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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꽃 작가님-3화 (3/157)

00003 CHAPTER 1. 재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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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갑작스러운 목소리였다.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들었다. 몇 번 노크를 했었던 모양인지, 쥰이 문을 조금 열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씩 웃고 그에게 입실을 허락했다.

“들어와.”

쥰은 머뭇거리다가도 결국 들어왔다.

나이로 보면 다 큰 누이의 방에 들어오는 것을 조심스러워 해야 하긴 하지만, 우리 사이에서 그런 것은 생뚱맞은 예의에 가깝다.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나지 못한 날에는 쥰은 내 방에 찾아와서라도 반드시 내 얼굴을 보고 하루를 마쳤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특한 아이다. 너그럽게 그를 보고 있자니, 쥰이 우물우물 사과를 해왔다.

“죄송합니다. 답이 없으셔서 걱정이 돼서…….”

“아냐, 괜찮아.”

정말 괜찮다.

드문드문 젖어있는 머리칼 끝이 있는 걸 보아하니 이미 씻은 모양이다. 이제 도착했냐고 묻는 건 의미 없겠지. 해서 다른 것을 물었다.

“식사는 했어?”

“예. 누님께서 이미 식사를 하셨다고 들어서 바로 했습니다. 아버지께선 내일 아침에나 들어오실 것 같고요.”

“그렇구나.”

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훤칠하게 큰 쥰을 보면 대체로 흐뭇했다.

그러나 긴 대화를 나누기에 지금 시각은 적절치 않다. 시계를 힐끔 확인한 나는 약간 찌푸린 눈웃음을 지었다.

“늦었네.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

“누님께선 어디 미령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응? 갑자기 왜?”

“그…….”

아.

아, 그렇군.

아마 집사에게서 들었으리. 말을 꺼내기를 망설이는 쥰의 팔을 살짝 두드렸다. 말 하나하나 예쁘게 하려 하는 노력 자체가 예쁘다.

하여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도닥였다.

“괜찮아. 바로 몸을 따뜻하게 해서 감기에 걸리지도 않을 테고.”

바로 밝아지는 얼굴을 보니 웃음이 더 커졌다. 실제 나이로 셈하면 쥰은 이십 대에 들어섰다. 이 나이가 되고도 이렇게 알뜰살뜰하게 누님이라 부르며 챙기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기특함이 현 시각을 달라지게 해 주지는 않는다.

잠시 쥰의 얼굴을 살폈지만 다른 용건이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아서, 이만 밤 인사를 전했다.

“좋은 꿈 꿔.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길 바랄게.”

그리고 기다리는데, 어째 가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용건?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깔끔했던 것 같은데.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 본 쥰의 얼굴에는 채 감추지 못한 실망과 그에 따른 당황이 어려 있었다. 나는 낮게 웃었다. 소설이면 계속 읽겠는데 교양서라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이번엔 책을 완전히 덮고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앉아.”

망설이더니 곧 앉는다.

그에 나는 짓고 있던 웃음을 조금 다른 의미로 짓고 말았다.

움직이고 감정표현을 해내는 것 자체가 새삼 신기하다는 마음 탓이다. 겨우 수 시간 전 나는 사람의 죽음을 보고 왔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는 글을 이끌어 갈 인물이다. 저기 밖의 내가 모르는 사람들은 그럭저럭 나와 같은 인간으로 여겨지는데, 쥰은, 내 친애하는 친구들은, 참, 가끔.

새삼.

참 새삼.

나는 입 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로 푹 한숨을 쉬었다. 이십 년이 되어 가는데도 아직까지 종종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지. 내가 살기 위하여 경계하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순간, 마음이 조금 써졌기 때문에, 나는 매끄럽게 묻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

역시 어색했나.

쥰이 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다문 입 꼬리만 올려 웃음을 만들었다.

그러자 잠시 후, 쥰은 느리게, 더듬더듬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저……, 오랜 만에 누님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세계에 와서 좋은 점은 몇 개 되지 않지만 단연코 쥰의 존재는 그 리스트 상위권에 들어간다. 쥰이 나중에 나를 배신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아, 귀여워라. 나는 씩 웃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 거지, 그럼?”

“아무 일도 없습니다. 걱정……, 하지 마세요.”

저런.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걱정하는 것처럼 안 보인다는 건지, 내 얼굴에 걱정이 다 드러난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걱정이란 단어에서 한 번 머뭇거리면 내 상태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굳이 짚어 문제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말을 돌렸다.

“오늘 훈련은 어땠어?”

“……즐거웠습니다.”

“그렇구나.”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것 치고는 대답이 단답형이라서, 평소의 쥰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얘가 지금 시비 거는 건가 싶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이렇게도 잘만 이어갔다만, 지금 문제는 오늘은 대화를 이어가기에는 내가 조금 피곤하다는 것이다.

맞춰주기가 솔직히 어렵다. 그의 감정을 하나하나 신경 쓰고 스트레스 받는 정도는 이제 아니지만, 날 죽일 지도 모르는 사람이 앞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느 순간 새삼스럽게 힘들어지고 만다. 나쁜 버릇인데 좀처럼 고쳐지지를 않아.

나는 웃으며 크게 한숨지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급한 일이 없다면 우리 다음에 이야기하자. 조금 지치네.”

“죄,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내가 오히려 미안해.”

안절부절 못하는 쥰이 일어서기 전에 손을 뻗었다.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가만히 받아들이는 걸 보니 귀엽고, 고맙다. 눈을 감았다가 뜨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가서 쉬어.”

“예, 누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긴 했지만 공작이 오기 전까지는 깨어 있을 예정이다. 어차피 잠에 드는 게 어려워 잠을 참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

쥰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이미 어두컴컴해진 밖, 저 멀리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빛. 예쁘다.

오늘도 멋진 밤이 왔다.

그러나 나는 수도 안이 아니라, 지금의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도 밖을 떠올리다가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나가고 싶다아…….”

셈해보니, 가출했다가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여행가고 싶다. 위험하지만.

제국을 포함하여 모든 국가들의 수도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보호받으니 항상 평온하지만 그 밖의 지역들은 아니었다. 수도로 세운 땅, 그 지역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도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천도를 한다 하더라도 보호는 새 수도로 옮겨갈 수 있다.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곧 토벌을 나갈 때가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어떤 곳에는 벌써 괴물들이 바글바글할 것이다. 마법사는 있으되 강력한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괴물들을 상대할 때 아무래도 아쉬운 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

……나는 딱히 이렇게 몸으로 겪으려고 그런 설정을 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허리를 구부려 난간에 기대었다. 이야, 정말이지 가끔은 온 몸으로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다.

지면 위 내가 그리는 세상이랑, 내가 실제 겪는 세상이, 느낌이 설마 같겠는가. 내가 이렇게 들어올 줄 알았다면 아주 평화롭게 만들었을 거야. 옆에서 삼각관계가 되든, 사각관계가 되든, 팔각관계가 되든, 역하렘을 차리든, 하렘을 차리든, 개가 짖든, 평화롭게 살다 떠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나 이미 늦은 후회다.

“음…….”

나는 길게 푼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었다.

물론 지금이 평화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내 주위는 내가 알아서 찾아다니는 것들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평화롭고 한가롭게 변할 수 있다. 다만 나는 아슬아슬한 역하렘 로맨스 같은 거 보면서 여유롭게 노는 건 딱히 취향이 아닐뿐더러, 자칫하면 내가 엿 먹을 확률이 몹시도 높아서, 먼저 바깥으로 나도는 것뿐이다.

주인공들의 사랑을 보다 맞이할 지도 모를 죽음이 몹시도 두렵기에.

“…….”

하여 오늘, 이 밤처럼 가끔 감상에 잠길 때면 생각하고 만다.

과연 여기에 계속 머물 수 있을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돌아갈지 잔류할지의 선택권이 혹 내게 주어진다면, 물론 그런 것이 주어질 확률은 지독하게 낮지만, 나는 정말 남고 싶은 걸까.

아직도 이곳을 잠시 거쳐지나가는 환상 세계처럼 느끼다 보니, 지구에서 받던 스트레스보다야 훨씬 덜 받고 있다. 무얼 당해도, ‘나는 인간, 너희는 결국 2차원의 글씨니까.’하며 자비롭게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마저 있었다.

물론 머리에 스팀 받고도 내색하지 않을 정도로 멘탈을 다듬었다고 해서, 스팀을 아예 안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어그로를 끄는 수많은 아가씨들을 보며 하는 생각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아니라, ‘너를 산처럼 아름다운 청정구역이 되도록 (주먹으로) 다듬어주고 싶으며 너를 물처럼 흘려보내 세상 끝에 버리고 싶다’에 가까웠다.

전에 비해 성질머리가 더 더러워졌으면 더러워졌지, 좋아지지는 않았다.

최대한 지구에서의 나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변화라는 건 나도 모르는 새 찾아오는 것이더라…….

“아.”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화장을 지운 얼굴을 콱콱 문지르다 볼을 짝 때렸다. 희미하게 다가닥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공작이 돌아온 모양이다. 지금이라면 쥰도 아직 자지 않고 있을 테니 마중을 나오겠지…….

사이좋지 않은 두 부자를 떠올리다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방을 가로질러 베드 테이블에 다가가 그 서랍을 열었다. 유리 약병을 털어 꺼낸 세 알의 수면제를 잠시 내려다보다 입에 넣었다. 이어, 이번엔 티 테이블로 가서 독서 중에 마셨던 차를 마셔 약을 삼, 켰다. 공작을 뵙고 다시 올라오면 바로 침대에 누워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수도 오드리나의 밤의 실상은 멀리서 감상할 때처럼 마냥 아름답지는 않고, 내 일상도 그러했다.

수면제 없이는 깊은 잠에 들 수 없게 된지 오래인 것은 그 까닭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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