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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꽃 작가님-6화 (6/157)

00006 CHAPTER 1. 재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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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황태자를 만난 그날 밤, 나는 가출했다.

말이 가출이지, 항상 여행이다. 한 달이나 집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좀이 쑤셨다. 벽을 타고 내려가서 땅을 밟자마자 베르덴에게 걸렸다. 이번엔 헤르조와 같이 가기로 사전에 계획했던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 경도 같이 갈 거냐고 친절하게 물었고, 그건 당연한 거니까 권유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쌀쌀맞은 퉁을 맞았다.

이 사람이 감히 모시는 분한테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니냐고, 이런 쌀쌀맞은 매력을 가진 남자 같으니, 하고 히죽 웃었다가, 그대로 방으로 배달될 뻔 했다는 비화가 있기야 있다.

오드리나를 떠난 후 부지런히 말을 달려 황실 직할령도 다 벗어났다. 지금 있는 곳은 황실 직할령의 이웃이라 할 수 있는 랭글루이즈령의 상업도시. 안의 한 여관. 안의 어떤 방. 벌써 사흘을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여행을 온 의미는 이미 달성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집에 있는 것을 못 견디는 것이라서.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들어 방에 들어오는 베르덴을 쳐다보았다. 그는 멀뚱하게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더니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그러십니까.”

“모르는 척을 얼마나 잘 하나 보려고요.”

“예?”

“라이네 저택으로 사람 보내고 온 거, 얼마나 모르는 척 할 수 있는지. 보려고요.”

친절하게 설명해주니 그가 움찔했다. 설마 했더니 역시나. 나는 턱을 괴고 혀를 찼다.

“경의 주인은 나지, 공작 각하가 아니거든요?”

“지금은 봉급이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있어서 말입니다.”

“……제길, 얼마면 돼! 얼마면 네 마음을 살 수 있는 건데!”

분개한 부잣집 딸내미처럼 탕탕 의자 팔걸이를 치며 소리쳤다. 그러자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이던 베르덴은 미간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반응이다.

재미있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는 어차피 오래지 않아 끝날 서임이긴 하지만, 정말이지 베르덴이 내 호위기사가 되지 않길 바랐다.

전과 다르게 셋이 뭉치는 일보다 헤르조와 둘이서만 더 잘 어울리고 다니는 일이 잦게 된 것도, 깊이 따지고 볼 것도 없이 베르덴이 더는 후작가의 후계자가 아니게 되었다는 게 지분이 컸다. 아무래도 헤르조의 마음이 베르덴의 결단을 받아들이기가…….

쓴웃음을 내색치 않고 삼켰다.

나의 수많은 지인들 중에서 단연코 베르덴과 헤르조, 알드리히, 시드니, 션은 특별한 사람들이고,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선 안, 내 평온을 헤치지 않는 전제 안에서 그들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선이 다르다는 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베르덴은 선택을 잘못했다. 정말 잘못했다. 나는 우리 셋이 동등하게 서서 함께 놀러 다니길 바라지, 뒤로 물러나 나를 지키기를 바란 적이 없었는데.

그가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가씨. 마음 수틀린다고 가출을 하는 게 스물다섯 영애가 하실 일입니까?”

엄청 비장한 얼굴이었다.

나는 양 입 꼬리를 올리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야아. 정말 무뚝뚝했던 과거가 떠오른다. 떠오른다. 어렸을 때부터 시드니에 버금가게 무뚝뚝했었는데, 이 사람도. 아, 어렸을 때부터는 아닌가. 본성은 상당히 맵고 다혈질이었지. 그게 어느 순간부터 이리 정리되어 갔다.

어쨌든, 좋아, 슬슬 정리할 때가 되었다. 무릎 위에 펴고 있던 책을 들어 옆의 나무테이블 위에 놓았다. 며칠 전 황태자와의 대화는 내게 상당한 경각심을 준 바 있었다.

나는 먼저 베르덴에게 손짓하여 내 앞 의자에 앉게 했다. 그는 잠시의 망설임 끝에 내 앞에 훌륭하도록 뻣뻣한 자세로 앉았다.

“먼저 맹세해요. 여기서 우리 둘이 한 이야기,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알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어라. 대답이 너무 쉽다. 수상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내 기사를 살피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쥰한테도 안 됩니다.”

“…….”

“……야.”

맹세의 맹점을 파고들겠다는 속셈이었군.

나는 곧바로 시원하게 포기했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있겠나. 협조치 않겠다면 필요 없다. 어차피 내 뜻대로 일을 진행할 테고, 그 과정에서 베르덴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게 될 뿐. 다른 피해는 전혀 없게 될 것이다.

긴장을 풀고 입을 비죽였다.

“꾀만 늘어서.”

“늘지는 않았습니다. 원래부터 있었는데, 아가씨와 포르타 영식의 그늘에 가렸던 것뿐이지요.”

“……그거 나랑 헤르조가 교활하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실 말씀은.”

이 자식이 불리하니까 말을 돌린다. 그의 고요한 눈을 보며 나는 심술궂게 웃었다.

“경 예쁘다고요.”

그러자 베르덴이 주섬주섬 장갑을 벗기 시작했다. 던지려는 것이다! 저건 두고 볼 것도 없이 던지려는 거야! 나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서 사사삭 멀어졌다.

“모시는 사람한테 결투하자고 덤비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이야!”

“슬프게도 이 방은 잠시 예법을 따지지 않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결국 내 얼굴에 장갑이 짝하고 달라붙었다. 소리가 지나치게 차졌다. 우린 그날 저녁, 달밤의 하늘 아래에서 결투했다.

*

결투에서 진 패자는 승자에게 끌려갔다. 인즉슨, 내가 베르덴에게 끌려 라이네 저택으로 귀환했다는 말이다.

이틀 후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장갑으로 맞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 통증은 당연히 내 기분의 문제다. 질 수 밖에 없고, 져도 상관없지만, 끌려가기는 싫어서.

마침 저택에 계시던 공작은 사정을 대충 짐작하신 모양인지 베르덴과 나를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이런 일에 있어서는 나와 베르덴 중 베르덴 쪽을 더 믿고 아끼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깊은 교분을 나누어 온데다, 커오며 워낙에 내가 사고를 많이 친 탓이리. 마음 상할 일은 아니었다.

방에 올라가 씻고, 화장대 앞에 앉자 킴이 머리를 말리고 빗겨주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부드러워 웬일로 잠이 몰려오긴 하는데, 그렇잖아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나는 남이 있을 때는 더더욱 마음껏 잘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손을 들어 내 얼굴 앞을 더듬었다. 눈앞이 피로로 흐렸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손을 좀 더 올려 내 머리 위 허공에 머물고 있는 손목을 잡자, 킴이 손 안에서 파다닥거렸다.

“아, 아가씨?”

“이제 그만.”

힘을 주어 킴의 손을 밀어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아직 축축했다. 옆에 두었던 수건을 더듬자, 킴이 부랴부랴 내 손에 수건을 덮어주었다.

대충 닦고 수건을 넘겨주었다. 열린 테라스 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럭저럭 마를 것이다. 늦은 오후, 노을에 발갛게 물든 산들바람이 몸을 더 늘어지게 하는 느낌이었다. 주무시겠느냐며 침대를 정돈해 주려 하는 킴을 내보내고, 화장대 앞에서 일어났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누울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을 할까. 그러다 눈에 잡힌 것이, 양 옆에서 흰 커튼이 살랑거리고 있는 테라스의 문이었다. 그리고 그 바깥, 먼 하늘의 노을.

테라스로 나아가 난간에 기대어 설 때까지 나는 짧은 감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쁘다.

난간에 기대어 보는 하늘도 넓다.

생각 많게 피로에 잠겨있던 머릿속이 멍하게 풀렸다. 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힘차게 외쳤다.

“좋아, 여행이다!”

“…….”

우드득.

등 뒤에서 목을 꺾으며 스트레칭하는 소리가 났다. 달달달 떨며 이 부딪히는 소리도 나기 시작했다. 음, 아니군. 이 부딪히는 소리는 내 입에서 났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얌전히 의자에 묶여있었다.

이러라 명령하신 범인을 말똥말똥 올려다보다가 멋쩍어하며 웃었다.

“아버지. 농담이었습니다.”

“퍽이나 농담이겠군.”

안 통하네.

“……베르덴경은 도대체 누가 주인이에요? 날 묶네.”

불리해지자 화살을 베르덴에게 돌렸다. 그러나 베르덴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누구의?”

거기에는 공작이 차갑게 대답했다.

“우리 정신의 안전이다.”

……제길.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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