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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조 숙원의 죽음과……. (117/125)

117. 조 숙원의 죽음과…….

2021.11.12.

하지만 민 소용이 동궁에 도착했을 땐, 애석하게도 헌이 김 도령을 잡기 위해 출궁한 뒤였다.

“전할 것이 있으면 직접 전하겠사옵니다.”

상선이 민 소용을 힐끗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민 소용은 품에 보듬고 있던 서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혹 저하께서 돌아오시거든 내가 줄 것이 있어, 찾아왔더라는 말만 전해주시게.”

“……네, 마마.”

돌아서는 민 소용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연신 뒤를 돌아보던 그녀는 서책을 더욱 끌어안았다.

“대전으로 향하여야겠구나.”

석고대죄를 하기 위해 대전으로 향하는 길.

하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민 소용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였다.

‘이제야 이 무거운 짐을 덜어내오. 미안하오……. 참으로 그대에게 미안하오…….’

* * *

“더는…… 몸을 숨길 곳이 없습니다, 행수 어르신.”

숲에서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김 도령은 한껏 예민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일이 터지고 내내 그는 이 숲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무사들을 밖으로 내보내, 상대 무사들의 수와 동태를 살필 뿐 그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산 아래에서 동태를 은밀히 살피고 온 수족 하나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곧, 이곳도 수색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어찌 하올까요.”

그 말에 무사들이 김 도령을 힐끔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 도령이 검을 꽉 그러쥐며 산 바로 아래에 보이는 궐을 지그시 응시했다.

“겁먹을 것 없다.”

“…….”

“우리는 오늘 밤, 반드시 이 조선을 떠날 것이니까.”

영의정에게 뒷덜미만 잡히지 않았어도 지금쯤, 당당히 조선을 버리고 청국으로 가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을 테다.

물론, 지금 옥에 갇혀 온갖 수모를 겪고 있는 중전 김 씨도 함께.

김 도령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눈빛 또한, 조금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스미지 않았다.

수장(首長)인 그가 주춤하는 기세가 없이 여전히 용맹하게 맞서 싸우려 하자 그의 부하들 역시 포기할 수 없었다.

‘오늘 밤 무조건 한양을 벗어난다.’ 이 목표 하나를 모두 가슴에 새긴 채, 날이 저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김 도령의 명을 받고 궐로 향했던 무사가 황급히 비탈길을 올랐다.

“행수 어르신……!”

들려오는 목소리의 모두 무사를 바라봤다.

“그래, 어찌 되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중궁전의 소식이었다.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김 도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인과 중전마마께서는 옥에 갇힌 채 꼼짝도 못 하고 계시고 부원군 대감과 조 참찬 대감 역시 사가에서 꼼짝없이 갇혀 손발이 묶였습니다.”

“……중전마마께 소식은 전하였느냐.”

“예. 석반(夕飯)을 나를 궁녀에게 서찰을 전했습니다.”

“마지막 기회다.”

“…….”

“중전마마와 부인을 궐에서 빼낼 기회. 그리고 우리 모두 목숨을 부지할 기회.”

“예에…… 행수 어르신.”

“반드시 실수는 없어야 한다.”

“차질 없이 궁녀에게 전달하였고 그 궁녀 역시, 목숨을 걸고 움직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김 도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의를 다지는 그의 뺨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오늘 밤, 저잣거리의 풍등제는 차질 없이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수족의 말에 그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되었다.”

“예? 그것 때문에 저희를 도와주던 포도청 세력이 모두 저잣거리로 배치가 되었습니다.”

“…….”

“해서 오늘 밤, 저희끼리 움직여야만 합니다. 위험이 더 커진 것인데 어찌 잘되었다고…….”

그러자 김 도령은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뗐다.

“포도청, 그 오합지졸 무리는 필요 없다.”

“…….”

“어제도 괜히 그들이 나서서 보은군을 치는 바람에 일만 더 커지지 않았더냐. 쓸데없는 희생은 우리의 발목만 붙들고 늘어질 뿐인데.”

“그 일 때문에…… 세자 저하께서 분노하시어 포도청 사람들을 모두 저잣거리로 빼돌린 것이겠지요.”

“부원군 대감께서는 더 나설 수가 없지만 대신 숙부님께서 숨겨두었던 사병을 더 내어 주실 것이다.”

“예.”

“오늘 밤, 그 세력들을 포함한 모든 세력이 동시에 궐문을 공격할 것이야. 그렇게 되면 뱃길과 저잣거리를 감시하던 세자의 무리가 모두 궐문 앞으로 모여들 것이지.”

말을 이어가는 김 도령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괜스레 그의 무사들은 이 싸움에서 이미 승리를 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됐다.

“그 혼란을 틈타, 궐에서 부인과 중전마마, 그리고 왕자 아기씨까지 모두 모셔올 것이야.”

“…….”

“저잣거리에 풍등제가 열리니 평범한 사가의 부부인 척 위장을 하고 미리 봐둔 뱃길로 갈 예정이다.”

“…….”

“너희는 우리 비밀 경로인 산길을 통해 오도록 하여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세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김 도령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행여나 오늘 밤 사이에 헌이 결단을 내려 중전을 유배라도 보내버리지는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그러지는 못할 것이었다.

대체 그 여인들을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 여전히 중전과 강 씨 부인이 입을 열지 않고 있으니.

헌의 입장에서는 저 여인들이 왜 중궁전에 갇혀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오리무중이기에 섣불리 중전을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가 무조건 자신의 세력과 증거를 모두 잡아, 한꺼번에 처리해버리려는 수를 쓰는 것이라 김 도령은 예상하였으니까.

김 도령은 헌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모두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꼭 한양을 떠나겠다며 의지를 다잡고 있었다.

* * *

날은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다.

저잣거리를 헤집는 헌의 눈길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욱 타올랐다.

“저하……. 궐로 돌아가 조금 쉬시는 것이.”

헌을 곁에서 지켜보던 윤현은 위태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걱정했다.

하지만 헌은 고개만 저을 뿐, 궐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 그런다.”

“저하…….”

“시간을 더 끌어서는 안 돼. 오늘은 반드시 그놈들을 잡아야만 한다.

그때, 저 멀리 누군가가 말을 타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헌은 저잣거리 이곳저곳을 훑어보다, 문득 시선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호위대는 경계 태세를 갖추고 헌을 비호하기 시작했다.

“한…… 규수?”

그런데 호위무사와 함께 말을 탄, 소진의 모습이 보였다.

당장 헌은 쥐고 있던 칼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여긴 어찌……!”

소진이 호위무사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리며 쓰고 있던 장옷을 벗었다.

“저하…… 서둘러 궐로 돌아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

걱정스럽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진을 향해 헌이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낮고도 다정했다.

“민 소용 마마께서…… 아무튼, 저하께서 직접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민 소용이라는 말에 헌이 잠시 머뭇거렸다.

“보은군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이냐.”

가라앉은 헌의 목소리에 그녀는 그의 팔을 살며시 그러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민 소용 마마께서 꼭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아요. 한데 저하께서 그것을 꼭,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궐을 나오기 전, 아침에 중전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던 민 소용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알겠다. 서둘러 가자꾸나. 너는 궐에서 나오는 길이냐?”

“예. 봉희와 함께 있다가, 아버지께서 저하를 모셔 와야 할 것 같다고 하시어. 아, 그리고 오는 길에 대전 소식을 들었는데.”

“대전 소식?”

“전하께서 깨어나신 것 같습니다.”

그날, 그렇게 한바탕 큰일을 치르고 난 후 쓰러졌던 왕은 내내 깨어나지 않았다.

어의의 말로는 기력을 소진하여 깊은 잠이 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왕이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윤현을 돌아보았다.

“난 한 규수와 궐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예, 저하. 속히 환궁하시옵소서. 저잣거리는 저희가 둘러보고 있겠습니다.”

“포도청 움직임은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 역시 걱정하지 마십시오. 꽉 쥐고 있습니다.”

“그래. 하면 다녀오겠다.”

윤현과 호위대의 인사를 받으며 헌은 소진이 타고 온 말을 올려다보았다.

소진의 호위무사가 한 걸음 물러나며 비켜서자 헌이 말 위로 가볍게 올랐다.

그러곤 소진에게 손을 내밀며 얼른 올라오라는 듯한 고갯짓을 해보였다.

“하면…….”

그녀가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고, 이내 헌이 그녀를 한 손으로 잡아 말 위에 앉혔다.

“속도를 좀 낼 것이야. 고삐를 꽉 붙잡거라.”

“예, 저하.”

헌이 소진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녀와 밀착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틈 없이 좁혀졌다.

소진은 자신의 등에 닿는 딱딱하고도 따뜻한 그의 가슴에 괜스레 몸을 웅크리게 됐다.

고삐를 꼭 그러쥔 소진의 손 위로 헌의 커다란 손이 포개졌다.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뜨겁게 응시했다.

* * *

“전하, 부디 소첩을 소용(昭容)에서 폐하여 주시옵고 엄벌을 내려주시옵소서!”

멍석 위에 소복을 입은 민 소용이 고개를 조아린 채, 대전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뉘엿뉘엿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조금씩 깔릴 때쯤이었다.

궁인들이 민 소용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수군덕거렸다.

“대체 소용 마마께서 왜 저러시는 걸까?”

“그러게…… 우리 소용 마마만큼 조용하시고 인자하신 분이 어디에 있다고.”

“가엾은 소용 마마…… 보은군 마마를 지키려고 저러시는 걸까?”

숙덕이는 궁인들을 헤집고 드디어 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헌이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대전을 향해 석고대죄하고 있는 민 소용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곁에는 소진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세자 저하 납시오……!”

내관의 목소리가 넓은 대전을 꽉 채웠다.

동시에 대전을 지키고 있던 모든 궁인의 고개가 반듯하게 숙였다.

그리고 경건하게 석고대죄를 하고 있던 민 소용이 슬며시 헌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찰나에 부딪혔고, 굳게 닫혀 있던 대전의 문도 그때 열리고 있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그 말에 헌을 바라보고 있던 민 소용도, 그리고 이쪽으로 향해 오고 있던 헌도.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왕 쪽으로 고개를 조아린 채, 반듯하게 섰다.

“대체…… 이것이 다 무슨…….”

왕은 상선의 부축을 받으며 피폐해진 모습으로 그들의 앞에 섰다.

“전하…….”

그러다 석고대죄 중인 민 소용을 참담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돌계단을 툭, 툭, 내려왔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왕을 바라보다 다시금 헌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첩, 씻지 못할 죄를 두 분께 지었나이다.”

“……씻지 못할 죄라니.”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민 소용이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감히, 전하의 여인이었던 조 숙원.”

“……!”

“숙원의 죽음을 좌시하였나이다.”

조 숙원이라는 이름에 놀라기도 잠시, 곧바로 이어진 민 소용의 말에 왕은 그만 몸을 휘청이고 말았다.

저 멀리서 민 소용의 고백을 가만히 듣고 있던 헌의 얼굴에도 무자비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무언가에 홀린 듯, 헌은 점점 민 소용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소진은 그런 헌을 차마 잡지 못한 채,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민 소용.”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왕은 황급히 민 소용의 양팔을 그러쥔 채 소리쳤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바른대로 고하지 못해?!”

“조 숙원이 죽던 날…… 그곳에 소첩이 있었나이다.”

“……!”

“조 숙원의 의문사는…… 자결이라 잠정적으로 결론이 지어져 속히 숙원의 장례가 치러졌지만. 숙원은 자결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주어 말하는 소용.

왕은 그대로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고 헌은 민 소용에게 달려들어 울부짖었다.

“하면 누가!”

“…….”

“누가 내 어머니를 죽인 것입니까! 대체 누가!”

처절한 헌의 울부짖음이 대전 공기를 갈랐고 민 소용은 눈물을 뚝, 뚝 흘리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은장도였다.

“……이것이.”

그것을 헌에게 내밀며 민 소용은 바닥에 이마가 닿으라 허리를 굽혔다.

“그 은장도의 주인이…… 조 숙원을 죽였사옵니다!”

헌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해서 이 은장도의 주인이…… 누구란 말입니까.”

당장이라도 그자를 잡아 목이라도 베어낼 기세로, 헌이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러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던 민 소용이 헌과 같은 눈빛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중전…… 김 씨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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