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 반드시 때가 올 것입니다. (118/125)

118. 반드시 때가 올 것입니다.

2021.11.15.

그때는 조 숙원이 헌을 낳고 8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민 소용이 막 보은군의 동생인 둘째를 가져 입덧을 시작했을 때니, 민 소용은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중전마마께서 부르시옵니다.”

왕의 정비(正妃)가 죽고 새 중전이 책봉된 지 달포도 지나지 않았던 날, 새 중전이 민 소용을 찾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민 소용이 중궁전에 당도하였을 때는 조 숙원도 함께였었다.

이미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숙원은 민 소용이 중궁전으로 들어서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오셨사옵니까…… 소용 마마.”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던 조 숙원을 민 소용이 심상찮은 얼굴로 바라봤다.

“중전마마를 뵈옵니다.”

민 소용은 반듯하게 허리를 숙여 자신보다 한참 어린 새 중전에게 절을 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앳된, 새파랗게 어린 중전이었다.

그러자 삐딱하게 앉아 고개만 꼿꼿하게 세운 채, 중전이 민 소용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민 소용의 얼굴을 살피던 중전의 시선이 멈춰선 곳은 민 소용의 아랫배였다.

“회임 유세라도 부리는 건가?”

“예, 예? 마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어찌 아침 문안을 거르느냐 이 말이야.”

“아…….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소인이 근래 입덧이 너무 심해져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 해 내내 누워만 있었습니다. 해서 처소 밖을 조금도 나서지 못하였나이다. 그 때문에 대비마마께도 전하께도 문안을 여쭙지 못하였고요.”

“…….”

“결코, 유세를 부려 중전마마께 문안을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옵니다.”

“그것이 유세지! 입덧 따위가 심해 봤자지, 감히 내명부의 수장인 내게 문안을 걸러?!”

그 말에 중전이 코웃음 치며 그사이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벌벌 떨고 있는 조 숙원을 응시했다.

“숙원?”

“……예?!”

“종아리를 걷게.”

갑작스러운 중전의 말에 숙원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중전은 호통쳤다.

“어허! 어디서 감히 천한 그 얼굴을 들어 국모인 나를 바라보는 것인가!”

“……송구하옵니다!”

“네년 따위가 전하의 장자(長子)를 낳았다고 해서 국모라도 되는 양 싶으냐?!”

“결, 결코 아, 아니옵니다, 마마!”

“대체 내명부의 기강이 어찌 이리 해이한 것이야!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무수리 출신의 천한 네년이 정말, 내명부의 일원이라도 된 듯싶어?!”

숙원이 바짝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지만, 중전을 말릴 수는 없었다.

“기강을 바로잡아야겠다. 나는 전 왕비와는 다르다. 첫째도 품계, 둘째도 품계. 너희와 내 사이의 선을 견고히 해, 내명부의 위상을 드높일 것이지.”

“…….”

“하니 네가 민 소용 대신 회초리를 맞아야겠어.”

“……마마!”

그 말에 민 소용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벌하실 거면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어찌 아무 죄가 없는 조 숙원에게……!”

“자네와 조 숙원이 형님, 아우 하는 사이라며?”

“……!”

“하면 형님을 대신해 아우가 회초리쯤은 맞을 수도 있지. 아니 그러느냐?”

“마마!”

“종아리를 걷거라, 숙원.”

중전은 정말 회초리를 잔뜩 꺼내,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안절부절못하는 민 소용을 바라보며 조 숙원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 소용, 너의 방자함을 엄히 물어 채찍질하려 하였으나 네가 고귀하신 아기씨를 품고 있으니.”

“…….”

“너를 벌하였다가 그 배 속에 있는 전하의 씨가 잘못이 되기라도 하면 아니 될 일이지. 안 그러느냐?”

그 말에 숙원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종아리를 걷었다.

“마마……!”

“닥쳐라. 민 소용, 넌 앞으로 조 숙원과 멀리해야 할 것이야.”

“……!”

“숙원과 소용 사이의 품계 차가 얼마인데 체통도 없이 후궁 말단 따위와 가까이 지내!”

조카뻘 되는 중전에게 모욕스러운 말을 모조리 듣고서도 숙원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종아리를 내놓은 채,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중전은 그런 숙원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 일은! 결코, 중궁전 담을 넘어서는 아니 될 일이야!”

“……윽.”

“만에 하나 전하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 내게 다시 전해지는 날에는.”

“……!”

“너희 두 아들이 모두 무사치 못할 것이야!”

매질하면서 중전은 그렇게 두 여인에게 겁박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표독스러움은 오랜 궐 생활에 찌들어 독이 오른 후궁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숙원……. 미안하네. 미안해.”

두 종아리에 핏빛이 새어 나오고 나서야 중전의 매질이 멈췄다.

민 소용의 부축을 받으며 중궁전을 나서는 조 숙원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조 숙원에게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민 소용은 울고 말았다.

하지만 조 숙원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미안합니까, 마마.”

“……나 때문에 자네가.”

“괜찮습니다. 제가 당연히 마마를 대신해 맞아야지요.”

오히려 민 소용을 위로하며 눈물을 닦아주던 그녀였다.

“울지 마세요. 배 속의 아기씨를 생각하시어야죠.”

“……숙원.”

“보은군 마마 못지않게 영리하고 씩씩한 왕자를 낳으세요, 마마.”

민 소용의 손을 꼭 잡으며 숙원이 그렇게 말했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이 일을…… 절대 이렇게 넘기지 않을 것이야.”

“그러지 마세요, 마마.”

“전하께 알려야겠네. 이 궐에서 전하의 성총을 이길만한 것이 무엇이 있어?”

“…….”

“자네는 누가 뭐래도 전하께서 제일로 아끼는 여인이야. 한데 감히 그런 자네에게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매질이라니. 이것은 중전마마라고 해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야.”

곧장 대전으로 향하려던 민 소용을 숙원이 막아서며 자신의 처소로 끌고 갔다.

“하면 보은군 마마와 우리 헌이 다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숙원.”

“참으세요. 참다 보면…… 기회가 올 것입니다.”

“…….”

“제 처소에 입덧을 조금 가라앉힐 차가 있습니다. 소인이 따뜻하게 달여 드리겠어요.”

조 숙원은 그토록 착하고 어진 여인이었다.

투기도 또한, 욕심도 없는 하해와 같은 아량을 가진 왕의 여인이었다.

민 소용은 그런 숙원이 자신보다 천한 출신이고 한참 아래의 품계를 지녔지만, 늘 동경했고 고마워했고 좋아했다.

하지만 사건은 정말 예기치 못한 순간에 터지고 말았다.

숙원이 중궁전의 처소에 붙들려 가 매질을 당한 지 달포 정도가 지났을 무렵.

일찍 침소에 들었던 민 소용은 흉한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어났다.

“대체 왜 그런 꿈을…….”

숙원의 처소가 무너지는 꿈을 꾼, 민 소용은 뒤숭숭한 마음에 밤길을 나섰다.

곧장 숙원의 처소로 향했던 민 소용은 그만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만 것이었다.

“윽…… 윽……!”

“……!”

조 숙원이 누군가에게 칼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너무 놀란 민 소용은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동행했던 궁녀 역시, 너무 놀라 악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주, 중전마마…….”

숙원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자신을 찌른 상궁의 치맛자락을 힘겹게 붙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끊어질 듯한 숨으로 ‘중전마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상궁은 가볍게 숙원의 손을 발로 밀어내며 비스듬히 몸을 꺾었다.

동시에 먹구름에 가려졌던 달빛이 드러나며 상궁의 얼굴을 민 소용이 확인할 수 있었다.

“……!”

그것은 중전이었다.

상궁으로 변장한 중전이 조 숙원을 해치고 만 것이었다.

“어찌…… 윽.”

“눈엣가시였거든. 네년이.”

“……!”

“내가 너보다 못한 것이 뭐기에, 전하께서 날 거들떠보지도 않느냔 말이야.”

민 소용은 입을 틀어막은 채, 벌벌 떨며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아들 하나 낳았으면 됐지, 또 씨를 받으려고 그렇게 전하의 곁에 달라붙어 교태를 부리느냐?”

“……왜, 왜. 어째서.”

“왜냐고? 네가 없어져야 나도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것 같아서.”

“……!”

“그러니 너무 억울해할 것 없어. 어차피 무수리로 평생 걸레질만 하다가 죽었을 몸. 그래도 성총을 받고 아들도 낳고. 네년 따위가 누릴 수 있는 복은 죄다 누렸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잖아?”

독 같은 말을 뱉어낸 중전은 뒤에 서 있던 자신의 상궁에게 얼른 치워버리라는 듯이 눈짓을 해 보이고 걸음을 옮기자 조 숙원이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약조, 약조하여 주세요…….”

“…….”

“우리 헌……, 헌이 만큼은 지, 지켜주시겠다고요…….”

숙원의 마지막 애원에 중전은 코웃음 쳤다.

그러곤 일어나기 위해 애쓰는 조 숙원을 가볍게 밀어 넘어뜨렸다.

“민 소용이 하는 것 봐서.”

“……!”

“네 형님이 내게 하는 걸 보고 결정하지. 하니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될 네 약조는 못 들어주겠구나.”

바닥에 고꾸라져있던 조 숙원은 연신 일어나려는 듯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 상궁이 숙원의 저고리 속을 헤집어 그녀가 지니고 있던 은장도와 중전의 은장도를 바꿔치기했다.

“그 네 은장도로 자결한 것으로, 너의 죽음은 깔끔히 위장될 것이야.”

숙원의 손바닥에 은장도가 놓였고 곧 상궁과 중전은 그곳을 빠르게 벗어났다.

그리고 민 소용은 속히 조 숙원에게로 달려갔다.

“숙, 숙원……!”

눈물범벅이 된 민 소용은 충격으로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숨이 끊길 듯, 조 숙원이 애처롭게 소용을 올려다보았다.

“마마…….”

“어의를…… 얼른 어의를……!”

“아니요.”

숙원은 소용의 손을 꼭 잡으며, 어의를 부르지 말라고 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

“언젠간 중전마마의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숙원.”

“여기 이것…….”

눈물을 뚝, 뚝 흘리는 소용에게 숙원이 제 손에 쥐었던 은장도를 건넸다.

“중전마마는 언젠간…… 스스로 자멸할 순간을 만들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비틀린 탐욕이 스스로를 무너뜨릴 때가 올 것이어요. 그때, 제 죽음도 밝혀주세요. 이것을 보이면서요.”

그것은 중전의 상궁이 중전의 은장도와 바꿔치기한 숙원의 은장도였다.

한데 어찌 그것을 보여주라고 하는지, 민 소용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숙원의 손을 잡았다.

“이것은 자네의 은장도가…….”

“바꿔치기…… 했습니다, 제가…….”

“……!”

“은장도를…… 바꿀 것 같아 방금, 다시 저의 것과 바꾸어 놓았어요. 이 은장도는 중전의 것입니다.”

그 말과 함께 숙원은 좀 전보다 더 위태롭게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제 처소에…… 처소 서랍에…….”

“숙원, 말하지 말게. 응? 말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어의를 불러올…….”

“어의가…… 쓴…… 일지가 있을 것입니다.”

“……?!”

“전하를 곁에서 모셨던 어의 영감이 쓴 일지가 있는데 그것을 꼭 소용 마마께서 보관하시어요…….”

“숙원!”

“제가 말한 때가 오거든…… 그 일지를 세상에 드러내세요. 하면 중전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던 숙원은 숨이 턱 끝까지 다다른 듯 눈을 감으며 말끝을 흐렸다.

“몸조심하세요, 마마. 그리고 우리 세자, 세자…… 헌…… 헌이를 잘, 잘 부탁…….”

“……!”

그렇게 숙원은 민 소용의 손을 놓고 말았다.

조 숙원은 자결이 아닌, 기구한 죽음을 맞은 것이었다.

* * *

“그 일로, 소인은 유산을 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슬퍼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한 죗값이라고 생각하였거든요.”

“…….”

“조 숙원을…… 그리 보낸 것, 그리고 숙원의 장례가 치러질 때까지 진실을 숨기고 방관한 저의 죗값.”

민 소용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헌은 눈물을 뚝, 뚝 흘리며 민 소용이 지니고 있었던 은장도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정말 ‘김윤희.’라는 중전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미처 그 순간에 숙원이 자신의 은장도와 미리 바꿔치기했을 것이라고 예상치 못하였을 테였다.

“어머니……. 흑…… 흑흑, 어머니…….”

헌은 그 은장도를 꽉 그러쥔 채 연신 어머니를 불렀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소진은 슬퍼하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다,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왕이 부들부들 떨며 민 소용을 향해 물었다.

“하면…… 숙원이 말한 그때가…… 지금이라는 것이냐?”

“…….”

“그 어의…… 일지는 다 무엇이고……?”

왕의 물음에 민 소용이 내내 품고 있던 그 서책을 꺼내 왕에게 건넸다.

왕이 떨리는 손으로 ‘어의 일지’라고 적힌 서책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숙원이 죽던 그해, 왕이 조금씩 정신이 혼탁해져 가던 것을 제일 먼저 깨달은 숙원이 어의에게 따로 부탁해 치료를 맡아 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일지를 어의가 직접 쓴 것들이었다.

왕은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그 일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 장을 읽어보십시오.”

“……?”

“하면 숙원이 말한 때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숨죽인 채, 왕의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이며 얼어 있었다.

그때, 왕이 충격받은 얼굴로 일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그리고 그 일지를 헌이 대신 주워, 마지막 장을 황급히 펼쳐 들었다.

그러곤 믿을 수 없는 말이 쓰인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전하께서는…… 매병 증세를 조금씩 보이고 계신다. 그리고 정신이 혼탁해짐과 동시에.”

“……?”

“음맥(陰脈)이 점점 짙게 나타나고 이는 생식 기능 저하를 뜻하는바, 전하께서는 더는 후사를 보실 수 없을 것이다.”

헌의 목구멍을 타고 흐른 말에 궁인들은 모두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들지 못했다.

뻣뻣하게 굳은 왕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민 소용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후사를 볼 수 없는 전하를 통한 중전의 회임.”

“……!”

“숙원은 그것을 이미 예상하였습니다. 해서 그때를 기다리라, 제게 부탁한 것입니다.”

차마 그 누구도 뱉지 못한 그 말을 민 소용이 내뱉자마자 헌은 허리춤의 칼을 세차게 뽑아 들었다.

“내 어머니의 복수는 내가 할 것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