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 일 년 전, 그날 밤. (112/125)

112. 일 년 전, 그날 밤.

2021.10.25.

“뭐? 사병을?! 절대 아니 됩니다, 절대!”

소진의 예상대로 민추환은 보은군의 말에 펄쩍펄쩍 뛰었다.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사색이 된 얼굴로 사방을 살피는 민추환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아무리 저하께서 지금 상황이 급해 대신들의 사병을 눈감아 준다고 해도.”

“…….”

“엄연히 그것은 전하의 권한에 맞서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나아가 반역의 씨앗이 될 수도 있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궁전의 악행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신단 말입니까.”

“모르는 척이 아닙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연관이 되어 있었던 일도 아니고.”

“…….”

“화론 파 대신들은 물론이고 나 역시, 아예 몰랐던 일이니 지금 와서 나서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민추환의 말에도 보은군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면만 바라본 채, 입술도 달싹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민추환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마마.”

“…….”

“마마…… 어찌 그리.”

“애초에 그 일에 제가 개입되어 있었다면.”

“예?!”

“사병을 내어 주실 것입니까?”

보은군의 말에 민추환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불쑥 솟는 불안함에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며 그에게 물으려던 찰나.

바깥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마마…… 보은군 마마……!”

내관의 부름에 달싹이던 민추환의 입술이 맞물렸다.

보은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관의 부름에 대답했다.

“무슨 일이냐.”

“저 그것이…….”

내관이 안채로 들어서며 곤란한지 미간을 구겼다.

그의 표정에 민추환이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니, 화론 파 대신들이 어느새 이곳까지 도착해 있었다.

“아니…… 어찌!”

놀란 민추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르르 몰려온 대신들을 바라봤다.

“대체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대감, 말 좀 해보세요! 중전마마께서 백성들을 납치, 감금했다니요!”

“영의정 대감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러다 저희까지 모두 불똥이 튀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늦은 밤이었지만, 중대한 일이 터진 만큼 대신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들의 아우성에 민추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마만 감쌌다.

그러자 대신들은 더욱 소리를 높이며 민추환의 앞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찌하실 겁니까? 영의정 대감도 저렇게 된 마당에…….”

“아니 영의정 대감도 참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어찌 지금껏 꼭꼭 숨겼다는 것도 괘씸한데. 그것을 우리가 아닌 세자 저하께 제일 먼저 알리다니요!”

“맞습니다. 어찌 됐든 중전마마 역시 화론 파의 일원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으면, 우리와 먼저 상의를 해 일을 어찌 해결한 것인지를 정해야지. 곧바로 저하와 손을 잡고 중궁전을 치다니!”

대신들의 아우성을 보은군은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외침에도 보은군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를 먼저 배반한 것은 영의정이라고요! 살기 위해, 우리를 배반하고 수론 파에 붙은 것입니다!”

“그래요. 이참에 영의정도 중궁전도 모두 화론 파에서 내쳐야 합니다. 지금 세자 저하의 입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는데. 이러다 저희 모두가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결단을 내려주시지요, 민추환 대감. 이번 일에 아예 손을 떼고 영의정 대감을 화론 파에서 내치십시오.”

“저희는 이미 영의정이 화론 파를 이끌 자격을 상실했다고 보고 민 대감께 우리의 운명을 맡길 것입니다!”

민추환의 어깨가 무거워졌고 동시에 보은군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 대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저희의 운명은 보은군 마마에게 달려 있사옵니다.”

“자칫하다가는 우리 모두가 중궁전과 함께 몰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에 연루도 되지 않았는데, 그 죄를 함께 뒤집어쓸 수도 있다고요!”

그러자 민추환이 결심한 듯 등을 돌려 보은군을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로 대신들만 바라보고 있는 보은군을 향해 민추환이 고개를 숙였다.

“마마……. 이제 우리 화론 파의 명줄은 마마께서 쥐고 계신 것입니다. 부디…….”

그때, 보은군은 민추환의 말허리를 끊으며 단호하게 입술을 열었다.

“저하를 도울 것입니다.”

“……예?!”

결국, 보은군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뜻밖의 말에 아우성치던 대신들이 한꺼번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잘못 듣기라도 한 건 아닌지, 그들은 눈을 끔뻑이며 보은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은군은 그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라의 위기입니다.”

“…….”

“조선의 위기이며 왕실이 송두리째 뽑힐 비극이 닥친 것입니다.”

“마, 마마……!”

“왕실을 기만하고 추악한 죄를 저지른 것은 중궁전입니다.”

“……!”

“그리고 중궁전을 도와 그 죄에 가담한 세력이 궐 깊숙이에 포진되어 있다면. 그것 역시 이 기회에 모두 뽑아 불태워 버려야 할 일이지요. 한데.”

“…….”

“비겁하게 숨을 생각만 하고 계십니까?”

단호한 그의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영의정을 내쫓자, 발을 빼자 소리치던 대신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화론 파, 수론 파.”

“…….”

“모두 가는 길은 다르나, 결국 같은 곳을 향해 가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궐의 안녕과 조선의 평안. 왕실의 번영과 백성의 안위!”

내내 조용하고 말 없던 보은군이 그 어느 때보다 근엄한 얼굴로 소리치자 모두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민추환은 안타까움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한데 저하께서 악의 뿌리를 뽑고 엄벌을 내려, 백성들의 억울함과 아픔을 치유하고 무너진 왕실의 기강을 다시 세우려 하시는데 어찌 도울 생각은 않고 도망칠 생각만 하는 겁니까!”

“…….”

“지금부터 나, 보은군은 세자 저하를 적극적으로 도와 이번 중궁전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 일조할 것이며.”

“……마마!”

“나아가 형님의 아우로서, 또한 저하의 신하로서!”

“……!”

“저하께서 왕위에 오르시어 조선을 다스리는 그 날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저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하니, 나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린다거나 입신양명할 생각은 지금 이 시각 이후로 접어야 할 것입니다.”

이내 보은군은 직접 밖으로 나가 아직 잡히지 않은 김 도령의 행방을 쫓기 위해 칼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에 민추환이 절대 안 된다는,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치려는 듯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니 되옵니다, 마마……! 그 일에 가담도 하지 않았던 마마께서 왜, 자처해 위기를 맞으려 하십니까! 영의정 대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아니요.”

“……?!”

“저는 이미, 저하와 같은 뜻이었습니다. 저 역시 이번 중궁전 밀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처음부터 나섰습니다.”

보은군의 선언에 넋이 나간 대신들은 허망함이 가득한 눈동자로 보은군을 올려다봤다.

“이것이 그 증좌라면, 믿겠습니까?”

그러면서 보은군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대신들의 앞에 내보였다.

“……!”

놀란 민추환은 보은군이 꺼낸 종이 한 장을 서둘러 받아 들었다.

“김 도령은 노름꾼들에게 여인들을 사들이기 위해 산속에 비밀 투전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 투전판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입니다.”

“……이것을 어찌.”

“나는 내가 해결하기 위해 가담했던 이 일을, 끝까지 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하니, 내 뜻을 따르실 분들만 따르시지요.”

그 말을 끝으로 보은군은 민추환을 지나, 자신의 무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가 굳게 그러쥔 칼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민추환은 허무한 얼굴로 바라보다 그만,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 *

“하긴 모르는 이라고 딱 잡아떼면 될 일. 그렇지요?”

한편, 추국청 안은 강 씨 부인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고 있었다.

중전은 자신의 곁으로 터덜터덜 끌려오는 자신과 같이 소복 차림을 한 강 씨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지만 강 씨 부인은 좀처럼 중전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이내 강 씨 부인은 중전의 옆에 나란히 앉혀졌다.

“이 여인은 김 도령의 부인이자 한양의 여인들을 직접 입궐시켜 그대에게 보인 장본인이지요.”

“…….”

“좀 알아보겠습니까?”

헌은 비스듬히 고개를 꺾어 중전 김 씨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중전은 피식, 조소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 옆에 앉은 이년이 모든 일을 꾸몄단 말입니까?”

“…….”

“감히 겁대가리도 없이 중궁전 처소에 쥐구멍을 만들어 자기가 빼돌릴 여인들을 모두 숨겨 놓았다? 네가 그러고도 살아남을 줄 아느냐?!”

오히려 중전은 강 씨 부인을 향해 버럭 소리치며 무서운 기세로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러자 강 씨는 벌벌 떨며 고개를 푹 조아린 채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김 도령이라는 자가 누구인지 저는 죽어도 모르옵니다!”

“…….”

“그저 그날, 애월루라는 기방에 가 김 도령의 소식을 듣고 오라는 웬 여인의 부탁으로 발걸음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죽어도 김 도령이라는 자를 모릅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과 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일관된 거짓말에 헌이 언성을 높였다.

“일 년 전! 네가 김 도령과 함께 손을 잡고 뛰어가는 것을 본 이가 있다!”

“……!”

“그날도 마을의 여인들을 빼돌리기 위해 김 도령과 모의 중이었겠지?!”

그 말에 가면을 쓴 것처럼 꾸민 표정으로 앉아 있던 중전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제, 제가…… 김 도령과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저는 김 도령의 얼굴도 모르는 것을요?”

살기 위해 끝까지 거짓을 뱉어내는 강 씨를 세찬 눈길로 바라보던 헌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러곤 저 멀리 추국청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진을 발견하곤 입술을 열었다.

“일 년 전, 풍등제가 열리던 밤. 너와 김 도령 목도한 이가 지금 이곳에 와 있다.”

“……!”

“영의정 대감의 여식 한 규수.”

동시에 중전과 강 씨 부인의 턱 끝이 예민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한 규수는 이쪽으로 와 그날 밤, 그대가 보았다는 김 도령의 부인의 얼굴을 확인하라!”

헌의 명령에 무표정하게 서 있던 소진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소진이 거리를 좁혀올수록 두 여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영의정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헌의 앞으로 다가가는 소진을 바라봤다.

초조한 것은 헌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강 씨 부인의 얼굴을 한 번도 확인한 적 없는 소진이었다.

그 때문에 소진이 그때 그 여인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반듯한 자세로 고개를 조아린 채 헌의 앞으로 다가온 소진은 자신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여인의 정수리를 바라봤다.

같은 소복을 입은 채, 같은 쪽 찐 머리를 한 이들.

소진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그날 밤 보았던 여인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김 도령 곁에 있던 여인의 얼굴.

그제야 소진은 감았던 눈을 떠, 얼굴을 내려다봤다.

순간,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소진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맞아……! 그때 그 여인이야!’

그때 그 얼굴을 다시 마주한 소진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입술을 열었다.

“예. 그때 그 여인이 맞습니다.”

“…….”

“김 도령과 손을 꼭 맞잡은 채, 장옷을 휘날리며 뛰어가던 여인이요.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말에 헌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갯짓을 해 보였다.

“뭣들 하느냐. 강 씨를 지금 당장 옥에 처넣거라. 김 도령이 생포되는 대로 즉시 죄를 물어, 엄벌에 처할 것이니.”

헌의 명령과 동시에 의금부 무사들이 달려와 강 씨 부인을 포박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소진의 눈이 의문스럽게 커졌다.

“어찌…… 저 여인을……?”

그 말에 헌도 그리고 강 씨 부인도 모두 소진을 바라봤다.

그때 발버둥 치는 강 씨 부인을 끌고 가려는 무사들의 손을 제지하며 소진이 소리쳤다.

“왜 중전마마를 데려가는 겁니까?”

“……?!”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소진의 말에 추국청 안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중전…… 마마라니요?”

헌이 제 귀를 의심하듯 소진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소진의 시선이 여전히 흙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중전 김 씨에게 닿았다.

“강 씨 부인은.”

“……?”

“저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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