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CHAPTER 1. 재시작 =========================
CHAPTER 1.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하늘의 하늘은, 지독한 어두움으로 낮을 가리고 있었다. 완전히 적셔진 후드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기사 한 명 없이 조용히 빠져나왔다지만, 이렇게 시간이 늦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쥰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을 텐데.
이제 이 문만 열고 들어가면 넓고 따뜻한 집안에 들어갈 수 있으나, 오늘따라 영 마뜩찮다. 조금 더 밖을 돌아다니다 올까. 공작도 오늘은 늦게 돌아온다고 했었고.
나는 거기까지 생각한 후 비식 웃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이미 정신적으로 몹시도 곤했다. 오늘은 이만 쉬어야 내일도 정상적으로 돌아다닐 수 있으리.
깊은 한숨을 흘리고 뒤로 돌아 문을 밀었다.
“세상에. 아가씨. 맙소사.”
대기하고 있는 건 집사와 베르덴이었다.
집사는 그렇다 쳐도 베르덴. 표정 끝내준다. 푹 젖은 머리를 조금 매만졌지만 소용없는 것 같았다. 조용하게 감탄하는 집사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쥰은? 아버지는?”
“두 분 다 오늘 늦게 들어오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대는 왜 여기에 있고?”
“찾으러 나가야 하나 했습니다.”
“그거 참.”
“일단 감기 드시기 전에 그 망토부터…….”
“아니, 됐어.”
지금 망토 안이 꽤 엉망인 것을 생각하면, 망토를 벗는다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걸음을 옮기자 따라 오려하는 집사에게 손을 휘이 저었다.
“가서 그대 할 일 해.”
“그럼, 킴을 올려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래주게.”
흙탕물에 더럽게 되어 버린 치마 밑자락을 보고 한숨을 삼켰다. 베르덴은 함께 한 시간이 집사와는 다른 의미로 워낙 길어서, 내가 지금 그를 원치 않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유심히 나를 살피는 그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주고 몸을 돌렸다.
먼저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욕실 앞에 조금 서 있자니, 이제 욕지기를 참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몸이 늘어지는 기분이다. 망토를 여민 브로치를 꽉 잡았다가 풀어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목욕 시중을 위해 인사하는 세 명의 시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모두 잠시 밖으로 물렸다. 이건 아무에게도 보여줄 것도 아니다. 망토를 풀었다. 망토 안에 남아있던 욱신거리는 냄새가 한 번에 훅 끼쳐오자 하마터면 그대로 토할 뻔 했다.
비 냄새에 섞인 피 냄새는 언제나와 같이 불쾌했다.
“…….”
축축 늘어지는 피곤한 몸으로, 손수 드레스를 벗었다. 그리고 속옷도 벗어서 이리저리 살폈다. 속옷에 묻은 피는 다행히도 아주 소량이더라. 살에는 하나도 묻지 않았고.
나는 속옷만 바닥에 던져놓고 드레스와 망토는 없앴다. 이제 끝났나. 주변을 휘이 둘러보고, 욕실에 들어가며 소리를 높였다.
“들어와!”
시녀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대충 물을 끼얹고 탕에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가씨.”
다가오는 시녀들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들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씻기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에 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떠한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최선은,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이곳 수도에서만 셈하였을 때, 내 앞에서 살해당한 사람이 벌써 열 명이 다 되어 간다. 구제할 수 없었다. 살릴 수가 없었어. 오늘 죽은 사람은 살을 한 점 한 점 저미는 고문 끝에 고통스럽게 피를 토했었다. 그걸 보는 내내 속상했고, 슬펐지만, 울음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살리려고 했으나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힘이 충분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미로골목.
일그러지는 표정을 가다듬어 입 꼬리를 샐쭉 올렸다.
사람이 죽는 것에 쉬이 익숙해진 것은 아무래도 내 안의 잔혹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나만 편하면 된다. 살고 싶을 때까지 살고, 죽고 싶을 때 죽을 것이다. 그대로만 되면 된다. 혹은, 이러다 ‘전의 세계’로 돌아가겠지.
훈김에 휘말려 몽롱해진 머릿속을 더듬는 중, 킴이 조용히 물었다.
“라벤더로 하시겠습니까?”
“아니, 레몬.”
평소처럼 꽃으로 했다가는 속이 뒤집힐 것 같다. 눈을 뜨고 욕조에 떨어지는 레몬수를 지켜보다 다시 눈꺼풀을 내렸다.
*
지구에서의 나는 평범했다.
자존심은 강했고, 어쩌면 자존감도 강했다. 아니, 아니다. 자존감의 경우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고 생각한다. 명예를 드높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기를 바라는 야욕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화하기에 나는 욕심의 크기가 부족했고, 끈기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그런 것들이 간절하지가 않았다.
내가 내 시간을 온전히 투자하기를 마다않는 건 다른 분야였다.
나는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며칠은 굶어도 좋았고,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과 악기를 공부하는 것도 독서에 버금가게 좋아했다. 사색에 잠기는 것도 좋았다.
나이가 들어 생계를 위해 번역을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외국어 자체가 아니라 ‘공부’와 ‘발전’이었음을 머지않아 깨달은 바 있었다. 그러나 말했듯, 생계를 위해서 나는 번역 일을 이어갔다. 그러다 큰맘 먹고 외국으로 나와 살기 시작했고.
이상한 일이었다. 일감의 양은 거의 그대로인데, 외국에 나오니 어째서인지 마음에 여유가 생기더라. 서양의 건물들을 보면 이유도 모르게 입맛이 쓴데, 그럼에도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번역도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일을 했으니 돈은 여전히 들어오는데 내가 내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좋은 일이었다.
들뜬 고민 끝에 나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내 환상과 상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글은 가볍게 쓱쓱 써졌다. 얇은 노트가 열권이 넘고, 스무 권에 달해가도록 내 즐거운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즐거움’은 참 답이 없던 그런 게 아니었나, 하는 회한이 든다. 그, 혹시, 과거의 나를 때려주고 싶다는, 말려주고 싶다는 그런 느낌 아는가.
그도 그럴 것이, 소위 몬스터들이라 말하는 괴물들이 사는 이런 세계, 글로 쓴 주인공들이 사는 것과 작가 본인이 사는 것은 느낌이 다르잖은가.
단언컨대, 내가 와서 이렇게 살게 될 줄 알았으면 참 평화로운 꽃밭으로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평화롭고 평화롭다 못해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보가 될지라도, 내가 오게 될 줄 알았다면 세계관에 괴물 같은 건 넣지 않았어.
이 세계의 잔혹함이 어느 정도냐, 누군가 내게 그리 묻는다면, 살해당하여 죽은 내 영혼이 쉴 곳이 신의 품이 아니라 제2의 세계라는 걸 알았을 때 느꼈던 멘탈 붕괴보다,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알았을 때 온 멘탈 붕괴가 더 심할 정도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가 어떤 글 속이라는 건 상관없다. 내가 썼다는 사실 자체도 아직은 그다지 수치스럽지 않다. 주인공들끼리 하하 호호 웃으며 짝짜꿍해도 괜찮아. 다 괜찮은데, 이 글의 세계관이 내게 있어 단 하나의 문제였다.
이 곳.
사람을 씹어 먹는 괴물들이 살고.
심지어 그 괴물들은 모두 인지능력이 있고.
어느 왕국들은 전쟁 중이고.
신분고하가 존재하고.
귀족이 탄 마차에 평민 아이가 치여 죽어도 얼마든지 쉬쉬할 수 있는 그런.
이 세계에서 눈뜬 나는 그날로부터 며칠을 헤맸다. 내 자아, 내 사후세계, 내 휴식을 찾아서. 이상하리만큼 나는 쉬기를 원했으며, 드디어 죽었음에도 쉬지 못한다는 사실에 많이도 절망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나는 천천히, 정말 천천히, 적응해나갔다.
괴물로부터 보호 받고 있는 수도는 바깥과 다르게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이곳도 무언가 생명체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햇빛이 내리고, 산들 바람이 불고, 비도 내리고, 이파리가 파랗게 햇빛 받아 빛나는 그런 따스한 곳이었다.
아, 이만 정리하겠다.
이 세계에, 내가 쓴 글에 오게 된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죽은 뒤 꾸는 짧은 꿈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눈을 뜨면 나는 하늘에 있고, 신의 품에 보듬어 안겨있을 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지구의 나는 아직 죽지 않아서 혼수상태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는 잠시 거쳐 가는 곳. 정도 이상의 정은 훗날 필시 나를 힘들게 하지 않겠느냐고.
혹시라도 지구에 돌아가게 된다면, 환상 속에서 내가 가장 바라왔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하다가 돌아가는 것보다는, 이 메마름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내가 원래의 나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천방지축처럼 구는 건 그런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는 탓이었다.
지구에서의 나는 가출은 생각도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고, 사람과 만나는 것을 무서워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기피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앉아서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죽은 강아지를 잊지 못해 종종 우는 사람이고, 사람 죽는 것은 본 적도 없고 죽여본 적은 당연히 없는 평범한 사람이고, 급작스럽게 귀찮음을 느껴 앵돌아지는 변덕스러운 사람.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는데 사랑 받기를 몹시도 원하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바뀌었나.
나는 이곳에 왜 온 걸까.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은 많다. 그러나 이제껏 내가 걸어온 길을 보라. 우연찮은 일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많았다. 언젠가는 떠날 지도 모를 곳에서 겪기에는 지나치게 많이 겪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서 쌓아온 내 역사에 나는 만족한다.
나는 지체 높은 소공녀다. 나보다 더 말썽쟁이인 친구와, 나를 호위하기 위하여 가주 자리를 버린 친구도 있으며, 나를 몹시 아껴주는 동생도 있다. 고귀한 황태자가 선뜻 내 절친한 친우이로라 하며 말해줄 정도로 친한 우정을 쌓았고, 가출하여 여행을 다니다 만든 인연이 온 나라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어두운 뒷세계의 거친 사람들과 연을 쌓을 정도로 나 자신을 놓고, 버렸다.
이 세계를 세우며 내가 만든 나는, 일견 선하게 보이는 자리에도 있고 철저히 악하게 보이는 자리에도 있는 이중적인 범인凡人에 불과한 사람이고,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여주인공을 미친 듯이 질투하여 스스로 침몰하고 마는 조연이기도 하며, 여주인공에게 빠져 누나를 경멸하게 되는 남동생을 가진 조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이전에, 이곳에서의 나 역시 나다. 지구에서의 나보다 호리만큼이라도 무언가는 나아지고 발전했을 나다.
나는 이 역사가 몹시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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