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마지막 발악.
2021.11.08.
―어찌…… 하시려고요. 만나서 따지기라도 할 요량입니까.
―갚아주려 합니다.
―갚아주려 하다니요.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지요. 잠깐이면 됩니다. 중전마마를 뵙게 해주십시오.
―갚아주는 것도, 돌려주는 것도 내가 하겠습니다.
―아니요. 저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힘써주세요.
―…….
―백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죗값을 치르게 해주세요. 저는…… 보은군의 어미로서 중전마마에게 받은 것을 돌려줄 것입니다.
헌은 불같이 타오르던 민 소용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저하…….”
민 소용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민 소용 마마께서…… 중전마마를 왜…….”
두 사람이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잠시 물러나 있었던 소진이 헌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조심스레 그에게 물으며 어둑해진 그의 안색을 살폈다.
“되돌려 준다는구나.”
“예……?”
“중전에게 보은군을 다치게 한 책을 물을 참인가 보구나.”
“……옥에 갇힌 중전마마에게 그 죄를 어찌 물으시려고.”
소진도 덩달아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녀 역시, 민 소용이 사라진 문 쪽을 돌아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서…… 만날 수 있게 허락을 해주신 것입니까?”
그녀의 물음에 헌은 멍하니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보호해야 할 가치도 없는 중전이 아니더냐.”
“……예에.”
“보은군이 저리 누워 있어, 내 마음도 착잡한데 민 소용의 마음은 오죽하겠느냐. 중전을 만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심정이겠지.”
“…….”
“민 소용이든, 보은군이든…… 볼 면목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구나. 김 도령을 여태 잡지 못하고 있으니.”
“저하.”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의 헌을 소진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이따, 다시 나가보아야겠다.”
자신을 응시하는 소진의 눈빛이 느껴졌는지, 그가 시선을 내려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걱정 가득한, 소진의 얼굴을 바라보던 헌이 피식 웃었다.
염려하지 말란 뜻이 담긴 미소였다.
“오늘은…… 저잣거리가 꽤 번잡할 것입니다.”
오늘은 연등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꼭 일 년이 지난 지금이었다.
“밤에 연등제가 열린다고 하지.”
“예. 일 년 행사라…… 미룰 수도 없겠지요?”
“미꾸라지 하나 잡자고 백성들이 기다려온 연등제를 미룰 순 없지.”
“참, 포도청 사람들은요?”
“김 도령을 도운 적이 없다, 딱 잡아떼고 있기는 한데.”
“…….”
“오늘 밤에는 꼼짝하지 못하도록 통제를 해둔 상태다.”
“그래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 도령을 돕는 데에 사람을 보태지 않을까요?”
어제 새벽, 보은군과 자신을 습격한 무리는 끝까지 포도청과는 연관이 없는 자들이라고 했지만.
헌은 단번에 그들이 포도청과 관련이 있는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동이 트자마자 포도청 사람 모두를 오늘 밤, 저잣거리에 배치하여라 명을 하였다.
안전하고 건강한 연등제를 위한다는 구실을 삼아 포도청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할 테면 하라지. 보은군의 무사들까지 힘을 보태었으니…… 오늘 밤에는 꼭 잡을 것이야.”
헌의 말에 소진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살며시 내의원을 나와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착잡한 마음과 달리 햇살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진이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채, 말없이 헌을 따라 걷기만 했다.
그때, 헌이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진의 눈이 예민하게 커졌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반듯한 헌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이곳은 괜찮다. 병자와 약재를 돌보는 곳이라 정해진 궁인 외에는 인적이 드문 곳이거든.”
“……예.”
소진이 입술을 살며시 맞다물며 그와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결국, 민추환 대감께서는 사병을 내놓지…… 않은 것이지요?”
헌이 슬쩍 미소를 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더는 누구에게 기대거나 바라지 않을 것이다.”
“상심하지 마세요……. 마음만은 돕고 싶을 것입니다. 다만, 남은 화론 파 대신들을 위해서 어쩌실 수 없는 것이겠지요.”
“보은군 한 명으로 족하다.”
“…….”
“모두를 내 편으로 삼을 수는 없어. 내내 다른 길을 걷던 영의정 대감이 나의 편으로 돌아선 것만 해도 나는 만족한다.”
헌의 미소를 잠자코 바라보던 소진이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동그란 이마 위로 반짝이는 햇살이 보드랍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아버지가 저하께 큰 힘이 된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서로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은 모처럼 슬픔을 지워낸 얼굴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둘 사이로 피어오르는 따스한 햇볕이 오래도록 반짝거렸다.
* * *
“민 소용…… 마마?”
세찬 민 소용이 걸음이 우뚝 멈춰선 곳은, 한 철창 앞이었다.
그 안에는 소복을 입은 중전이 고고하게 턱 끝을 치켜들고서 눈을 감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살기가 도는 눈을 하고서 삐딱하게 중전을 내려다보는 민 소용을 발견한 중궁전 상궁이 조금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궁 역시, 중전과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주, 중전마마……. 민 소용 마마께서…….”
중전이 살며시 눈을 떠,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는 민 소용을 올려다보았다.
“왜.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중전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져 있지 않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금세 부러질 듯, 온몸에 힘을 잔뜩 준 채 꼿꼿하게 앉아 있는 중전이었다.
그 모습에 민 소용이 당의 안에 넣고 있던 손을 풀어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곤 슬며시 무릎을 굽혀 중전과 시선을 수평으로 맞추었다.
“내 아들을 건드렸다지.”
민 소용의 말에 중전이 피식, 조소했다.
“그래. 네 아들이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은 들었다. 해서 따지기라도 하려고?”
“옥에 갇힌 네 따위에게 잘잘못을 따져 무엇하겠느냐.”
지금까지와 달리 하대를 하며 중전을 우습게 여기는 민 소용의 태도에 중궁전 상궁이 버럭 소리쳤다.
“중전마마께 예를……!”
그러자 민 소용이 곧바로 소리쳤다.
“주둥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기 전에, 그 입 닥치지 못해?!”
“……!”
“뉘가 중전마마고 뉘에게 예를 갖추어!”
“……저, 저!”
“이곳에서까지 중전마마 놀이나 하고 있는 것이냐?”
민 소용의 세찬 시선이 곧, 중전에게 꽂혔다.
“아들이 생사를 오간다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한데 어쩌느냐? 내 뺨이라도 내려치고 싶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여기에 갇혀 있어서.”
“…….”
“그렇다고 내 아드님을 똑같이 만들어 주고 싶겠지만, 그마저 변변치 않으니. 그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어째?”
“왜 네 아들은 무사할 것이라 장담하는 것이지?”
중전의 비아냥거림에 이번에는 민 소용이 코웃음 치며 물었다.
“감히 후궁의 소생 따위에 내 아드님을 견주느냐?”
“후궁의 소생이라…….”
“비록 내가 지금은 죄인 신분으로 이곳에 갇혀 있을지언정.”
“…….”
“내 아드님은 왕실의 일원이다. 왕의 핏줄이며 국모인 정실의 왕자이다.”
“…….”
“한데 누가 건드려. 감히 고귀한 피가 흐르는 왕자를 누가 건드리냐는 말이다!”
철창 안을 쩌렁쩌렁 메우는 중전의 고함에 민 소용이 쯧쯧 혀를 찼다.
“오늘 밤이 지나고.”
“……?”
“동이 텄을 때도, 네가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뭐?”
“차라리 지금 내게 싹싹 빌며 내 아들만큼은 살려달라, 청이라도 할걸…… 후회하지는 않을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중전의 목소리가 잔뜩, 낮아졌다.
민 소용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감히 네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뭐……?”
“어쩌면 이 순간이 네가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
“네 아들을 끝까지 지킬 수 있으리라는 착각은 할 수 있는 순간이니까.”
그 말에 중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철창을 거세게 그러쥐었다.
“너.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왜.”
“…….”
“내 아들이 당했던 것처럼 네 아들의 몸에 칼이라도 꽂을까 봐?!”
“닥치지 못해?!”
“뭐…… 그편이 나을 수도 있겠구나.”
“……!”
“칼에 베인 상처는 치료하면 되는 법. 물론, 생사는 운에 맡겨야겠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민 소용이 돌아섰다.
“분명히 경고하였었다. 좌시하고 있는 것은 내 사람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민 소용.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야. 똑바로 말하지 못해?!”
“방관하고 좌시한 나의 죄 역시 무겁겠지만, 너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면 함께 나락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민 소용이 중전을 돌아보더니 피식, 조소했다.
비틀리는 그녀의 입매가 잔인하기만 했다.
“미안한데 나는, 이제 더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나도 내 죄의 값을 달게 받을 테니 너도 네가 지은 죄…… 모두 짊어져야 할 것이야.”
“…….”
“다만 너 따위는 달게 받을 가치도 없어. 아주 쓰고 고통스럽게 죗값을 치르도록 하여라.”
그리고 민 소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감옥을 나섰고 남겨진 중전은 찢어지는 고함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민 소용……!”
분을 이기지 못한 듯 그녀가 연신 철창을 맨손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상궁은 황급히 그런 중전을 제지하며 울먹거렸다.
“마마, 마마! 그러다 다치시옵니다! 마마!”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중전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아들…… 내 아들은……! 나 같은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돼……!”
그렇게 읊조리며 중전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상궁이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중전에게 속삭였다.
“김 도령께서…… 반드시 오늘 밤, 데리러 와주실 것입니다. 마마.”
“…….”
“하니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아직 김 도령께서 한양에 숨어 계시지 않습니까.”
“민 소용이 대체 왜 저딴 소리를 한 것인지…… 불안하기만 하다.”
“……마마.”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 이곳을 나가야만 해.”
아직 김 도령의 세력이 헌에게 생포 당하지 않았으니.
얼마든지 궐의 사람들을 이용해, 중전을 밖으로 빼낼 수 있을 것이었다.
“마침 오늘이 연등제가 열리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 오늘이 아니면 아니 된다. 저잣거리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반드시 오늘, 내 아들과 청국으로 건너갈 것이야.”
의지를 태우는 중전의 얼굴은 민 소용이 남기고 갔던 말 때문인지, 파리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지푸라기를 움켜쥔 그녀의 손등 위로 벌건 피가 새어 나왔다.
“저녁밥을 주러 오는 궁녀가 김 도령의 소식을 전해올 것이라 하였습니다……. 김 도령께서 방도를 마련하였으면 필시 궁녀에게 소식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상궁이 그녀의 손등을 제 치맛자락을 뜯어 감싸며 중얼거렸다.
혹, 이런 일을 대비해 김 도령이 미리 손을 써둔 것이었다.
연신 입구 쪽을 바라보는 중전의 낯빛이 초조함으로 굳어져 갔다.
* * *
“마마…… 마마!”
민 소용은 석고대죄할 준비를 하고서 처소를 빠져나왔다.
소복 차림으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그녀가 처소를 걸어 나오자, 민추환이 황급히 말렸다.
“마마! 아니 됩니다! 보은군 마마를 살리셔야지요!”
“살리기 위해 이러는 겁니다.”
“대체 마마께서 무슨 죄를 지었다고……! 석고대죄를 한단 말입니까!”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민 소용은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김 도령이 여태 잡히지 않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주춤하였다가는 중전이 미꾸라지처럼 죄의 그늘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말리는 민추환의 손을 뿌리치며 민 소용이 눈물을 닦아냈다.
“방관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께도 말 못 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요! 전하께 아뢰기 전에, 이 아비에게 먼저 고하세요.”
애원하며 민추환이 다시금 민 소용의 손을 잡았는데.
민 소용은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마른 침만 삼키고 있었다.
그녀의 볼이 뜨거운 눈물로 하염없이 적셔져 갔다.
쉬이 말문을 떼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민추환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속이 타들어 가는지 민추환은 발을 동동 구르며 민 소용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민 소용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청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지금이라도 저하께 사병을 바치세요. 김 도령을 잡는 데 일조하세요.”
“……마마!”
“그리고 화론 파를 해산시키세요.”
“어째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보은군 마마를 지켜줄 세력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민추환의 말에 그녀는 느리게 도리질했다.
“우리 보은군은 온몸으로 세자의 사람이 되겠다고 증명해 보였습니다.”
“…….”
“한데 왜 그렇게 화론 파를 고집합니까.”
“하지만…….”
“그리고 저하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민 소용의 고백에 그녀를 쥐고 있던 민추환의 손이 툭, 떨어졌다.
“저하와 전하께 씻지 못할 죄를 지은 몸이기에 더는 그분들과 맞설 수 없습니다.”
“……마마.”
“지금까지는 그 죄를 숨기면서 살아왔기에 아버지의 행보를 막아서지 않았지만. 이제 스스로 죄인이 되기로 한 이상, 더는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웬 서책 같은 것 하나를 품에서 꺼냈다.
그러면서 자신의 뒤를 따르는 상궁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전으로 가기 전에…… 동궁으로 먼저 가자꾸나.”
“……어찌.”
“저하께 드릴 것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