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좀 닥치시지요.
2021.10.22.
궐을 나선 소진은 기다리고 있던 숙자에게 곧장 봉희의 소식을 전했다.
‘봉희 남편에게 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벗과 식솔을 기다리는 백성들에게 단비 같은 소식이 될 것이야.’
숙자가 봉희의 집 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고 소진도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곧장 보은군의 사가로 달음박질쳤다.
사위가 어둑해진 깊은 밤이라 그런지 더욱 으스스한 기분에 소진은 몸을 웅크렸다.
행여 누가 볼세라, 소진은 자세를 낮춘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보은군 대감…… 보은군 대감!”
기대와 걱정으로 뒤섞인 마음으로 그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곧, 삐거덕 문이 열리고 보은군을 모시는 하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뉘……신지요?”
“보은군 대감을 만나러 왔습니다. 한소진이라고 전해주셔요.”
하인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소진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때, 하인의 뒤로 내관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웬 소란…… 앗? 아씨?”
소진을 알아본 내관이 흠칫 놀라며 속히 그녀를 안으로 모셨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이리 늦은 시각에 어인 일입니까?”
그렇게 묻던 내관은 이내, 소진의 표정이 심상찮은 것을 느끼고는 하인에게 은밀히 명령을 내렸다.
“대문을 꼭 걸어 잠그거라. 명이 있기 전까지, 절대 열지 말거라.”
“예, 내관님.”
그러면서 내관은 소진을 데리고 보은군이 있는 안채로 안내했다.
“궐에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영의정 대감마님께서 곤경에 처하셨다는 것은 얼핏 들었는데…….”
“예. 그것 때문에 대감을 찾아온 것입니다. 아직 침소 들기 전이시겠지요?”
그렇게 묻는 소진의 시야에 환하게 불이 켜진 안채가 들어왔다.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침소 전이신 것 같습니다.”
내관이 예를 갖추어 대답하며 안채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마마. 손님이 찾아오셨사옵니다.”
소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굳게 닫힌 안채의 문을 바라봤다.
이내, 안에서 낮게 가라앉은 보은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이 시각에? 뉘신가.”
“한 규수님이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찰나가 영겁의 시간이라도 되는 듯, 소진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곧 정적을 헤집고 보은군이 직접 문을 열고 나왔다.
“낭자…….”
종일 기다렸던 얼굴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소진을 향해 기울어진 보은군의 시선은 깊었다.
“대감.”
소진이 한껏 고개를 젖혀 보은군을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는 얼른 들어오라며 고갯짓을 해 보였다.
“잘 오셨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낭자.”
곱게 휘는 그의 눈매를 바라보니 괜스레 긴장감으로 딱딱해진 소진의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를 따라 소진이 마루로 올라섰다.
상선이 안채로 들어서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 서둘러 대문 쪽으로 뛰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이리 늦은 시각에 직접 발걸음 하시고요.”
보은군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소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소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방 안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출궁하신 지 꽤 되었는데 이제야 대감의 사가에 들렀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대감.”
그녀의 말에 보은군이 엷은 웃음을 띤 얼굴로 느리게 도리질했다.
“아닙니다. 그럴 상황도 아니지 않았습니까. 앉으시지요.”
보은군이 먼저 자리에 앉고 이어 소진이 그의 앞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영의정 대감께서는 어찌하고 계십니까.”
“그저 잘…… 견뎌내고 계십니다. 하온데 대감.”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보은군은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이 궁금하면서도 어쩐지 긴장감에 허리가 뻣뻣하게 굳는 듯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중궁전의 밀실이 방금…… 드러났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여인들을 구해낸 것입니까?!”
그 소식은 보은군에게도 참 반가운 것이었다.
그가 반색하며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한층 더 높아진 그의 음성에 소진도 설핏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합니다. 참으로 다행인 일이지요. 그 때문에 궐 안팎이 시끄럽습니다.”
“저하께서 직접 중궁전의 밀실을 드러낸 것입니까?”
“예. 제 아버지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기에 이번 일에 가담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영의정 대감께서 큰 곤욕을 치르기 전, 중궁전의 일이 먼저 드러나 다행입니다.”
“해서…… 저하께서 지금 그 일을 오늘 밤, 완전히 파헤쳐 세상에 드러낼 계획이십니다.”
“그렇군요. 그것참 잘된 일입니다. 하면 김 도령의 행방은.”
“지금 막, 쫓고 있사옵니다.”
“저하께서 그 사건을 진두지휘(陣頭指揮)하고 계신 것이옵니까?”
“예……. 해서 말입니다, 대감.”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듯 소진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신중하게 입술을 뗐다.
“대감과 민 대감님의 사병이 필요합니다.”
보은군의 눈이 조금 커지는 순간이었다.
“사병이요……?”
나라에서 개인이 군사력을 지닌 것을 금기했지만, 암암리에 대신들이 사병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쯤은 소진도 그리고 헌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헌도 왜 사병을 보유하고 있느냐는 비난 대신 암묵적으로 그 존재들을 인정하고 나라의 위기인 만큼, 영의정과 민추환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
세자 다음으로 왕위에 닿아있는 그가 선뜻 사병을 입에 담기가 껄끄러운 듯, 보은군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소진이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저하께서 그것으로 책을 잡지는 않을 것이어요. 저희 아버지께서도 이미 저하께 보유하고 있는 무사를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김 도령이 한양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궐에 있는 호위대가 모두 도성 문과 뱃길, 그리고 한양 밖으로 향할 수 있는 모든 길을 가로막고 있사옵니다.”
“…….”
“그리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궐문도 지키고 있고요.”
“……아.”
“거기서 남은 병사들이 지금 김 도령을 쫓고 있다고는 한데, 턱없이 부족한 인력이라 대감께 청을 드리러…… 이렇게 왔습니다.”
괜스레 이런 청을 하기 위해 발걸음 했다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평생을 궐에서 살다, 갓 출궁해 낯선 것도 많을 테고 외롭기도 한 그였을 텐데.
한 번도 그에게 잘 지내느냐, 궐 밖 생활은 할 만하냐는 살가운 말도 건네지 못했던 소진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불쑥, 그녀의 마음을 헤집자 소진은 슬쩍 그의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보은군은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이 살며시 미소를 그렸다.
“잘 왔습니다, 낭자.”
“……예에?”
마침 들려온 그의 대답이 멋쩍어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소진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변함없이 따스한 미소로 소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당연히 도와야지요. 어찌 그걸 그리 어렵게 청을 하십니까, 낭자.”
“대감…….”
“잊었습니까. 낭자의 벗을 찾는 그 일에, 나 역시 발을 벗고 나서서 돕기로 하였던 것.”
“…….”
“내심 서운했습니다. 서운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마음이 불쑥불쑥 들고는 했지요.”
갑작스러운 그 말에 소진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의 고백이 괜히 낭자와 내 사이를 멀게 한 것은 아닐까.”
“……아.”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고, 그로 인해 낭자와 멀어지게 된다고 해도 그건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니 내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속상했던 것은.”
“…….”
“봉희 댁을 찾아주기로 한 것, 낭자가 짊어진 그 짐을 함께 나눠서 지려 한 것.”
“…….”
“그것을 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아쉬웠고 나의 도움을 더는 필요치 않아 하는 것 같아 서운했지요.”
뜻밖의 고백이 그녀의 코끝을 찡하게 했다.
더욱 그를 바라볼 수 없어 소진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리고 여전히 자신에게 다정하고 따스하기만 한 그의 모습이 소진의 가슴을 아릿하게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제 호위무사들을 궐로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외조부님께도 제가 잘 말씀드려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보은군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안채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채를 지키고 서 있던 무사 하나가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지금 당장 무사들을 모두 모을 수 있도록 하여라.”
선뜻 소진의 청을 들어주려는 보은군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는데.
그때, 갑작스럽게 대문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대문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쾅, 쾅, 쾅 대문을 두드리는 거센소리가 고요한 밤을 세차게 흔들었다.
하인들과 내관이 곳곳에서 뛰쳐나오며 보은군을 바라보았다.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납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급히 전할 말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소진이 찾아가려고 했던 민추환이었다.
불길한 기운이 그녀를 엄습하던 찰나, 보은군이 황급히 소진의 손을 잡았다.
“뒷문이 있습니다. 뒷문으로 나가서 얼른 저하께 가세요.”
“……대감.”
“외조부님은 반드시 설득시키겠습니다.”
보은군이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대문 밖의 민추환은 사정없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하께 궐문 앞으로 힘을 보탤 무사들을 보낼 것이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해주세요.”
“……민 대감님께서 허락해 주실까요?”
아무래도 궐의 소식을 듣고 보은군을 보호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것 같았다.
저 문을 열면, 분명 민추환은 소진과는 반대되는 뜻을 보은군에게 전할 것이었다.
듣지 않아도 짐작 가능한 민추환의 뜻에 소진은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조건 보내겠습니다.”
“대감. 민 대감님의 뜻을…… 거르신단 말씀입니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외조부님의 허락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러니 나를 믿고 저하께 가세요.”
그와 동시에 내관은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보은군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찌 하올까요, 마마.”
그러자 보은군이 소진을 내관 앞으로 데려갔다.
“낭자를 부탁하마.”
“……예?”
“낭자가 궐까지 무사히 가는 것을 보고 돌아오도록 하라. 낭자가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나면 대문을 열고.”
“예, 알겠습니다. 마마.”
결국, 소진은 내관의 안내를 받으며 뒷문으로 향했다.
보은군의 배려에 소진은 연신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게 됐다.
괜찮다며, 저만 믿으라는 듯이 보은군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쪽으로요, 아씨.”
바삐 걸음을 옮기며 소진은 입술을 악물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외조부와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아닐까.
남은 화론 파 대신들에게까지 밉보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별별 생각에 마음은 점점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워지고 있었다.
‘핏줄까지 소원하게 만들다니. 이 괘씸한 김 도령을…… 꼭 잡아 이 은혜, 모두 갚겠습니다. 대감.’
* * *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입을 열지 않아?”
“모르는 일이라고만 하옵니다.”
헌은 어느덧 머리 위로 바짝 오른 달을 올려다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제 처소에 버젓이 밀실이 있었는데, 그것을 모른다? 거기에 길고양이가 들락날락한 것도 아니고 저렇게 많은 여인이 있었는데?”
중전을 추궁하던 금부도사의 말에 헌이 재미있는지 옅은 웃음을 뱉고 말았다.
여전히 고고하게 고개만 치켜든 채 눈을 감고 있는 중전을 향해 헌이 고개를 돌렸다.
어처구니없는 그녀의 말에 헌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터벅터벅 중전의 앞으로 다가가 헌이 허리를 굽히며 그 비틀린 입술을 열었다.
“강 씨 부인.”
“…….”
“그 여인을 이리로 데리고 오면 저 밀실에 대해 좀 아는 것이 생기려나?”
“…….”
“아니면 김 도령?”
김 도령이라는 말에 그제야 중전이 감았던 눈을 떴다.
“무례하군요, 세자.”
“…….”
“감히 국모인 나를, 전하의 아들을 낳은 나를…… 이리 험하게 대하시다니요?”
“……뭐요?”
“이 뒷일이 무섭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헌은 중전의 귓가에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좀 닥치시지요, 중전마마.”
“……!”
“아직은 내, 그대에게 마마라는 호칭을 쓰고 있지만 한 번만 더 주제도 모르고 무례하게 군다면.”
“…….”
“나 역시 예의 따위는 치워버리고 지금 그대의 처지에 맞는 언사를 행할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헌의 등 뒤로 윤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강 씨 부인을 생포해왔나이다!”
추국청 안 모든 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추국청 앞에 막 당도한 소진도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었다.
“강 씨 부인. 드디어 네 얼굴을 마주하는구나.”
일 년 전, 치맛자락만 휘날리며 달아나던 그때 그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소진은 문고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