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이제는 저희가 지킬 것입니다.
2021.10.29.
소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뜻밖의 말은 모두를 굳어버리게 했다.
지목당한 중전도 그리고 끌려가던 강 씨도.
이를 지켜보고 있던 궁인들도 헌의 명령을 따르던 무사들도.
모두 같은 얼굴로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눈동자를 굴려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제일 당황한 건 헌과 소진이었다.
“……강 씨 부인이 누구라고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헌이 물었다.
소진을 마주한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고 소진은 이 이상하고도 잔뜩 흐린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듯한…… 이 이상한 반응들은 무엇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소진이 손을 들어 호위대에게 끌려가던 강 씨가 아닌, 중전 김 씨를 지목했다.
“이…… 여인이요.”
그녀의 손이 정확하게 중전 김 씨를 가리켰다.
순간,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던 중전이 처음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네 이년!”
소진의 말에 크게 동요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중전.
그녀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있었다.
난데없이 자신을 향해 ‘네 이년’이라고 욕하는 중전을 바라보며 소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망발을 하는 것이야!”
중전의 반응에 그제야 소진의 머릿속에도 불이 번쩍 켜지는 것 같았다.
‘설마…… 이 여인이 중전마마?!’
중전과 스칠 일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 없었던 소진이었다.
그래서 궁인들과 중전의 이런 반응에 소진의 눈앞이 새하얘졌다.
“혹…… 중전…….”
놀란 그녀가 파리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데, 헌이 소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내 그가 다급하게 소진에게 되물었다.
“참입니까?”
“예?”
“참으로 이 여인이 그날 밤 보았던…… 김 도령의 부인이란 말입니까?!”
저 멀리 서 있던 영의정도 경악하며 소진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면서 그 역시 헌과 마찬가지로 황급히 그녀에게 따져 묻고 있었다.
“대체 그것이 무슨 말이냐, 소진아.”
“……아버지.”
“똑바로 다시 보거라. 그날의 기억이 조금도 틀려서는 아니 돼!”
행여 소진의 이 발언이 실수일까 봐.
잘못된 기억으로 감히 왕의 여인인 중전을 외간 사내, 그것도 수배령이 내려진 죄인의 여인으로 지목했을까 봐.
소진의 손이 중전을 가리키자마자 영의정의 등골이 오싹해지고 말았다.
“낭자……. 잘 보셔야 합니다.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헌 역시 소진이 위기에 처할까,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실수여서는 안 된다고.
절대, 그대가 잘못 본 것이면 아니 된다고.
잔뜩 깊어진 헌의 눈빛이 소진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헌과 영의정의 반응에 소진은 다시, 중전을 바라봤다.
부들부들 떨며 자신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마주하며 소진이 입을 열었다.
“그날 밤 제가 본, 김 도령과 손을 잡고 가던 여인은.”
“……!”
“이분이 맞습니다. 확실합니다. 한데…… 혹 이분이 중전마마인 것 입니까?”
똑 부러지는 소진의 대답에 중전이 다시 한번 더 그녀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닥치지 못해?! 감히 전하의 여인인 내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행하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하지만 위협적인 중전의 포효에도 소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좀 전보다 더 태연하고 덤덤한 모습으로 중전을 똑바로 직시했다.
“송구하오나.”
“……?”
“중전마마라고 하시어도 제 대답은 변함이 없습니다.”
“뭐, 뭐?!”
“제가 그날 본 분이 중전마마가 맞습니다.”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동시에 강 씨 부인을 끌고 가던 호위대가 그녀를 놓고 헌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진은 중전을 빤히 바라보다가, 헌을 향해 등을 돌렸다.
소진의 대답에 심란해진 그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입술을 악물었다.
“……하면 그날 밤 내가 쫓은 것이.”
그제야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김 도령의 얼굴을 보아도, 그의 부인이라는 강 씨 부인을 보아도 대체 자신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인데.
일 년 전, 자신이 왜 그들을 미친 듯이 쫓다 공격을 받은 것인지.
좀처럼 이해되지 않던 자신의 행동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그럼 내가 그날 밤…… 중전의 밀회라도 봤다는 것인데.’
아직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더는 그 기억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됐다.
지금까지는 잃어버린 기억 속 그날, 자신이 왜 저 둘을 쫓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반드시 기억을 되찾아야만 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강 씨 부인이 아닌 중전 김 씨라면.
자신이 당연히 그 두 사람의 뒤를 미친 듯이 뒤쫓았을 테니까.
“그랬군…… 그래서…… 그날 그랬었군, 내가.”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헌을 바라보며 소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면 이제 어찌…….”
그 순간, 중전이 소진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채며 고성을 질렀다.
“네년 한 명의 말만으로 그것이 사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그러자 헌이 곧바로 중전의 손을 제지하며 맞받아 소리쳤다.
“한 명이 아닙니다!”
“뭐요?!”
“그날 밤, 김 도령과 중전 김 씨가 함께 있는 것을 본 이가 한 규수 말고 또 있다면요.”
“……?!”
“인정하겠습니까?”
생각지도 헌의 말에 이번에는 소진이 화들짝 놀랐다.
‘기억이…… 돌아온 것입니까?’
헌을 빤히 올려다보는 소진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내 성난 얼굴로 중전의 손을 쳐내던 헌이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보았지요.”
“……뭐라고?”
그제야 영의정이 한 시름을 놓은 듯, 파르르 떨며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그날, 잠행을 나갔다가 웬 낯선 사내와 두 손을 꼭 붙들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중전 김 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 뒤를 쫓았지요. 한데 의문의 공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나는 쓰러졌고, 둘은 곧장 애월루가 있는 쪽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헌의 증언까지 이어지자 추국청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중전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니 그날, 그쪽 무사가 웬 사내 하나를 공격해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는 전달받지 못했나 봅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아니? 한 규수의 증언과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미 그대는 알고 있습니다.”
“거짓이야! 누구를 능멸하는 것이야, 누구를!”
“어차피 진실은!”
“……!”
“그대와 나 둘만 알면 될 일. 그리고 더욱이 내가, 알아야 할 일! 그 진실을 이제 내가 알았으니 그대와 김 도령의 변명과 거짓말 따위는 내게 중요치 않은 것입니다.”
점점 더 중전과의 거리를 좁혀가던 헌은 그녀를 더욱이 압박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전하의 승은을 입은 귀한 몸으로…… 외간 사내와 내통(內通)한 그 죄는, 그대가 저지른 그 어떤 죄의 무게보다 무거울 것입니다.”
그리고 헌은 다른 말 없이, 고갯짓 한 번으로 중전을 포박시켰다.
그가 까딱 고갯짓을 해 보이자 호위대는 기다렸다는 듯 중전의 양 팔을 압박해 끌고 갔다.
끌려가는 내내 중전은 모함이다, 함정이다는 말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헌의 검은 눈동자가 그런 중전의 뒷모습을 빤히 쫓았다.
그러다 한쪽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중궁전 밀실에서 나온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오. 그대들이 받아야 했던 고통과 아픔, 그리고 느껴야만 했던 두려움과 상실감을 저들에게 반드시 갚아 주겠소.”
소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는 헌을 젖은 시선으로 한참 바라보다 반듯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저 여인들이 머무를 만한 처소를 알아보거라. 김 도령을 생포해 얼굴을 확인할 때까지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예, 저하.”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소진이 헌에게 가까이 다가가 청했다.
“저하, 저 여인들과 함께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저 여인들과요?”
“오늘 밤만이라도요. 물을 것도 많고 들을 이야기도 많을 것 같습니다. 죄인들을 심문할 때 유용하게 쓰일 증거나 김 도령의 은신처 같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녀의 말에 헌이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힘써주겠소?”
“물론입니다. 그리고 보은군 대감께서도 선뜻 힘을 보태겠다 하시었습니다.”
“……민 대감은.”
“그분의 뜻은 아직……. 하지만 보은군 대감께서 꼭 민 대감까지 설득시키겠다 하였으니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소진의 따뜻한 목소리가 혼란스러운 헌의 가슴을 진정시켜 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래도록 소진을 품에 안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철석같이 김 도령의 부인이 강 씨 부인일 것이라 믿었던 헌은 그 존재가 중전 김 씨라고 하니 날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애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단 말은 하지 마셔요. 이 지옥을 함께 헤쳐 나가주셔서 오히려 소인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헌은 애써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기억이…… 돌아온 것입니까?”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소진이 은밀히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띤 채 천천히 도리질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됐습니다.”
“예……?”
“내가 그날 왜 김 도령과 강 씨 부인을 쫓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반드시 기억을 찾아야만 했지만.”
“…….”
“이젠 그 이유가 사라졌지 않습니까. 중전과 김 도령의 밀회를 목격했기에 둘을 미행한 것이 되었으니까.”
소진 역시, 그의 손을 꼭 잡고서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그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없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조금 더…… 버텨요, 우리.”
그를 안아주는 대신 소진은 그 말을 남기고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봉희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그녀가 막 등을 돌렸는데.
등 뒤에서 헌의 은밀한 지시가 들려왔다.
“김 도령을 직접 잡으러 나가야겠습니다.”
그 말에 소진이 걸음을 멈추고 헌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헌이 영의정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추국청은요.”
“보은군이 무사를 보내온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호위대들에게 추국청을 맡기고 저는 보은군과 함께 아무래도 저잣거리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하께서 직접 움직이시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안 됩니다.”
영의정의 만류에도 헌은 굳은 의지를 다졌다.
“직접 잡고 싶습니다.”
“…….”
“절대, 한양을 빠져나가 몸을 숨기지 못하도록 내 손으로 잡고 싶습니다. 병상에 계신 아바마마를 농락한 두 벌레를 반드시 잡아, 아바마마 앞에 무릎을 꿇릴 것입니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헌의 말을 듣던 소진의 가슴도 착잡해졌다.
자신이 목격한 것이 조선의 국모인 중전의 밀회 장면이었다니.
당시에는 몰랐던 진실을 일 년이 지난 지금에야 알게 된 소진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그때, 헌이 서둘러 환복하고 궐을 나서려 몸을 움직이는데.
“저하…… 궐문 앞에…….”
저 멀리서 내관이 허겁지겁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소진도 그리고 헌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 내관을 바라보았다.
“아휴…… 큰일이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궐문 앞에…… 아휴, 일단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급해 보이는 내관의 얼굴에 헌이 서둘러 무사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고 소진도 그 뒤를 따르기 위해 봉희에게 다가갔다.
“봉희야, 우선 상궁 마마님들을 따라서 처소에 가 있어.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금방 올게.”
“몸조심해야 해, 알았지?”
“알았어.”
소진은 멀어지고 있는 헌의 뒤를 빠르게 따랐다.
그녀의 등 뒤로 영의정와 봉희의 걱정스러운 눈길도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으며 헌과 소진이 한참 달려 궐문 앞에 도착했는데.
“자리를 단단히 지킵시다!”
“결코, 물러나선 아니 되오!”
궐 담을 타고 흐르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헌과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다 무슨…….”
약간 겁에 질린 소진이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두 손을 모았다.
벌써 김 도령의 무리가 궐문 앞을 장악한 것인지.
심상찮은 소란에 점점 긴장감이 궐문 뒤에 서 있는 헌과 소진의 무리에게 퍼져가고 있던 그때.
헌이 검을 꽉 그러쥐며 무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궐문을…… 열어라.”
그 말과 동시에 무사들은 헌을 보호하는 구도로 섰고 헌은 소진을 자신의 뒤로 꼭, 숨겼다.
“궐문이 열리면…… 반드시 안쪽으로 달아나야 합니다, 낭자.”
팽팽히 날 선 기운이 궐 안을 휘감았다.
그리고 곧 무장한 무사 하나가 궐문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굳게 잠긴 궐문을 휙 열어젖혔는데.
“……?!”
“……!”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헌과 소진의 눈이 커지고 말았다.
“아, 아니…….”
궐문 앞에는 김 도령의 세력이 아닌,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곡괭이와 낫, 호미 등을 손에 쥔 채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궐문이 열리자 잔뜩 굳은 얼굴로 모두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대들이 어찌…….”
놀란 헌과 소진은 말문이 막혔다.
곧, 내관의 외침이 긴장한 채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두 세력을 하나로 만들었다.
“세자 저하시다! 모두 예를 갖추어라!”
백성들은 헌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저하!”
“이젠 저희가…… 저하를 지켜 드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희 식솔을 구해주셨으니 저희가 궐을 지키겠습니다!”
하나가 되어 포효하는 백성들의 아우성에 헌과 소진의 가슴은 동시에 뜨거워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