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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세자빈의 품격. (110/125)

110. 세자빈의 품격.

2021.10.18.

컴컴한 지하실 안에서 여인들이 하나둘, 무사들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감히 이곳에 궁인이 아닌 민간인이 있으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두 명도 아닌, 떼를 지어 올라오는 무리에 궁인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아,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대비는 황당함과 충격으로 얼굴이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영의정 또한, 밀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을 못 다물었다.

하지만 중전, 단 한 명만 평온한 얼굴로 고개만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모르는 일일세.”

연신 그 말만 되풀이하며 콧방귀만 끼고 있었다.

헌은 그런 중전을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중전 김 씨를 추국청으로 데려가거라. 중궁전 궁인들 역시, 한 명도 빠짐없이 포박해 함께 끌고 가도록 하여라.”

“예, 저하.”

나지막한 그의 명령에 호위대가 분주히 움직였다.

호위대가 다시금 중전을 포박한 채로 자리를 떠났고 중전은 순순히 그들을 따랐다.

그때, 발을 동동 구르는 소진의 눈에 수척해진 모습으로 지하실을 걸어 나오는 봉희가 보였다.

“봉희야!”

소진은 반가운 얼굴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달려갔다.

“소진아……?!”

봉희 역시, 저 멀리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소진을 발견하고는 두 팔을 벌렸다.

소진과 봉희는 뜨겁게 포옹했다.

소진의 품에 안긴 봉희는 꺽꺽, 숨이 넘어갈 만큼 서럽게 울어댔다.

“소진아…… 흐윽, 소진아……!”

“괜찮아. 이제 다…… 이제 모두 다 끝났어……. 꼭 다시, 구하러 온다고 했잖아.”

“네가 올 줄 알았어. 우린…… 우리는 믿고 있었어, 소진아…… 흑.”

“이제 집에 갈 수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봉희야. 응?”

두 여인의 뜨거운 포옹을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던 대비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그러다 헌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대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규수의 벗도 저곳에 갇혀 있었습니까.”

“예, 할마마마.”

“한 규수의 속이 타들어갔겠구먼.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한 규수는.”

“영의정 대감께서 미리 말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벗이 실종된 뒤로 마을의 여인들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한 규수에게 영의정 대감께서 모두 털어놓은 듯싶었습니다.”

“그랬군……. 대체 저 많은 여인을 어찌할 요량이었을까.”

대비는 추국청을 향해 멀어져가는 중전과 그의 무리를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무슨 꿍꿍이로 만삭인 몸을 이끌고 저런 짓을…….”

헌은 느리게 도리질하며 먹먹한 시선으로 봉희를 끌어안고 있는 소진을 바라봤다.

“하루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

“최소 한 해 이상 지속 되어 온 범죄입니다. 마을의 투전판을 이용해, 여인들을 잡아두었고 그 여인들 일부는 섬으로 또 일부는 이곳 중궁전 밀실로 보낸 것이었지요.”

굳게 입술을 사리 물은 대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섬으로 팔았다니?!”

“그렇다고 합니다. 이 일의 진상은 소상히 조사해 보아야 알겠지만, 여인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주 사람이길 포기하였군요. 대체 그 마음에 어떤 악한 기운이 깃들어야 저런 추악한 짓을 벌일 수가 있을까.”

“반드시 중전 김 씨와 그의 무리의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다, 파헤쳐 무거운 죗값을 치르게 할 것입니다.”

그때, 대비가 부둥켜안고 있는 소희와 봉희를 향해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가는 영의정을 응시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영의정 대감이 세자의 편에 서서.”

“……이번 사건이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사실 큰 도움을 준 사람은.”

“…….”

“한 규수입니다.”

그 말에 대비가 밀실에서 막 빠져나온 여인들을 하나, 하나 살뜰히 살피는 소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진은 여인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에 묻은 지푸라기를 손수 떼어주며 그들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괜찮소? 다들 몸은 괜찮은 것이지요?”

“예, 아씨.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내가 아니라 저하께 감사하다고 하셔야지요. 저하께서 모두를 구해주신 것인데.”

“저희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신 아씨 덕도 크지요.”

“예!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아씨!”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인사받는 소진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대비가 입술을 열었다.

“세자, 이 할미는 말입니다.”

“……예, 할마마마.”

“저 한 규수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가히 세자빈이 될 여인이구나, 그런 담대하고 총명한 빛을 지닌 아이구나, 싶었습니다.”

“…….”

“보세요. 한 규수에게서 고귀한 세자빈의 품격이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대비의 물음에 헌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의 깊은 시선 역시, 여인들과 마주하고 있는 소진에게 닿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헌의 눈빛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바라보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이번 일을 위해 큰 결단을 내려준 영의정 대감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네요.”

“꼭 자리 마련하도록 하겠사옵니다, 할마마마.”

곧, 영의정이 소진과 함께 헌의 앞으로 다가왔다.

대비가 영의정을 향해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는 먼저 돌아섰다.

“밤이 늦어 난 처소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세자. 새로운 일이 생기면 내게도 알려주세요.”

그러다 허리를 굽히고 있는 영의정의 앞으로 다가가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이어 말했다.

“일이 갈무리가 되면 대비전으로 부르겠습니다.”

“예, 대비마마.”

평소 눈만 마주쳤다 하면, 싸늘한 공기를 뿜던 두 사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대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고, 영의정의 곁에 반듯하게 서 있는 소진에게 다정한 눈짓을 보내고는 멀어졌다.

“저하……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이 있어서.”

영의정이 주위를 경계하며 헌을 향해 허리를 기울였다.

“지금 궐에 있는 모든 군사 인력이 어디, 어디에 배치가 되었습니까.”

“궐문을 지키고 있는 이들과 김 도령을 찾으러 간 이들 그리고 남은 이들은 그 세력이 한양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양을 빠져나갈 구멍을 죄다 막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영의정이 좀 전보다 더 은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원군과 우참찬, 그리고 중전이 보유하고 있는 군사 세력이 모두 더해지면.”

“…….”

“저하와 근위대들의 세력과 비등할 수도 있고 까딱하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것이 조금 염려되기는 하지만 워낙 뛰어난 훈련을 받은 이들이라.”

“포도청 사람들이 김 도령의 편에 있다는 것도 찝찝합니다.”

염려 섞인 영의정의 말에 헌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역시, 저도 염두에 두고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

“포도청 사람들이 은밀히 김 도령 세력을 돕는다면…….”

“도성문과 뱃길을 막는 것에 좀 더 많은 군사를 배치해야 할 성싶은데.”

소진은 그 말을 모두 곁에서 듣고 있었다.

굳어가는 영의정의 표정만큼이나 그녀의 가슴도 초조함으로 딱딱해지는 듯했다.

“우선, 제가 보유하고 있는 사병을 저하께 드리겠습니다. 도성문과 뱃길을 막는데 인원을 보충하시지요. 하오나 궐문 역시, 좀 더 군사 인력을 보충하면 좋을 듯싶사옵니다만.”

그 말에 소진이 영의정과 헌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입술을 열었다.

“저…….”

조심스레 운을 떼는 그녀에게 헌과 영의정의 시선이 쏠렸다.

“보은군 대감과 민추환 대감마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

“사병이라면 그분들도 꽤 보유하고 계실 것이온대.”

하지만 소진의 말에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이 이 사달이 났는데도 민추환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민추환을 포함한, 화론 파 대신 그 누구도 영의정을 찾아오지 않고 있으니.

영의정도 또한, 헌도 그들에게 선뜻 도움을 청하기가 꺼려졌다.

“민추환 대감과 보은군 마마의 사병이라면…… 어째 해결이 될 것도 같기는 하다만.”

영의정은 말끝을 흐리며 애써 소진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곤 참담한 마음으로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세자 저하께서 어찌 반대 세력에게 감히 도움을 청하겠느냐. 내가 이곳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으니, 민 대감을 만나러 가지도 못하는 처지고…….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이……. 차라리 수론 파 대신들의 사병을 따로 청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한참 영의정을 바라보고 있던 소진이 발끝만 바라보고 있던 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쪽 대감들의 사병이 더욱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 않사옵니까.”

“소진아.”

“그러니 아버지께서도 제일 먼저 민 대감마님 사병을 생각한 것이 아니옵니까?”

“그게 무슨…….”

“아까 혼잣말하시는 것 들었어요, 아버지. 민 대감마님의 도움이 아쉬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까?”

똑 부러지는 소진의 물음에 영의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수론 파 대신들의 사병을 죄다 모아봤자 영의정과 민추환의 사병 수에 크게 못 미쳤다.

권력의 크기와 사병의 규모는 맞먹는 것이었기에.

머뭇거리는 영의정을 바라보던 소진이 입술에 힘을 주었다.

“소녀가…… 보은군 대감을 만나 뵙고 오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헌의 검은 눈동자가 떨렸다.

“낭자.”

“청이라도 해봐야지요.”

하얀 달빛이 고고하게 내려앉은 소진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다부졌다.

영의정과 헌을 번갈아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도 단단하게 빛났다.

“아버지를 찾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찌 이곳까지 오라, 청을 넣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세자 저하께서 반대되는 세력에게 직접 도와달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제가 있지 않습니까.”

“낭자.”

“소진아……!”

이내 소진이 씨익, 웃으며 영의정과 헌의 손을 각각 그러쥐었다.

“잊었사옵니까? 저도 이미 세자 저하와 아버지와 같은 배를 탔다는 것을요.”

두 사람은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번지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하와 아버지께선 추국청에서 진실을 밝히는 데 힘써주시어요.”

“…….”

“소녀는 김 도령을 추포할 수 있게, 민 대감마님과 보은군 대감을 만나 뵙고 도와달라 청을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는 듯, 헌과 영의정이 여전히 근심으로 굳은 얼굴로 소진을 바라봤다.

“김 도령을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

“지금은 그 나쁜 자식을 잡는 것에 온 힘을 쏟아야 할 때입니다.”

소진이 그렇게 말하며 잡은 두 사람의 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면서 피식, 엷은 미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두 분, 지금 같은 표정 짓고 계신 것 아시옵니까?”

그 말에 영의정과 헌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

“흠, 흠흠.”

멋쩍은 듯 영의정이 헛기침하며 서둘러 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헌도 갑자기 그와 시선을 마주친 것이 쑥스러운지 괜스레 먼 산만 바라보았다.

“하면 두 분께서는 지금 같은 마음이시겠지요?”

소진의 말에 애써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헌과 영의정이 그녀를 직시했다.

두 사람의 애정 어린 시선에 그녀는 빙그레 입매를 끌어올리며 막 핀 꽃처럼 미소지었다.

“알겠습니다. 소녀, 걱정은 마시어요. 아시겠지요, 두 분?”

그러고 그녀는 두 사람의 손을 놓으며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봉희가 저 멀리서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진은 그녀에게 손을 휘휘, 흔들며 입술을 벙끗거렸다.

“내가 꼭, 김 도령 잡아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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