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김 도령의 진짜 이름.
2021.11.29.
“해서 그 아기는 어쩔 셈이야?”
봉희는 소진의 품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소진을 응시했다.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에 소진은 입술만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아휴, 아씨. 그 아기 얼른 중궁전 그년한테 넘겨주시지요. 괜히 아씨까지 그 아기 보듬고 있다가 봉변당할까 걱정입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 나쁜 연놈들 아기를 뭐 그리 애지중지하고 계셔요, 아씨. 얼른 줘버리세요!”
여인들이 중전의 아기를 꼭 보듬고 있는 소진을 이해가 가지 않다는 투로 말을 보태고 있었다.
그러자 소진이 씨익,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저하께서 데리고 있어도 좋다고 하시었어요. 그리고…… 이 아기는 죄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중전 김 씨가 어떤 벌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기는 그것과는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종일 이 사람, 저 사람 손에 옮겨 다니며 고된 하루를 보냈을 아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갓난아기가 무슨 죄가 있어 편히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고 도망 다녀야만 하는지.
비록 어미와 아비의 죄는 무겁고 엄중하나, 이 갓난이가 무엇을 알까.
차분한 시선으로 아기를 내려다보는 소진의 마음이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휩싸였다.
“정 주지 마, 소진아.”
그런 그녀를 염려하는 듯, 봉희가 소진의 어깨를 짚었다.
“죄인의 자식일 뿐이야.”
“……봉희야.”
“세자 저하의 생모이신 숙원 마마님을 죽인 나쁜 여인이잖아.”
“…….”
“그뿐이니? 이 아기를 전하의 아들이라고 속여 왕가의 핏줄로 키우려고도 했어. 우리를 가둬 어찌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그것만으로 사약을 받아 마땅한 중죄인이 아니니?”
봉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여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더러 몇몇은 소진과 같은 눈을 하고서 아기를 가엾게 보는 이도 있었다.
“그렇긴 해도…… 난 아씨의 마음 이해가.”
“……맞아. 저 아기는 죄가 없잖아.”
“저 갓난이의 운명은 어찌 될까?”
방 안에는 여인들의 한숨으로 가득 찼다.
날이 밝는 대로 중전과 김 도령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 되면 이 갓난이는…….
“그래도 오늘 밤만큼은…… 좋은 꿈 꾸거라, 아기야.”
소진은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의 따뜻한 가슴을 토닥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깊은 밤, 달은 휘영청 밝게 떠 있었다.
그 달을 묵묵히 올려다보던 소진은 여인들이 모두 잠든 처소 안을 힐끔 돌아보며 조용히 방을 나섰다.
마루에 걸터앉아 저 멀리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는 소진의 가슴이 착잡해졌다.
길고 긴 싸움이 끝이 났지만, 이상하게 속은 시원하지 않았다.
중전이 감추고 있는 비밀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소진이 감당하기에는 가혹하기만 했다.
생각지도 못한 헌의 어머니인 조 숙원의 죽음까지.
그리고 후사를 잇지 못하는 왕의 자식을 가졌다며 저 갓난이를 두고 그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려고 했으니.
제 상식으로는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때, 저 멀리 호롱불 하나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소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긴장한 채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안 자고 무엇 하고 있느냐?”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헌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의 음성이 귀에 닿자 소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저하……?”
이내 소진의 곁에 헌이 성큼 다가와 섰다.
달빛 아래, 침소 의대로 갈아입은 헌이 지그시 미소를 그린 얼굴로 소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윤현 홀로 헌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잠이 오지 않아서……. 한데 너는?”
“소인도요……. 잠이 오지 않네요.”
“내일이면 너도 이곳을 이제 떠나, 집으로 돌아가겠구나.”
“……예. 여인들도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겠지요.”
두 사람은 같은 눈빛을 하고서 여인들이 잠들어 있는 처소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찾고 싶던 벗을 찾았으니 이젠 여한이 없겠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헌이 말했다.
소진을 가득 담은 그의 눈빛이 은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여한이 없긴요…….”
입술을 달싹이는 그녀의 표정이 슬펐다.
“여인들을 식솔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어 다행이지만…… 저하는 큰 슬픔을 얻지 않았습니까.”
“소진아.”
“어찌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진의 대답에 여전히 그는 희미한 미소만 그리고 있었다.
슬퍼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헌이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조금 걸을까, 우리.”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소진이 그 뒤를 따랐다.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피어나고 발아래에서는 사그락사그락 풀이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앞서 걷던 헌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렸다.
그런 그가 말없이 그녀를 향해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소진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포갰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두 사람은 달빛을 받으며 걸었다.
“중전은 사약을 면치 못할 것이다.”
침묵을 유지하던 헌이 입술을 열었다.
“예에…….”
“김 도령도 그리고 그를 도왔던 부원군과 조 참찬, 그리고 중궁전과 포도청 사람들 모두.”
“…….”
“엄중한 벌을 받을 것이야. 죄질이 너무 악하고 무거워 모두에게 엄벌을 내리라 특별히 어지(御旨)를 내리셨거든.”
소진이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중전의 아기는…….”
말끝을 흐리는 헌을 그녀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기라는 말에 가슴은 금세 조마조마해지고 말았다.
“아기는…… 어찌하시라 하시었습니까?”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헌은 소진의 손을 가만히 놓고 그녀의 어깨를 따뜻이 보듬어 주었다.
“아바마마께서는…… 다행히 너와 같은 생각이시더구나.”
“아.”
소진은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뱉었다.
“갓난이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며…….”
“…….”
“죄가 있다면, 오히려 본인에게 있지 않겠느냐고 하시었거든.”
비스듬히 헌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린 소진의 뺨에 불그스름하게 열기가 돌았다.
“어째서 전하께서…….”
“당시에 어의 영감이 분명 아바마마께 아바마마의 병세에 관하여 소상히 알려주었다더구나.”
“……예.”
“한데 아바마마께서 모두 잊은 것이지.”
“…….”
“정신이 혼몽해지실 때마다 중요한 것들을 한둘씩 잊어가시었더구나. 해서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어의 영감의 말도 잊어버리시고 중궁전이 회임했다는 말에 당연히 본인의 아이일 것으로 생각하시었던 것이야.”
소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역시, 착잡한 마음으로 찬찬하게 말을 이었다.
“어의 영감이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중전의 회임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으니 아무도 중전의 회임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였던 것이지.”
“…….”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자책하고 계신다. 해서 갓난이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며…… 아기를 어찌할지는 조금 더 고민해 보아야겠다고 하시었다.”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기가 만약 자라, 제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알게 된다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그 아이는 끝까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뒤죽박죽된 마음으로 소진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께서도 마음이 무겁겠습니다. 한데 소용 마마님은.”
“…….”
“어찌 되시는 것입니까? 뒤늦게 고백을 하였다고 해서 비난을 받기보다는…… 이제야 말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좀 봐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나 역시 같은 생각이기는 하다. 어머니께서 죽기 직전에 민 소용에게 어의가 남긴 일지를 넘겼던 이유도.”
“예……. 언젠간 중전마마가 아기를 두고 이런 장난을 칠 것이라고 예상을 하여서…….”
“그래. 해서 민 소용은 중전이 아들을 낳았다며 유세를 떨고 떵떵거리길 기다렸다가 터뜨린 것이다.”
“…….”
“그리고 그때 어머니의 죽음까지 모두 발설하겠다고 마음먹고 기다렸고.”
“예.”
“늦긴 하였지만, 이제라도 말을 해주었으니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각자 생각에 잠긴 듯,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둘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때, 못가에 당도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바위에 걸터앉았다.
“소진아.”
할 말이 있는 듯이 그가 소진의 손을 자신 쪽으로 가만히 끌어왔다.
“예, 저하.”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어떤…….”
달빛이 흐르는 못가를 바라보는 헌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소진의 눈동자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물기가 설핏 어렸다.
“너를 만난 건 하늘의 뜻이 아닐까.”
“…….”
“그날 밤, 나를 구한 이가 너였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기억 소실증에 걸려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 고군분투하였던 것도.”
“…….”
“봉희 댁이 사라져 네가 간택전에 참가하겠다고 궐에 뛰어든 것도 모두.”
못가만 묵묵히 바라보던 헌이, 스르륵 시선을 돌려 소진을 내려다봤다.
“하늘이 너와 날 엮어주려 그런 것이 아닐까?”
엷은 미소가 그의 붉은 입술 위로 곱게 번져갔다.
“저하…….”
헌이 가만히 손을 뻗어 소진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슬프긴 하지만.”
“…….”
“또한, 잊고 있던 아픔이 다시 불거져 힘이 들긴 하지만.”
“…….”
“소진이 네가…… 이렇게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그 모든 고통을 사그라들게 한다.”
단맛이 날 것만 같은 그의 촉촉한 입술은 연신, 소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달콤하고 따뜻한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소진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헌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슬픔은.”
“…….”
“너랑 행복할 일만 남았다.”
“저하.”
“하니 오늘만 슬퍼하마. 오늘만…… 이리 휘청거리마.”
곧 꼭, 감은 그의 눈 아래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아무래도 숙원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헌의 눈물샘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의 흐느낌을 느낀 소진이 그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헌이 가만히 그녀를 품에 놓으며 붉어진 눈으로 소진과 시선을 맞추었다.
“예……. 슬퍼하시어요, 저하.”
“소진아.”
“오늘만이 아니라…… 언제든 슬프고 아프면 그 짐을 내려놓으시어요.”
“…….”
“언제든 저하께 이 품을 내어드릴 테니까요.”
그러면서 소진이 헌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다정히 닦아주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 *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추국청은 많은 이들로 북적거렸다.
모두 참담한 얼굴을 하고서 포승줄에 포박된 채, 흙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헌과 대비, 그리고 왕이 그들 앞에 서서 죄인 한 명, 한 명을 세찬 눈길로 응시했다.
그때, 저 멀리 내내 옥에 갇혀 있던 영의정이 풀려나 세 사람 앞에 반듯하게 섰다.
그러자 왕은 천천히 입술을 열어, 조금은 수척해진 영의정을 바라보았다.
“영의정 한성준은 아무런 죄가 없다.”
“…….”
“그러니 이 시각 이후로는 다시 영의정의 자리로 돌아가 세자와 나를 위해 힘써줄 것을 명하는 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영의정은 왕의 말에 무릎을 구부리며 그를 향해 큰절을 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소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모았다.
곧, 헌의 시선이 부원군의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조 참찬에게로 향했다.
“조 참찬은 고개를 들라.”
헌은 무감한 얼굴로 조 참찬을 불렀다.
그러자 그는 억울하다는 듯, 황급히 입술을 달싹였다.
“저하! 소신은 억울하옵니다!”
“…….”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중전마마와 부원군 대감의 명령을 받잡았을 뿐입니다!”
이제 와 발을 빼려는 그의 모습에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중전 김 씨가 조소했다.
하지만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헌에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헌은 더, 거센 눈길로 그를 훑으며 버럭 소리쳤다.
“억울해?!”
“……저하.”
“감히 네가 억울하다는 말을 입에 담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헌은 억울하다 소리치는 조 참찬이 아닌 김 도령의 앞에 섰다.
“조상현.”
“……!”
헌이 생경한 이름 하나를 뱉어내자, 조 참찬과 중전 김 씨의 동공이 예민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조 참찬, 네놈의 숨겨진 조카이자 김 씨의 간통 상대인 김 도령의.”
“…….”
“진짜 이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