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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꽃 작가님-4화 (4/157)

00004 CHAPTER 1. 재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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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꽉 묶은 머리의 끝을 앞으로 잡아당겨 빙빙 꼬았다. 비교적 부드럽게 나가는 마차지만 덜컹거리는 건 여전하다.

쥰에게 서류를 가져다줘야 하는 심부름이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기분이 그럭저럭 보통이었을 것을.

물론 죄송하다고, 저는 먹느라 몹시 바쁘다고 거부했지만 이번만은 통하지 않았다. 공작의 눈빛으로 살해당하는 줄 알았다.

쥰이 기사단에 들어간 후 한 번도 그 아이의 근무처에 찾아간 적이 없는데 오늘로 그 기록이 끝나게 생겼다. 그나마 오늘 격렬하게 거절함으로써 공작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던 건, 나도 기분을 환기시킬 필요를 느낀 덕분이다.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제나 저제나 타이밍만 재고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머리가 약간 몽롱해졌다.

“…….”

어릴 때 한 계산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나 스물다섯 살에 시작될 거라 하는 그 계산. 그리고 오늘의 나는 스물다섯이 되고도 몇 달이 지나 있는 사람. 그 말은 이미 글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실성한 듯 웃었다.

“흐흣.”

그리고 그것은 내가 죽을 지도 모를 날이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다는 말과 같다.

순식간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기분 묘한 나른함이 어딘가로 도망가 버렸다. 다른 일상적인 생각으로 돌아가고자, 나는 습관이 된 웃음을 헤실헤실 지었다. 어디보자, 일상적인 생각. 웃긴 생각.

나는 웬만하면 글이 내가 쓴 대로 진행되길 바라지만, 그런 소망을 위해 나를 지나치게 가둬둘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악녀가 될 생각이 정말, 정말 없다.

이 환상 세계에서마저 자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창밖을 멍하게 보던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쓴웃음을 지었다.

곧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서류 봉투를 챙기고 기사의 손을 잡고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내렸다. 어제 저녁까지 비가 온 것 치고 벌써 땅도 거의 말라 있는 것 같고, 해도 어여쁘게 내리고 있었다. 외출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그럼에도 여기부터 쥰이 근무하는 곳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쥰은 만나러 간 적이 없지만 친구님을 뵙기 위해서는 자주 드나들었기에 지리는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방법은 하나다.

“나 좀 업어줄래요?”

“걸어가십시오.”

우울하게 베르덴에게 물었으나, 답은 가차 없었다. 나는 항의했다.

“운동부족이라고요, 나.”

“평소 활동량을 보면 절대 아닙니다.”

빌어먹을 놈. 나는 발을 동동거리다가 격하게 발쪽을 가리켰다.

“구두! 나 구두 신었는데! 오래 못 걷는데!”

“구두 신고 실수로 날리신 옆차기를 저는 아직도 잊지 못했습니다.”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길이야 잘 닦여 있으니 발은 좀 아파도 걸어갈 수는 있다. 좋아, 해 보지. 베르덴을 슬며시 째려보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내 발이 부으면 경 탓입니다.”

“그것 참 슬픈 일입니다.”

“슬픈 척이라도 좀 해 봐요, 그럼.”

“……세 번 정도 넘어지시면 업어 드리겠습니다.”

물론 내 한 몸 던져서 그 이후가 편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여긴 황궁. 이 멋진 청년은 내가 황궁 안에서 절대 고의로는 넘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말한 게 틀림없다. 날 너무 잘 알아.

친구가 아니어야 했어.

“너무해.”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기자니 뒤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홱 하고 돌아보고 노려봤는데, 베르덴은 왜 그러냐는 것처럼 웃음을 싹 지우고 날 보았다. ……왜 우리 가문 기사들은 날이 갈수록 얌체처럼 변해가는 거지.

베르덴이 천연덕스럽게 나를 종용했다.

“도련님께서 꽤나 기다리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한숨을 쉬고 다시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냥 한 가지만 알아둬요.”

“…….”

“경, 전에 한동안 진짜 무뚝뚝했던 사람이었던 거.”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도 입을 다물었다.

그 수상한 침묵 속에서 이러저러하게 걷다보니 쥰의 근무지가 나오긴 나오더라.

손부채질을 하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지친다, 지쳐…….”

“도련님께 물이라도 부탁할 수 있을 겁니다.”

“예에, 예에…….”

그게 말이 쉽지. 저 수많은 기사들 중에서 쥰 한 명만 딱 뽑아내기는 몹시 어려울 것 같은데. 나는 인상을 썼다.

“쥰 좀 찾아봐요.”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 경은 보여요?”

“안 보입니다.”

결국 쥰이 먼저 이쪽을 찾는 수밖에 없는 건가. 기사들 사이로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눈길이 잠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시드니를 지나쳤으나, 나는 다시 기사들을 보다 입을 열었다.

“경이 저기 어떻게든 들어가서 쥰 좀 찾아보면 안 돼요?”

“그 사이 도망가실 어떤 분 때문에, 안 됩니다.”

“…….”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쓸데없는 데서 거짓말을 남발하고 싶지는 않은 탓에, 거짓으로 약속하고 싶지도 않다. 힘없이 오른 손을 들어 설레설레 휘젓고 쥰을 찾았다. 백 명 정도일까. 황궁을 수호하고 있는 ‘병사’는 아무도 없으니, 아마 총 기사들 중 오분의 일 정도 될 거라 생각한다. 글을 쓸 때 기사 수 같은 건 구체적으로 생각 안 한 내 잘못이다.

아, 저기 있다, 쥰.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표정관리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이 인간이 진짜.

“……뒤에선 안 보이잖아요!”

“안 봐도 대충 예상이 갑니다.”

가문의 명예?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는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내가 지키고 싶기 때문에 지키는 것뿐.

나는 뒤로 돌아서 구두코로 그의 발을 밟아서 문질렀다. 그리고 저주했다.

“죽어라.”

“보통 구두는 그런 용도가, 윽.”

“아, 차는 용도지. 밟는 게 아니라.”

“…….”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경고하자 그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옳지. 얼마든지 정강이를 깔 수 있다는 경고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의 발등에서 구두를 치웠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린 탓이었다. 나는 불퉁한 시선으로 베르덴을 마지막으로 노려보고, 표정을 정돈했다. 베르덴은 아마 아직도 반성하지 못해서, 내 표정 변화에 그리 좋은 표정은 지어주지 않았다.

해서 이따 다시 응징하기로 했다.

“누님.”

“쥰.”

나는 쥰을 향해 최대한 우아한 미소를 짓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쥰의 표정은 이미 오묘했다. 봤군.

쥰은 웃는 듯 아닌 듯 애매하게 말했다.

“두 분은 여전히 친하시네요.”

“그렇게 보여? 기쁘네. 호위기사이기 이전에 내 오랜 친구잖니.”

가신 가문의 영식이 호위기사가 되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나 베르덴은 라이네의 가신 가문이 아닌 대귀족 가문의 영식인데다, 그의 가문 중에서도 직계 첫째였던지라 당연히 승작할 줄 알았다. 하여 후의 작위를 마다하고 내 기사가 된다고 했을 때 너 미쳤냐고 나도 묻고, 우리의 다른 친구인 헤르조도 물었었다. 진심으로. 정중하게. 그러자 날아온 건 백과사전에 버금가는 두께의 책이었지만.

호위하겠다는 영애의 머리에 책을 날리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이냐고 꽥 소리치자, 함께 도망 다니던 헤르조는 우리 에브 잘 한다고 옆에서 박수를 짝짝 쳤다. 그래서 내가 나 대신 이 자식을 족치라고 베르덴을 향해 밀어주었고 헤르조는 죽었지.

나는 그때 생각이 나자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쥰이 의아해하며 나를 불렀다.

“누님?”

“아, 아무 것도 아니란다. 경이 내 호위기사가 되기 직전에 경에게 맞고 세상을 뜬 이가 떠올라서.”

“…….”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지만, 포르타 영식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 안 죽었나?”

“…….”

쥰을 보며 맹하게 반문하자 베르덴이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그 세상을 뜬 사람이 헤르조라고 말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용케 알아 맞혔다.

나는 그 용한 짐작에 감탄했다.

말없이 듣고 있던 쥰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베르덴에게 감탄하고 있던 나도 그런 청년을 보며 빙긋 미소했다. 그의 웃음은 듣기가 좋다.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듣기가 좋았다. 고요한 연못에 비가 내리는 것 같은, 쥰의 음성은 공기를 살며시 톡톡 건드리는 느낌을 품고 있어서.

역시 역하렘에 걸리는 서브남답다고 해야 하나.

평소에 잊고 지내던 설정들이, 오늘따라 콩나물처럼 자라났다. 마차에서 한 상념 때문이리. 그러나 내가 시답잖은 생각에 빠지려던 차에 쥰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여전하십니다. 요즘에 같이 계시는 모습을 통 보지 못해서 그러려니 하고 있었거든요.”

“음. 그런가? 아, 정말 그렇다. 한 달 전에 돌아와서, 기사들 따돌리고 나 혼자 빠져나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했지. 얼굴 보기야 매일 보긴 했는데 호위기사의 존재의의가 빛나지 않은 지난 한 달.”

“……어, 음.”

“하. 새삼 반갑네요, 경. 지금은 움직이기 귀찮고, 이따가 악수 한 번 합시다.”

납득했다. 어쩐지 그저께 연무장에 있던 베르덴을 엄청 놀리고 싶더라고. 두세 달이 아니라 반년에서 일 년까지도 예사롭게 못 만나고 지내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별 자각이 없었다.

이어지는 등 뒤의 침묵이 섬뜩하긴 했지만, 쥰의 얼굴을 보며 이겨냈다.

그리고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그에게 봉투를 넘겼다. 쥰이 얼떨떨해하며 받아들었다.

“이것 때문에 왔어. 아버지 심부름.”

“아…….”

그런데 반응이 묘했다.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신음 같은데. 나는 곧 표정을 고쳐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쥰을 보며 눈을 움찔 가늘게 떴다 얼른 바로 했다. 무언가 있는 것 같으니, 그렇다면 알아챘다는 기색을 보이는 건 미련한 짓이다.

그리고 여기서 두 번째로 미련한 짓이 직구로 물어보는 것.

나는 미련하다. 그래서 직구로 던졌다. 이 좋은 날, 머리 쓰기 귀찮다.

“이거 네가 놓고 간 게 아니구나.”

“음…….”

“아버지가 왜 이러셨는지 짚이는 구석도 있고.”

거짓말에 원체 서툰 아이인지라 바로 드러났다. 아니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며 곤란해 하고 있는 쥰에, 나는 폭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아이가 멋쩍어 하며 설명했다.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행차해 계시는데, 그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

아, 이런.

“싫으시다면 뵙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누님께서 우선이시니까.”

“그 말은 고맙지만…….”

왜 보지 못했을까. 저기 기립해 있는 긴 행렬을.

아주 멀리 있지만, 손에 턱을 괸 그가 이쪽을 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공작이 부탁을 받으셨던 건가.

황태자와 만나지 않은 지도, 어디 보자. 거의 세 달쯤 된 것 같다.

그는 정말 참지 못할 반전미가 있어서, 내 지인들 중에서는 기피 대상 상위권에 올라 있는 놈이다. 친구랍시고 쟤랑 나랑 마음 맞는 구석이 있다는 게 제일 비참한데, 그게 또 웃겨. 나는 일단 쥰의 옆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와 먼 인사를 보냈다.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른 걸까.

부르면 올 텐데 이런 일을 꾸민 이유는 또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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