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일상으로.
2021.12.06.
“이것은…… 혹, 서약서?”
헌의 물음에 윤현은 강 씨 부인과 중전 김 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덩달아 소진도 심각한 눈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을, 강수연은 갑, 조상현의 기둥 부인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
말 그대도 강 씨 부인은 김 도령의 기둥 부인이었던 것이었다.
김 도령의 진짜 정인(情人)인 중전 김 씨를 대신하여 그의 옆에 서서 대내외적인 ‘부인’ 역할을 해왔던 것.
그 때문에 김 도령을 행수로 모시며 그를 추종하고 따랐던 이들 모두, 강 씨 부인을 그의 진짜 부인으로 생각했던 것.
그리고 궐에 있는 중전 김 씨는 김 도령의 뒷배를 봐주며 최종적으로 타국 황실로 보낼 여인을 간택하는, 이 먹이사슬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우두머리라고 여겼었다.
그래서 김 도령이 중궁전에게 뒷배를 봐 달라 청하며 여인을 타국과 조선 팔도 이름 모를 섬 곳곳에 팔아넘기면서 챙긴 돈을 꼬박꼬박 갖다 바치고 있다고,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조선의 국모인 그녀는 조상현이라는 한 사내와 깊은 정을 나눈 인물이자, 그와 함께 조선의 백성을 타국으로 팔아넘긴 돈을 차곡차곡 모아 곧 조선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여인들을 마지막으로 모두 정리하고 타국으로 떠나려고 했군.”
“……!”
“강수연이라는 이 여인의 기둥 부인 노릇도 이번 여인들을 타국으로 보내고 난 뒤까지라 쓰여 있으니.”
서약서의 마지막, 강 씨가 김 도령의 가짜 부인 노릇을 행해야 할 시기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이번 중궁전 밀실에 갇힌 여인들이 모두 타국으로 떠난 뒤까지였다.
헌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서약서를 빤히 훑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날 선 시선이 정확하게 꽂힌 곳은 중전 김 씨의 얼굴이었다.
“강 씨는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김 도령의 부인 행세를 해주고. 중전 김 씨는 강 씨를 앞세워 모두의 눈을 속인 뒤 김 도령과 밀회를 즐겼다?”
“…….”
“해서 회임까지 해, 국왕의 아이라 속이고 출산까지 하였고?”
“그 아이는……!”
“…….”
“누가 뭐래도 전하의 핏줄이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중전이 그렇게 소리치자 우두커니 서 있던 영의정이 이제야 이 모든 것이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 참찬, 그대가 확실히 뒷배를 봐주고 있었군.”
“…….”
“내 눈까지 속여가면서 말일세.”
영의정은 저벅저벅 조 참찬의 앞으로 다가갔다.
“영상 대감! 나는 아니란 말이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다시 실세를 거머쥔 영의정에게 빌붙기 위해서 조 참찬이 울먹이며 두 손을 싹싹 빌기 시작하는데.
“네 조카 놈이…… 중전 김 씨의 정인이니.”
“……?!”
“네 조카 놈의 정인이란 중전이 회임까지 하였으니! 그런데 왕자라고 눈속임할 수 있는 아들까지 출산하였으니!”
버럭 소리를 지르는 영의정의 눈동자에 붉은 핏발이 선연했다.
“네 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중전 김 씨에게 달라붙어서, 중궁전이 더럽게 쌓아 올린 권세 덕을 봐야 했겠지. 그것만이 네가 살 길이라 생각했으니까!”
“……영의정.”
“내 말이 틀렸느냐?”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영의정이 허리를 굽혀, 조 참찬과 시선을 맞추었다.
조 참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호시탐탐 실세가 될 기회를 엿보던 네 놈은 어느 날, 네 조카가 중전 김 씨의 숨겨 둔 정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겠지. 그것을 알게 된 너는 뛸 듯이 기뻤을 것이야.”
“…….”
“아, 화론 파 아래에서 늘 고개만 조아리고 눈치만 살펴야 했던 네놈은 이 기회로 삼아 어쩌면 부원군만큼이나 동등한 명성을 지닐 수 있겠구나, 싶었겠지.”
그 말을 헌 역시, 묵묵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듣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도 중전 김 씨와 네 조카 놈이 밀회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당연히 중전 김 씨가 낳은 아이는 전하의 왕자라고 생각할 것이고!”
“……”
“나아가 세자 저하를 밀어내고 국본(國芬)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다면…… 넌 조선을 발아래에 둘 수 있을 것이라, 그리 아둔한 착각을 하며 살아왔겠지.”
정곡을 찔린 탓에 조 참찬의 고개가 푹, 꺾이고 말았다.
“중전이 네놈 조카와 타국으로 야반도주를 하든…… 그것에 실패해 조선에 남아 뻔뻔하게 국모로서 생을 마감하든.”
“……!”
“조 참찬, 네놈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동아줄이 되어 줄 중전이었으니…… 놓을 수 없었겠지. 해서 필사적으로 도왔겠지.”
헌도 그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한참 끄덕였다.
그러곤 조 참찬의 앞에 우뚝 서며 벌레를 보는 듯, 경멸스러움으로 가득 찬 눈을 치켜떴다.
“참으로 끈끈한 연(聯)으로 엮인 사악한 무리구나.”
더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다는 얼굴로 헌이 휘적휘적 왕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눈빛을 위엄 있게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저쪽에는 조 참찬 사가에서 발견된 타국에서 들여온 귀중품과 금은보화가 있습니다. 모두 여인을 판 대가로 받은 것이지요. 실제로 여인들을 타국 황실 후궁으로 만들기 위한 공간이 그곳에 따로 있는 것도 확인하였습니다.”
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큰 악행을 저질렀을까.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 넋이 나간 채로 중전 김 씨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근거는 김 도령의 수족 노릇을 하는 무사 중 한 명의 처소에서 발견한 서찰입니다. 선별한 여인들을 타국으로 보내면 그곳에서 황실 후궁으로 만들기 위한 사람들이 직접 여인들을 돌보고 가르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
“물론, 황실에는 도적질하듯 조선에서 여인을 훔쳐 와 후궁으로 바치는 것이 아닌.”
“…….”
“모두 원해서, 자발적으로 건너온 것으로 말을 맞추어 놓았고요.”
한숨을 푹 내쉬는 왕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면…… 타국이 아닌, 조선의 다른 섬으로 팔려간 여인들의 행방은.”
“모두 어느 섬에, 또 누구에게 팔았는지. 명부에 소상히 적혀 있으니 지금 당장 의금부를 보내 데려오면 될 것 같습니다.”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왕이 힘겹게 한 걸음을 떼었다.
그러곤 원망 가득한 눈으로 창백한 중전을 내려다보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중전이라는 자리가……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냐.”
“…….”
“아니면 내가 때때로 정신이 혼몽하니 이런 추악한 일을 저질러도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느냐.”
그러자 중전이 조소 가득한 입술을 벌리며 도리질했다.
“……사람처럼 살고 싶어 그리 했습니다.”
그 말에 소진의 고개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중전의 목소리는 악에 받쳐 고함만 내지르던 것과 달리,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이제는 악을 써도, 발버둥을 쳐도 회생할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처럼.
“사람처럼 살고 싶어 양반 집의 양녀(養女)로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더러운 피가 흐르는 나 따위는 결코 양반 댁 아씨 취급받지 못하더이다.”
“…….”
“해서 어떻게든 사람대접 받으며 살고 싶어…… 자처해 입궐하겠다 하였지요. 아비 뻘 되는 늙은 왕에게 시집가던 길.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했습니다.”
“…….”
“나를 무시하고 핍박하고…… 신분이 천해 손가락질하던 이들 모두를 내 발아래에 두겠다고요. 한데 이 악물고 국혼을 치른 내 앞에…… 조 숙원이라는 큰 산이 있더이다. 나만큼이나 천한 출신인 숙원을 볼 때마다……. 그리고 은근히 그녀와 나를 두고 같은 천출(賤出)이라 숙덕이는 궁인들을 볼 때마다. 사가 시절, 피를 토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지요.”
“해서 죽였느냐.”
“…….”
“아무 죄 없는 그 여인을…….”
왕은 울음을 참고 있었다.
고개를 치켜드는 중전의 뺨은 이미 뜨거운 눈물로 범벅이 된 채였다.
“죄가 왜 없습니까?! 중전인, 내명부의 수장인 내가 이리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전하의 성총을 모두 앗아가니…….”
“…….”
“창창한 나이에 국혼 해! 전하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도 없고! 전하와의 합방도 제대로 치러본 적 없으니…… 후사를 이어야 하는 윗전의 의무를 방해한 것이 아닙니까?!”
뿌연 눈물로 가득 찬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한데도……. 나는 사람이 아니더이다.”
“…….”
“눈엣가시였던 조 숙원을 치우고 완벽한 국모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궁인들은 앞에서만 내게 고개를 조아렸지, 뒤에서는 날 향한 숙덕거림을 멈추지 않았지요.”
“…….”
“또한, 전하께서도…… 없는 사람, 산송장 취급하시면서. 병세가 도질 때만 나를…… 그리 따스하고 애정 어린 눈으로 봐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중전인 내 모습이 아닌…… 죽은 조 숙원의 환영(幻影)을 보면서요.”
이미 중전은 피해 의식과 망상으로 세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만 남은 상태였다.
“아무도 날 인정해주지 않으니, 차라리 이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 한 것입니다.”
소진의 눈동자가 엷게 흔들렸다.
사리 물은 입술도 파르르 떨려왔다.
“해서…… 저 아무 죄 없는 무구한 여인들을 타국의 후궁으로 팔아넘기려 했습니까?!”
갑작스러운 소진의 외침에 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선을 손에 쥐려면 타국의 황실을 뒷배로 둬야 했으니까? 조선에서 인정받지 못하니, 타국에서 자리를 잡아 그곳에서 여인을 팔아넘긴 대가를 받으며 떵떵거리면서 살려고요?”
“……한 규수.”
“해서 그곳에 자리 잡기 위한 자금은…… 또 다른 여인들을 조선 팔도 곳곳에 팔아넘긴 돈으로 충당했고요?!”
격해지는 소진의 음성에 영의정이 나서서 그녀를 제지했다.
“소진아…… 너는 이제 이 일에서…….”
“하면 백성들은 무슨 죄입니까?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왜 죄 없는 백성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낸 것이냐고요!”
봉희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이제 그 분노를 내려놓아도 좋다는 의미였다.
그 모습에 왕도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처럼 살기 위해 그리했다…….”
“…….”
“그것은 변명도 뭣도 아닌, 네가 저지른 악행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헛소리일 뿐이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네 헛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 않을 것이다.”
왕의 고개가 천천히 헌을 향해 돌아갔다.
“……여기 죄인, 한 명도 빠짐없이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비례한 엄벌을 내리도록 하여라.”
“예, 전하.”
“그리고 중전 김 씨는 이 자리에서 국모의 자격을 박탈하고 폐위한다.”
“……!”
“폐서인 김 씨와 김 도령, 그리고 조 참찬, 부원군.”
“…….”
“이번 일을 주동한 주동자들의 삭탈관직과 재산 압수, 그리고 교수형(絞首刑)을 명한다.”
간단한 그 말을 남기고 왕이 돌아섰다.
모두 곡소리를 내며 살려달라 울부짖었지만, 단 한 사람.
“……교수형을 처하든 능지처참을 당하든, 다 좋으니!”
중전은 서슬 퍼런 기세로 돌아서는 왕을 향해 소리쳤다.
“왕자는…… 왕자만큼은……!”
“…….”
“전하의 핏줄임을…… 거부하지 마시옵소서. 그 아이는……!”
“닥쳐라.”
왕은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얼굴로 그녀의 말허리를 끊었다.
“그 아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의 핏줄이 아니다.”
“……전하!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살려주시옵소서!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시어요!”
발악하는 중전을 돌아보며 왕은 가차 없이 이어 말했다.
“죄라면 중죄인의 부모를 둔 것이 죄이지.”
“전하!”
“가자. 뒷일은 세자에게 맡기고 난 대전으로 가야겠다.”
왕은 그렇게 매몰차게 돌아섰고 중전은 오열하며 아이를 보게 해달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어쩐지 소진의 가슴도 울렁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놓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니, 모든 이의 가슴을 부수어 놓은 이 악한 자들이 벌을 받는 이 순간을 슬퍼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기 생각에 치미는 울음을 꾹, 꾹 삼켜내는 소진을 바라보며 헌이 숨을 가다듬었다.
“내일 해가 뜨면…… 우리는 다시.”
“…….”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오.”
그 말에 궁인들과 밀실에 갇힌 여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영의정도 모두 끝이 났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울먹이는 소진의 손을 잡았다.
“소진아…… 수고 많았다.”
“아버지…….”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는 영의정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뒤로 죄인들은 한 명씩, 다시 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왕의 명령대로 모두 엄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죄의 무게에 따라 관노로 보내거나, 사약을 먹는 이들. 또한, 곤장을 맞는 이들도 있을 테였다.
특히, 폐서인이 된 중전 김 씨와 그의 정인 김 도령.
그리고 두 사람의 뒤를 봐주던 조 참찬과 부원군 김 씨는 교수형에 처할 예정이었다.
“모두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돌아갈 순 없겠지만.”
“…….”
“이번 일로 상처받은 백성들을 한 명, 한 명, 살뜰히 보살필 수 있도록 만전을 가하겠소.”
옥체 미령한 왕을 대신해 헌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고 있으니, 이번 일의 마무리는 모두 그가 책임져야 했다.
헌의 말에 소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반듯하게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따스하게 교차했다.
곧, 헌이 찬찬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우리도.”
“……!”
“이제 행복한 일상으로 들어가자.”
뺨에 닿는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보드랍고 달콤한 눈빛이 소진을 꽉, 안아주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