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CHAPTER 1. 재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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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얼마만입니까, 누이. 나 삐칩니다.”
인사하자마자 재빠르게 튀어오는 알드리히를 보면서 나는 진심으로 튀고 싶었다. 후진. 집으로. 그러나 그럴 수 없었고, 결국에는 잡혀서 작약궁으로 질질 끌려왔다. 말 그대로 ‘질질.’ 손목을 잡혀서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으니까.
쥰과 작별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이리 했다면 바로 제지했을 베르덴도 그저 따라오기만 하였다. 황태자라서 제지키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이런 무례한 손길은 얼마든지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호위기사였다. 단지, 알드리히가 자기에게 해가지 않는 선에서 막무가내인 건 나를 호위하는 그도 참 많이 보아서.
나는 나중에는 그저 뒷덜미를 잡고 끌지 않아줘서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아닌데. 내가 알드리히한테 고마워할 것은 이 상황에서 아무 것도 없는데.
그리고 이하 기타 등등의 생각은 생략했다.
황태자의 침실은, 삼 층 복도에서 평범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있는 집무실에서 문을 한 번 더 열어 미니홀에 들어간 뒤, 한 번 더 문을 열어야 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거실과 다름없는 미니홀에 도착하자마자 알드리히는 붉은 천과 금으로 장식된 베르제르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랬다. 나 삐칠 거야.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한숨을 쉬었다.
인사는 아까 멀리서 한 것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의 맞은편 베르제르에 앉았다. 나는 황태자에게 따로 묻지 않고도 그의 앞에 앉을 수 있도록 오래 전에 허락받았다.
편하게 등을 기대고 부루퉁하게 투덜거렸다.
“누이라 하지 마세요. 좀. 제발.”
그러자 알드리히가 씩 웃었다.
“심장이 막 쿵쾅거립니까? 들킬까봐?”
“이미 다 들켰습니다. 무얼 새삼.”
나보다 생월이 일 개월 빠른 그는 툭하면 나를 누이라 부르지만, 그 일 개월을 뺀 나머지 십일 개월간의 우리는 동갑이다. 올해의 내 생일도 지났으니 오늘의 우리도 동갑이 맞다. 황태자에게서 누이라 듣는 건 예법 상 옳지도 않지만, 나이 계산상으로도 안 맞는다고. 그저 담백하게 여형제를 부르는 게 아니라 누이동생이란 뜻으로 누이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진심으로 불만스럽지도 않고, 장난이랍시고 불만을 표현하면 이 미친놈이 재미있다고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마저 누이라 부르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편이 나았다.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소식도 없으라 했습니까? 또 어디 아파서 요양 다녀왔다면서요. 가출이 요양으로 알아서 잘 포장되니 참 좋겠습니다, 그래.”
찔린다.
왼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상처 받은 표정을 해 보이자, 알드리히가 몸을 옆으로 기울여 주먹에 턱을 기댔다. 저 자비로운 표정은 어디 더 해보라는 뜻이다. 했다간 무슨 약점을 잡힐지 모르니 가만히 있기로 했다.
알드리히는 내 얌전한 반응이 불만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재미없게.”
“저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응? 다른 놈들은 몰라도 누이는 당연히 장난감이 아니지요.”
“장난감 취급하면서 장난감이 아니라 하시니, 감읍합니다.”
두 뺨을 감싸고 과장스럽게 말하자 알드리히가 비로소 키득거렸다.
그는 성격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일단, 머리가 좋은 편이다. 그리고 성격이 나쁘다. 진짜 더럽게 나쁘다. 일상을 유희처럼 생각하는데,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도 그런 감정이 묻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의도했다고는 하지만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사람들을 체스 말 같은 장난감으로 여기며 이리저리 상황을 만들어 던져주고 사람들이 허우적대는 것을 보며 비웃는다.
내가 썼지만 반쯤은 머리 좋고 성격 나쁜 미친놈이 맞다. 떠오르는 대로 설정할 때, 얘 냉혹한 미친놈, 냉혹한 정치가라고 결론을 내리고 시작했으니까.
사람에게 정을 주는 일도 없어서, 쓰면 쓸수록 이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비슷한 인물이 아닌가 할 지경이었지만 나름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수정하지는 않았었다.
……어디까지나 나와 상관없는 글 속 인물일 때나 매력적인 거였지.
눈물 날 것 같다.
화장한 눈가를 검지로 슥 거두었다. 그걸 또 놓치지 않은 알드리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눈 아파요?”
“아닙니다. 그보다, 왜 부르셨어요?”
너 때문에 울고 싶다고 말할 수 없으니 얼렁뚱땅 넘어가야 할 주제였다. 나는 말을 돌렸다. 알드리히는 내가 말을 돌렸음을 알 텐데도 의뭉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냥요. 우리 못 본지 오래 됐잖습니까.”
“……아, 좀.”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우리 나이가 있어 전처럼 제집 드나들 듯 서로 들락날락 할 수 없다고 말한 지 십 년 정도가 되어간다. 그런데 아직도 안 지켜지고 있는 것이 함정. 나는 멀어질 준비가 만반인데, 이 자식이 계속 날 부르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하다못해 알드리히라도 결혼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라서, 결국 미혼 남녀가 자주 만나는 상황으로 비춰지기 밖에 더 되겠는가. 나는 잠시라도 황태자의 신붓감 후보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비참한 악녀가 되는 지름길이니까.
이 사람이 남주인공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히히 낄낄 거리고는 있지만, 솔직히 나의 스물다섯 살부터 스물일곱 살까지는 되도록 안 만났으면 좋겠다.
해서, 앞으로 또 부르면 앞뒤 재지 않고 튈 생각이었다. 몇 년 예정으로. 참고로, 그 ‘튄다’는 건 가출을 말한다.
알드리히는 내 반응을 보고 재미있어하며 방긋 웃었다.
“그네들이 뭐라 수군거린다고 마음 아파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누이는.”
아, 물론, 그렇게 튀면 내게 여태 주어져왔던 것 중 많은 것이 끝장날 것이다. 나는 내 선택에 따라 그렇게 찾아올 미래를 알고 있었다.
공작은 내게 끝끝내 가문을 물려줄 생각인 것 같지만 나는 누차 거부하고 거부해왔다. 공작이 되면 좋겠지. 명예가 생기니까. 황제와 황태자를 제외하면 이 나라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다. 부여잡는 명예와 권력은 엄청날 것이다. 내가 오래 전에 바랐던 바가 눈앞에 있는 것인데도, 나는 고심 끝에 거부해왔다.
공녀 정도면 충분히 명예와 부를 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 개인적으로도 이미 충분한 부를 쌓아놓았고. 바랐지만 간절하지는 않았던 야심은 이만하면 충분하게 이루었다.
굳이 내 시간을 들이고 내 정신을 희생할 만큼 공작의 자리가 가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리더의 자리에는 책임이 따르며, 나는 그 책임을 지는 일이 재밌게 느껴지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부터 그랬다.
표면적인 이복동생이라 해도 동생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마음은 아파합니다, 전하.”
“왜요.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생겼습니까?”
“생겼으면요.”
“누군데요?”
저 눈 빛나는 것 봐. 한껏 늘어져있던 자세도 갑자기 확 바뀌었다. 내게 상대자가 생기면 잡아먹겠다, 아주. 나는 혀를 차곤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역시 그렇지요? 당연히 없어야지. 누이에게 내가 모르는 남자가 생기면 나 삐칠 겁니다.”
“…….”
……방금 한 말에서 태클 걸 곳이 몇 군데 있지만 걸지 않기로 했다. 다만, 황태자만 아니면 한 대 때렸을 지도 모른다는 점. 기억하겠다. 넌 내게 모욕을 줬어. 왜 당연히 없는데.
혼자 내심 으르렁거리고 있자니 시계를 본 그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쉴 수 있는 시간도 끝입니다.”
“그렇습니까?”
“너무 좋아하네요, 누이. 두 시간만 기다려 준다면, 그 이후에는 넉넉히 놀 수 있는데. 기다리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일이 있어서요.”
“퍽이나 있겠습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지만 나를 더 잡지는 않았다. 알드리히가 먼저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위함이다. 나도 태연하게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고여 있던 꽃향기가 와르르 떨어졌다.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라고 문 바깥에 있을 시종에게 명하기 직전, 그의 손 위에 있는 내 손에 힘을 주었다. 황태자가 나를 보았다.
나는 알드리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내 앞에서는 대체로 싱글싱글 웃고 있지만, 그 외의 시간, 특히 홀로 있는 시간에 주로 짓고 있는 표정이 무표정인 것을 안다. 내 성격 나쁜 친구가 짓는 이 무감정한 표정은, 솔직히 말해 무서웠다. 그 두려움은 이 사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 사람이 내게 마음 상했을까 드는 무서움이고.
……활자로 만들어낸 사람들에게마저 공포를 느끼는 건 종종 날 참담하게 만든다. 이곳은 환상세계인데.
차라리 이곳에 계속 남아있을 거라 하는 확신이 있었다면, 마음 놓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힘을 내서 입 꼬리를 조금 올렸다.
“이건 진지하게, 정말 진지하게 올리는 부탁입니다, 전하.”
“…….”
“앞으로는 절 부르지 말아 주세요.”
알드리히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가 돌아왔다.
“꼭 불러야 하신다면 제가 스물여덟 살이 되는 날부터. 말씀 드리지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싫은데요.”
“전하께서 다시 부르신다면 저는 오드리나를 잠시 떠나려 합니다. 스물여덟 된 후에 돌아올 거고요.”
“그렇습니까?”
전달이, 잘 되었나.
황태자는 비뚤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미리 말하겠습니다. 누이, 나는 당신을 부를 거고, 혹시 당신이 떠나려 하거나 떠난다면 반드시 다시 잡아 올릴 겁니다.”
역시나 안 됐구먼.
나는 심각한 척 그를 불렀다.
“전하.”
“굳이 떠나고 싶다면 내게 그 사정을 말해 보든지요. 그럼 참작해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한 게 있다면 나는 누이가 내게서 일정 거리, 일정 시간 이상 멀어지게는 않을 겁니다.”
“저는 잡히지 않을 겁니다.”
“무슨 자신감으로 말하는지는 알겠는데요, 누이. 말했지 않습니까. 나는, 잡아 올릴 거라고.”
야, 인마.
내가 마침내 눈을 찡그리자, 알드리히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둘 다, 아니, 적어도 나는, 이 대화가 얼마나 살벌한 대화였는지 두렷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나를 잡을 것이다.
기왕에 살벌한 대화를 하였으니, 어찌하여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를 불렀는지 이유도 물을까 고민하다가, 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복도로 나와 베르덴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걱정스럽게 흐려지는 걸 보며 나는 씩 웃었다.
그때 알드리히가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도망치면 잡으러 갈 겁니다, 진짜? 술래잡기 싫어하죠? 누이 없으면 심심하단 말이야.”
역시 이 자식, 아니라아니라 하지만, 나를 심심풀이 땅콩으로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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