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 두려웠던 것이겠지요. (121/125)

121. 두려웠던 것이겠지요.

2021.11.26.

중전과 김 도령이 생포되어 궐로 돌아오자, 궐문을 지키고 있던 김 도령의 무사들은 모두 칼을 내려놓고 말았다.

동시에 궐문을 단단히 지키고 있던 호위대가 곧바로 그들을 덮쳤다.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잡혔으니 더는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행수 어르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무사들은 호위대에게 하나, 둘, 잡혔다.

그리고 궐문을 지키겠다, 너도나도 곡괭이를 들고 나섰던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중전을 잡았다!”

“우리가 이겼다! 이겼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끌려오는 중전 김 씨를 보며 손가락질하던 백성들이 갑자기 돌을 집어 들었다.

“저 나쁜 년!”

“중전은 무슨 중전이야! 생때같은 내 여식 잡아간 도둑년!”

그러곤 사정없이 중전을 향해 돌팔매질하고 있었다.

제 여식들과 부인, 누이들을 잡아 가두고 팔아넘기기까지 하려 했으니, 백성들에게 김 씨는 더는 국모가 아니었다.

자신의 식솔들을 고통스럽게 한 악한 여인일 뿐이었다.

탁, 탁.

돌멩이가 위협적으로 날아와 중전의 발아래에 떨어졌다.

그러자 김 도령이 황급히 그녀를 막아서며 백성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허! 무엄하도다! 감히 뉘 안전이라고 돌을 던지느냐!”

하지만 그의 외침은 분노한 그들에게 더욱 불을 지피는 기름에 불과했다.

“무엄?! 저놈이 미쳤나!”

“전하의 여인과 놀아난 주제에 누구에게 훈수질이야!”

“네놈은 이제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다!”

백성들의 돌은 김 도령에게도 향하기 시작했다.

“더러운 연놈들 같으니라고!”

“우리 손으로 죽입시다! 저들은 우리 식솔들의 원수요!”

중전은 모욕적인 말과 함께 돌을 맞고도 눈 한번 깜빡이지를 않았다.

묵묵히 정면만 바라보면서 입술만 악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백성들의 원성은 윤현의 품에 안겨 있는 중전의 아기에게 꽂혔다.

“저 갓난이를 감히 전하의 아들이라 속이려고 했다지?!”

“창피한 줄도 모르고 기어이 아이를 낳았어?”

“쯧쯧. 어미, 아비를 잘 못 만난 죄로 저 아이는 이제 어찌 얼굴을 들고 살아갈꼬?”

“살긴 어찌 살아! 전하께서 사실을 알고도 저 원흉 같은 아이를 궐에서 살도록 내버려 두겠어?”

“하긴. 곧바로 저 둘과 함께 죽이겠지?”

지금껏 그 어떠한 모독에도 동요하지 않던 중전은 자신의 아기를 두고 숙덕이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괴로움에 일그러지는 얼굴.

꾹 움켜쥔 주먹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이를 향한 모진 말은 점점 더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중전이 애처로운 눈길로 제 아들을 돌아보았다.

낯선 사내의 품에 안겨 있어 그런지 조금 전부터 목청이 터지라 울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운지 손을 잠시 뻗으려던 중전은 다시 그 손길을 거두고 말았다.

‘저 아이만이라도 살려야 해. 불쌍한 내 아들…… 내 아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야……. 아이만큼은 왕의 핏줄이라고 우겨야 해. 정을 떼야겠어. 이제부터 매정하게 대해야 해.’

눈물을 삼키며 중전은 굳게 다짐했다.

그때, 헌의 곁에 잠자코 서 있던 소진이 윤현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 제가 안고 가도 되겠습니까?”

자지러질 정도로 울어대는 아기가 걱정됐는지, 소진은 직접 자신이 안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헌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소진의 팔을 그러쥐었다.

“소진아……. 네가 어찌.”

“아이가 너무 울어서 걱정입니다. 사내의 손보다는 제가 나을 것 같아서요.”

“…….”

“그리고 백성들의 말이 마음에 너무 걸려서…… 아이가 가엾습니다. 아직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라고는 하나…… 저런 모진 말들을 고스란히 듣게 하는 것이…….”

윤현의 품에 어정쩡하게 안긴 아기를 내려다보며 소진은 이어 말했다.

“궐 안까지만이라도……. 소인이 안고 가게 해주세요.”

“하나 죄인의 아이다. 네가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아이는…… 죄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헌은 고심에 잠긴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윤현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소진에게 아기를 건넸다.

“이번은 아씨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제가 아이 보듬는 건 처음이라 영 어색하기도 하고…… 해서 불편해 계속 우는 것 같습니다.”

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현에게 아이를 건네받은 소진은 얼굴이 빨개져라 우는 아기를 품에 꼭 보듬었다.

자신의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중전의 아기를 내려다보니 이상하게 엉킨 마음이 사르륵 녹는 기분이었다.

“저도…… 이런 갓난아기는 처음 보듬어 봅니다.”

머쓱하게 웃으며 소진이 아기의 손을 꼭 쥐었다.

“아기야……. 울지 마. 응?”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온통 욕설과 거친 말로 뒤덮였던 아기의 작은 귀를 감싸고 있었다.

품 안이 따뜻하고 포근한지 아기의 울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런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헌의 눈동자가 먹먹하게 젖어갔다.

“참으로 작고…… 귀엽습니다. 그렇지요?”

소진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보드랍게 올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사랑스러운 눈길로 아기를 내려다보던 헌이 황급히 시선을 거두며 등을 돌렸다.

헛기침을 뱉어내는 그를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소진이 바라봤다.

찰나였지만, 그녀는 아기를 내려다보던 헌에게서 다정한 눈빛을 읽어낼 수 있었다.

소진은 말없이 아이를 품에 안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헌이 다시 바라보았다.

‘저 아이를 어찌해야 할까.’

여전히 그 시선은 깊어져 있었다.

한편, 저 멀리서 중전은 그런 소진의 모습을 바라보곤 속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굴긴 했지만, 못내 아기의 찢어지는 울음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자신의 품에 보듬고 싶다는 생각을 밀어내며 중전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중전의 아들을 안은 소진과 그 옆을 헌이 지키며 모두 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아바마마…… 소자이옵니다.”

소진을 밀실 여인들이 머무는 처소에 데려다준 후, 대전으로 돌아온 헌.

민 소용은 처소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대전에서 낮게 가라앉은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안으로 들어서니 왕이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괴로워 보이는 그의 모습이었다.

“아바마마.”

헌 역시, 그와 같은 마음일 것이었다.

이십여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비밀.

그것은 차마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큰 슬픔이자 고통이었다.

“왔느냐……. 중전과 김 도령이라는 자는.”

“……추국청에 있습니다.”

그 말에 왕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 공허한 눈빛으로 헌을 바라보았다.

“잘……하였다.”

“이제 밀실 여인들을 두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였는지만 명확하게 밝히면 됩니다.”

“…….”

“어차피 그자들에게 물어봤자, 모른다고 잡아뗄 것이고…….”

“그래. 해서 청국과 연관이 있다는 네 말에 날이 밝는 대로 청국으로 사람을 보낼 예정이다.”

“옥체 편치 못하시온데 신경 써주셔서 황송하옵니다, 아바마마.”

“당연히 신경을 써야지.”

“참, 그리고 부원군과 조 참판, 모두 연루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곧바로 호위대를 보냈습니다.”

“그 밀실 여인들과 연관된 모든 이를 잡은 상태인 것이냐.”

“예, 아바마마. 해서 은신처로 사용했던 모든 곳을 수색하라 명하였으니 곧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밝혀지겠지요.”

모든 것이 헌의 뜻대로 될 것이었다.

이제 그들 모두에게 여인들을 감금하고 팔아넘기려 한 죄를 물어 그에 타당한 벌을 내릴 일만 남았다.

하지만 중전 김 씨의 죄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왕의 여인으로서 절개를 지키지 못한 죄.

아녀자의 몸으로 간통을 범한 죄.

밖에서 나온 자식을 왕의 혈통이라 속여 왕실을 농락한 죄.

그 죄의 가짓수와 무게가 상당했다.

또한, 김 도령도 그런 중전과 그 모든 죄를 함께 저질렀으니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아바마마…….”

그러나 그 어떤 죄보다 더욱 괘씸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숙원이 그런 일을 당했다니.”

“…….”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구나.”

왕의 성총을 한몸에 받고 세자의 생모였던 조 숙원을 그렇게 참담하게 죽였다는 것이었다.

용서할 수도, 용서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엉망이 된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헌이 그 앞에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그 역시 허탈한지 연신 고개만 저었다.

“그 어떤 벌을 내려도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체…… 민 소용은 무슨 생각으로 지금껏 그 사실을 숨겨온 것일까.”

“…….”

“그간 조 숙원이 죽고 지금까지 민 소용은 그 누구보다 조용히 살아오지 않았더냐.”

“…….”

“그런 어마어마한 비밀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는데.”

그때 밖에서 상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대비마마 드셨사옵니다.”

“모시어라.”

대비가 들었다는 말에 헌과 왕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대비는 헌과 왕만큼이나 참담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민 소용의 석고대죄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한 채, 대비가 헌의 앞에 섰다.

그녀의 입꼬리가 연신 덜덜 떨리고 있었다.

“소상히 말해보세요, 세자.”

“할마마마.”

“조 숙원의 죽음을 민 소용이 알고 있었다고요? 한데 왜 숨겼답니까, 왜!”

“…….”

“그때 알았더라면…… 그때 알았었다면, 악한 것을 일찌감치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지금의 이런 불미스러운 일도 없었을 것이고요!”

대비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왕이 얼굴을 추어올렸다.

“두려웠던 것이겠지요.”

“…….”

“민 소용이 두 번째 회임을 그렇게 유산했다는 것만 들어도…… 그 일로 어마어마한 두려움과 고통을 느낀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민 소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왕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헌도 그런 그를 말없이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소자의 기억에는 어머니의 죽음에 자결 혹은…….”

“…….”

“민 소용이 투기로 인해 죽였다는 말들이 오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잠자코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상선이 헌의 말에 공감했다.

“예, 맞습니다.”

“…….”

“유력 용의자로 민 소용 마마님이 지목을 당하고 계시었지요. 그러다가 마마님의 외가에서 큰 압박을 넣어 그런 소문을 궐에서 없애버렸지만요.”

“…….”

“해서 ‘조 숙원 마마님이 죽은 것은 자결이다, 아니다’라는 말만 무성히 오가며 의문사로 남은 것이었습니다.”

헌이 슬픔을 꾹꾹 삼키며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더욱이 말을 못 꺼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 말에 상선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또 그 당시…… 중궁전의 주인이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긴 일이라. 중궁전 쪽에서는 내명부에서 생긴 불미스러운 일을 서둘러 감추고 싶어 했습니다.”

“…….”

“그리고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하의 병세가 심해지셔서…… 중궁전을 조 숙원 마마님이라 착각하시어서…….”

눈가를 훔치던 왕은 모두 제 탓이라는 얼굴로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그의 부르튼 입술 위로 자조적인 웃음이 번져갔다.

“모든 것이 내 탓이구나.”

“……아바마마.”

“내가 그런 악귀에 씌지만 않았어도 곧바로 숙원의 죽음을 파헤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때를 회상하는 듯 왕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대비도 차오르는 안타까움에 마른 한숨만 내쉬며 말을 보탰다.

“지금에서야 그때를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급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

“나 역시 중전이 새로이 책봉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궐 안팎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 원치 않아 숙원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

“속히 정리하라 명령을 내린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날을 후회하며 대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숙원의 죽음이었기에 그리 허술하게 넘긴 것일 수도 있었다.

무수리 출신에 후궁 말단인 조 숙원.

외가도 그녀를 받쳐주는 세력도, 아무것도 없던 그녀의 죽음이었기에 그렇게 쉬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비 역시 세자의 생모이지만, 세자에게 흠을 주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이라 늘 그녀를 향한 아쉽고 탐탁지 않은 마음이 존재했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딱히 숙원의 죽음에 더는 의문을 갖기보다는 서둘러 일을 덮기에만 급급했었다.

왕도 그 일로 심신이 약해져 병세가 악화하였으니, 그의 병세에만 더욱 신경을 쓰기만 했었다.

“어마마마의 탓도 아니옵니다.”

자책하는 대비를 돌아보며 왕이 푸념했다.

“중궁전만 보면 그렇게 숙원이라 헛소리를 지껄였으니…… 민 소용이 어찌 중궁전이 숙원을 죽은 범인이다,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상.”

“내가 정신만 놓으면 중궁전을 그리 아꼈으니 중궁전의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을 터인데.”

왕의 말에 대비와 헌이 어깨만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참담함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한데 중궁전 아기는 어찌할 셈입니까.”

대비가 어렵사리 질문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헌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한 규수가 데리고 있기는 한데.”

“영의정의 여식이?”

“예. 어찌 하올까요.”

왕이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며 고심에 잠겼고 대비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어찌하긴. 중궁전과 김 도령이라는 그 작자와 함께 그 갓난이도 없애버려야지.”

조금은 가혹한 그 대답에 헌은 조금 전, 아기를 품에 보듬고 있던 소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왕이 무겁게 입술을 뗐다.

“……갓난이는 죄가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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