조하게 힘이 들어갔다.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입 꼬리를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을 때, 참 가까스로 그를 비웃었을 때, 공작은 날 살피고 조소했다.
“네 안위에도 내 안위에도 관심이 없더니, 천것의 안위에는 관심이 있느냐.”
“…….”
“틀렸다.”
“…….”
“네 결심이 무엇이든, 그건 틀렸다.”
답답한 숨이 그제야 서서히 풀리기를 시작했다. 나는 마른 웃음을 거두었다. 어쩌면 패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공작은 승자처럼 뒤돌아 냉정하게 사라졌다.
……당했다. 가만히 문을 바라보다 쓴웃음을 문득 짓고 말았다.
여유를 되찾는 건 쉬웠다. 나는 피휴우 하는 웃음기 어린 한숨을 쉬며, 말리기 위해 길게 풀어 내렸던 머리카락을 맨손으로 마구 헤쳤다. 그리고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공녀가 마땅히 유지해야하는 고상함은 조금 벗어던진 웃음이다.
그래도 베르덴은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낄낄 웃으며 보석함으로 다가가 리본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뒤통수 높은 곳에 머리칼을 하나로 질끈 묶었다. 내 기사는 내가 이만큼 혼란스럽게 화내는 것을 몇 번 보지 못했다. 그가 나와 동등한 친구 사이일 때부터 셈해도 다섯 번 이내다.
대충 머리를 정돈한 나는 내가 잠간 묶였던 의자에 탈싹 앉았다. 웃음은 슬슬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얼마나 재밌어요?”
한낱 활자 따위에 잡혀 사는 인간이라니. 무릎 너머로 보이는 바닥, 베르덴의 다리를 물끄러미 보며 웃다 눈을 감았다. 재미있고말고. 공작. 이 몸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제발,”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제발? 베르덴은, 내가 느끼기에 어디가 아픈 것처럼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이건 또 무슨 반응이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살폈다. 느낌은 여전했다. 입술을 조금 깨물고 미간을 찌푸린 것에서 그치는데도. 내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내가 조금 전에 들었던 것과 다르지 않은, 몹시도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목소리는 쥐어짜는 느낌을 주었다. 표정과 더불어 가관이다. 내가 뭘 했다고? 나는 눈을 깜박였다.
“무얼요?”
“……표정. 눈빛. 생각. 하지 마십시오.”
“와. 이제는 아예 생각 없이 살도록 장려하는 겁니까?”
씩 웃었다.
겨우 농담 하나를 위해 저만치 간절히 연기하는 사람은 베르덴이 아니라 헤르조다. 안다. 베르덴은 농으로 던진 말이 아닐 테고, 그렇기에 나는 예의로라도 전말을 파고들어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덕분에, 분위기를 전환해야할 필요성은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턱을 괴었다. 한 층의 여유가 더 생겨 내 위에 쌓인 것 같았다. 간단한 행동에 의한 변화다. 이 얼마나 편리한가. 내 연약함이 역겹다.
나는 기사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괜히 경에게 화살 돌리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는 않았는데요. 내 가출을 막기는커녕 동행한 것, 안 혼났습니까?”
“…….”
대답해.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 내게 진심 어린 괴로움을 남기지만 마라. 그 마음 가득 담아 내 시선은 똑바르게 쏘아져 들어갔다.
베르덴은 피하지 않고 나를 보다가 찌푸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리고 대답했다.
“혼났습니다.”
좋은 대답이다. 나는 만족했다.
“미안해요. 그냥 나 혼자 갔어야 했는데.”
“그건 아니지요.”
“……그렇게 온몸으로 거부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웬 개소리를 듣는다, 방금 들은 그 말이 진심이냐, 하는 그런 단호함이 있었다. 삐친 척 입을 비죽이다가 턱을 괸 손을 내렸다. 열린 테라스 바깥에서 철컥거리며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나고 있었다. 문 밖도 비슷한 꼴이겠지.
한숨을 삼켰다. 나는 웃는 사람이다. 눈꺼풀을 살짝 내리자 눈이 일순 초점을 잃었다가 돌아왔다.
“하는 수 없네요, 그렇죠? 말씀대로 콕 박혀 있어야겠어.”
정말 하는 수가 없다. 공작 얼굴만 보지 않는다면 근신이라고 아예 견디지 못할 건 아니었다. 나는 파르스름하게 바짝 날이 세워진 반지를 빼서 대충 침대를 향해 던졌다.
그에 베르덴은 기어이 침대로 다가갔다. 그의 걸음새를 말끄러미 보고 있자니, 침대 위로 손을 뻗는 그가 나를 불렀다. “아가씨.”
나는 버릇처럼 미소하며 그 부름에 응했다.
“왜요?”
“아직도 답답하십니까.”
“아, 뭐. 아무래도 내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온 게 아니라, 헤르조 자식 일로 질려서 온 거니까. 조금 더 돌아다니고 싶긴 합니다.”
그 위험한 반지를 집어든 그는 내 보석함 중 하나에 그걸 넣으려 했다. 아니, 아니, 내 치장을 돕는 시녀들 손가락 썰 일 있나. 손을 휙휙 두 번 거칠게 저으며 마다했다.
“그러지 말고 베드 테이블 위에 놔 주세요. 손가락 베일 수도 있으니까.”
“…….”
“그리고 이제 그만 나가서 누구 한 명 불러 주겠습니까? 얼음찜질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알겠,”
베르덴이 대답을 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문이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정갈했다. 이런. 나는 아픈 뺨을 무심코 감쌌다.
“누님.”
문 저편에서 내가 예상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을이 이만큼 저몄으니 퇴근할 시간은 지나고도 남았었다. 나는 베르덴을 보았고, 베르덴도 내 눈길을 느꼈는지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그러냐는 물음인 거지, 저거?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거 보면 어떡해요?”
“들어오지 말라 하시면 될 일입니다.”
“그럼 이상하잖아!”
“누님?”
속닥대던 음성이 나도 모르게 확 올라가서, 쥰이 나를 다시금 불렀다.
아, 이런. 자는 척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렇게 된 이유의 대부분이 쥰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만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잠시 숙고한 뒤, 한숨과 함께 입실을 허락했다. 문은 조급하게 벌컥 열렸다.
“경은 나가서, 제가 부탁한 것 좀.”
“예, 아가씨. ……도련님.”
베르덴은 나가기 전에 쥰을 부르며 인사를 남겼다. 그러나 쥰은 인사를 받아 줄 정신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동생을 향해 빙긋 웃었다. 뺨이 따끔따끔하게 당겼다.
“앉아. 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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