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화론파 해체
2021.11.19.
“큰일 났습니다, 저하!”
감옥 밖에서 중전이 끌려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헌은 큰일 났다는 말에 사색이 됐다.
“왜! 중전이 도망친 것이야?!”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비키거라!”
헌은 버럭, 호통치며 감옥 앞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서둘러 중전과 상궁이 갇혀 있던 철창 안을 바라보았는데 거짓말같이 사라져버렸다.
빈 철창 안을 확인하자마자 헌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궐문을 걸어 잠그고 석반을 날랐던 궁녀 모두 추포해 중전의 행방을 쫓아라! 그리고 문지기들과 옥을 관리했던 모든 이들 또한, 당장 추국청으로 끌고 가라!”
단호한 그 말을 남긴 채, 헌은 사복시(司僕寺)로 달렸다.
그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영의정이 황급히 헌의 앞에 섰다.
“저하!”
“대감, 중전이 사라졌습니다. 빨리……!”
“왕자 아기씨도요.”
“……뭐요?”
난감하다는 듯 연신 주위를 살피며 영의정은 미간을 구겼다.
이제는 왕자 아기씨라고 하기도 뭣한 중전의 아들이었다.
“중전 김 씨의 아들도 사라졌단 말입니다!”
“작정을 하고 도망쳤구나. 분명 낮까지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찾아오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채, 헌은 다시 달렸다.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희대의 악녀였다.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까지 기만한 절대 용서치 못할 여인이었다.
사복시를 향해 내달리는 헌의 눈앞이 자꾸만 뿌옇게 흐려졌다.
내내 잊고 살았던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과 그리움, 그리고 송구스러움이 물밀 듯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 * *
한 시진 전.
“석반이오.”
철커덩, 철창문이 열리자 내내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고 있던 중전이 눈을 떴다.
덩달아 그 옆에 앉아 있던 상궁도 눈을 반짝이며 중전을 바라보았다.
“마마…… 김 도령이 언질 줘두었던 석반입니다.”
그 말에 중전이 고개를 조심스럽게 까닥였다.
철창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통로로 궁녀 여럿이 석반이 든 바구니를 들고 차례로 들어오고 있었다.
분명 석반을 전해주는 궁녀가 김 도령과 한패라고 했다.
중전은 예민하게 눈을 치켜떠, 죄인들에게 석반을 내어주는 궁녀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때, 궁녀 하나가 쭈뼛쭈뼛 주위를 심하게 경계하며 중전의 앞에 섰다.
“여기 있습니다.”
석반을 건네받은 중전은 궁녀의 손을 홱 잡아끌었다.
“받은 것, 있지.”
나지막이 그 한 마디만 뱉었는데, 궁녀는 입구 쪽을 힐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아래.”
궁녀가 가리킨 곳을 보니, 석반 바구니 틈에 서찰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서둘러 가보라는 눈짓과 함께 중전이 황급히 종이를 펼쳐 들었는데.
<중전마마, 석반이 끝날 무렵 문지기 둘이 우리 쪽 사람들로 교체될 것입니다. 궁녀가 석반을 치우러 올 때 문을 열어줄 것이니 궁녀 복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석반 담당하는 궁녀인 척, 옥을 빠져나오십시오.
늘 만나던 비밀 통로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왕자 아기씨도 그때 저희가 사람을 붙여 빼돌려 놓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만날 수 있길 고대하겠습니다.>
그 종이를 모두 읽자마자 잘게 찢어 국에 넣어 종이를 섞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석반을 한구석에 밀어 놓으며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상궁이 중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자, 중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내내 뭔가 하나 걸린다는 듯이, 눈을 게슴츠레 떠 말끝을 흐렸다.
“한데 참 이상하단 말이지…….”
“예?”
“그날 나를 분명 보았다면…… 세자 성격에 날 가만히 뒀을 리가 없어.”
중얼거리던 중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 일 년 전 풍등제를 말씀하십니까?”
“그래. 그날 내가 김 도령과 손을 잡고 가던 것을 세자가 보았다면 날 가만히 뒀을 리가 없지 않으냐? 당장 날이 밝자마자 나를 불러, 전하께 모든 사실을 고해 일의 전말을 파고들었을 테야.”
“……하지만 공격을 받았다고 증언을 했다면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온데.”
“모르지, 그건.”
중전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현장에 있었던 한소진 그년이 세자에게 말해,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꾸몄을 수도 있지. 아니면.”
“아니면요?”
“……불미스러운 일이 세자에게 생겼었다던가.”
어떻게 해서든 이 늪을 빠져나가겠다는 듯, 중전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이라 하시면.”
“그날 공격을 받아 머리를 크게 다쳐, 기억 소실증에라도 걸렸다던가.”
“아!”
“그렇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지 않겠느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세자가 그날 이후로 헛것을 보고 들어 모든 것을 꾸몄다고 뒤집어씌울 수도 있고.”
“……!”
“세자의 또렷하지 않은 기억을 들먹이며 결코, 사실이 아니다. 한소진과 영의정이 나를 해치기 위해 모두 꾸민 일이다……, 둘러댈 수도 있고. 충분히 사건을 뒤집을 수 있지.”
상궁은 그런 중전을 바라보며 감복을 금치 못했다.
“역시, 마마십니다!”
“판은 언제든 뒤집을 수 있다. 그러니 포기는 이르다. 난 반드시 이것을 전화위복 삼아 더한 부귀를 누리며 살 것이야.”
그리고 그때, 옥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문지기 둘이 복통을 호소하며 다른 이들과 자리를 바꾸는 것이 보였다.
“반드시…… 그럴 것이야.”
중전은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 * *
“하하하, 하하!”
“저기 좀 봐! 너무 예쁘다!”
저잣거리는 알록달록한 풍등과 백성들의 웃음으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헤집는 무사들과 헌의 얼굴은 그들과 대비되고 있었다.
무사복을 입은 헌은 언제든 칼을 뽑아 들 자세를 취한 채, 저잣거리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한양을 아직 빠져나가진 못했을 것이다. 백성들 사이에 숨어 있을 것이니 유심히 살피거라.”
일 년 전에도 그들을 쫓아 이 풍등제가 한창인 저잣거리를 헤집고 다녔을 테다.
“쥐새끼 같은 것들……. 악연이 질기구나.”
눈빛을 번뜩이며 저잣거리를 세차게 훑고 있던 헌의 시선에 익숙한 얼굴이 걸렸다.
“소진아.”
소진이 숙자와 함께 열심히 여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살폈다.
거침없이 장옷을 쓰고 있는 여인들에게 다가가 양해를 구하고는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괜한 고생 중인 것 같아, 헌은 여전히 슬픔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하오. 찾는 이가 있어서.”
찾는 얼굴이 아니라 실망하기도 잠시, 그녀는 다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헌은 그런 소진의 앞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른 채, 소진은 열심히 움직였다.
이내 헌이 가만히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앗……!”
놀란 그녀가 어깨를 흠칫 떨며 뒤를 돌자, 반듯한 헌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하.”
“여기서 이리 만나니 반갑다.”
아까 그 일이 있고, 헌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그를 만나니 소진 역시 반가웠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으시옵니까?”
소진은 이제야 그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조심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헌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괜찮아야지.”
“저하…….”
따뜻한 포옹 대신, 소진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포기하지 마요, 우리.”
“…….”
“숙원 마마의…… 한을 풀어드려야지요.”
숙원의 이름에 헌의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고 있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그는 입술을 꽉 악물며 분노를 그리고 슬픔을 꾹꾹 가슴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소진이 그의 팔을 따스하게 그러쥐며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아프더라도 조금만…… 조금만 참으세요, 저하.”
“소진아.”
“저하만 이렇게, 저하의 사람들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그제야 분노로 사색이 되어가던 그의 얼굴이 핏기를 되찾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헌이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언제나 그 곁을 지키겠다는 듯, 소진도 그의 옆을 따랐다.
“그것 아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아무리 괴롭고 아픈 가시밭길이라도.”
“…….”
“너와 함께 걸으면 하나도 고통스럽지가 않아.”
“저하.”
정면을 바라보는 헌을 향해 소진이 고개를 들었다.
날렵한 그의 턱선이 달빛을 받아 오늘따라 더욱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고운 풍등이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수를 놓듯, 아름답게 떠다녔다.
“이번 풍등제는 꼭 너와 즐기고 싶었는데. 이렇게 죄인들을 잡기 위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우리에게는 내년이 또 있지 않사옵니까?”
그때, 저잣거리가 갑자기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궐문 쪽으로 모두 움직여라!”
“궐문을 수호하라!”
저잣거리 곳곳에 배치되었던 포도청 사람들이 일제히 한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백성들도 주춤거리며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냐!”
헌이 달려가는 포도청 사람 하나를 잡아 매섭게 몰아붙였다.
그러자 헌의 차림새를 살피다, 그 주변에 있는 호위대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궐문을 침범하려는 자들이 나타나, 위기라고 하여……!”
그 순간 호위대들 또한, 모두 궐로 달려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소진은 아연실색하며 헌의 팔을 붙잡았다.
“김 도령 쪽 세력이 아예 궐을 공격하려나 봅니다! 서둘러 궐로 가보아야 할 것 같아요!”
윤현 역시,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가는 것을 감지하고는 헌의 명령을 기다렸다.
“궐문을 지키고 있는 세력이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모든 인력을 김 도령을 찾기 위해 저잣거리와 뱃길 쪽에 배치해둔 상태라…… 인력을 모두 모아 궐로 쳐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였다.
저 멀리, 호위대 무리가 허겁지겁 헌을 향해 달려왔다.
“그대들이 어찌!”
궐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무리 중 일부가 대열을 이탈해 이쪽으로 온 것이었다.
“큰일 났사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무사가 궐문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무리입니다. 저잣거리에 포진해 있는 세력을 합세해주십시오!”
“백성들이 힘을 보태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인력이라 이대로라면 곧 궐문이 열릴 것입니다!”
헌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쉽사리 그렇게 하라는 명이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소진과 윤현, 호위대들은 모두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하…….”
하지만 헌은 이것이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부러 숨겨 두었던 군사를 한꺼번에 풀어 궐문으로 향하게 한 뒤 호위대를 혼란에 빠뜨리려 하는 것.
해서 헌이 골고루 배치해두었던 병사들을 모두 궐 쪽으로 오게 만든 다음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타 한양을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함정일 수도 있어…… 이 일을 어찌한다.”
함정이라는 말에 윤현과 소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하면 우선 저잣거리 쪽 세력만 궐문으로 향한다. 나와 윤현, 그리고 한 규수의 호위무사 이 셋만이라도 저잣거리에 남는 것으로 해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 말에 윤현과 소진의 호위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인력으로 넓은 저잣거리 모두를 수색하는 것은 무리일 테였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 방법이 최선이니 어쩔 수 없었다.
헌의 명령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때였다.
“저하…… 저기…….”
무언가를 발견한 소진이 조금 굳은 얼굴로 한 곳을 가리켰고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
뿌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얼핏 보아도 어마어마한 수의 무사들이 무장을 한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헌과 소진을 호위하며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춘 호위대.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민 대감님?!”
민추환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자신의 사병과 함께 나타난 것이었다.
놀란 소진은 그대로 굳어 버렸고 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대들은……!”
“저하. 늦어서 송구하옵니다!”
화론 파 대신 모두가 민추환과 마찬가지로 무장한 모습으로 각자의 사병을 이끌고 등장했다.
그 수는 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저잣거리를 꽉 채우는 병사들 수에 백성들은 전쟁이라도 터진 것인가 싶어,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놀란 헌을 향해 민추환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모두 그를 따라 헌에게 예를 갖추어 허리를 접었다.
“오늘부로 화론 파는 해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